603화. 격돌 (3)
“기가 막히는군.”
패율은 혀를 내둘렀다.
철제 비갑에서 화탄을 쏘아 냈다. 대체 어떤 원리로 그런 것이 가능한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모르고 있다가 한 발 맞으면 천하의 고수라도…….’
실제 화포보다는 위력이 약하다. 하지만 장착한 비갑에서 언제든 쏘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실제 화포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양산해 내다니, 당가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완성된 게 아니라는 건가.’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소형 화포는 완성형이 아니라는 걸.
화포를 쏜 대원들의 팔이 모조리 부러져 있었다. 누구 하나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어지간한 내공으로는 화포의 충격을 상쇄할 수 없을 것이다. 부러지는 정도에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다.
‘다행이라…….’
패율이 인상을 찡그렸다.
다행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것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세상이라지만, 일개 무가(武家)가 화포까지 생산해 내고 있다는 건 절대 정상이 아니다.
‘하긴.’
정상은 아니지만, 사실 패율이 씁쓸해할 문제는 아니었다.
대륙에 사는 대다수 민간인에게는, 화포보단 차라리 무림인이라는 존재가 더 해악으로 여겨질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지금 상황에 집중해야지.’
콰르릉!
폭음과 함께 흑혈대가 또 한 차례 출렁거렸다.
그 앞에는 흑백의 손도끼를 휘두르며 화려하게 날뛰는 불꽃의 무인이 있었다.
파앙!
패율이 몸을 날렸다.
그는 연호정을 돕지 않았다. 그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 * *
훅.
낮게 흘러 들어오는 살기에 당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 멀리서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는 당관의 몸에서 풍기는 살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독해지는 살기, 얼마나 독한지 팔다리를 놀리는 것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지원군이라.’
흑혈대만으로 죽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스륵.
당호의 몸이 후방으로 물러났다.
별것 아닌 움직임인 것 같은데 어느새 이십여 장이나 뒤로 물러났다. 신형이 흔들린다 싶은 순간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움직임, 굉장했다.
당관의 눈이 빛났다.
‘섬영보(閃影步).’
당가 비전의 보법 중 하나다. 은밀함은 없지만, 내공 소모가 적고 속도가 빠른 것이 장점이었다.
옛날부터 당호는 유독 경신술에 재능이 있었다. 방금 구사한 섬영보 역시 은밀함은 없을지언정 인간의 지각 능력을 교란할 만한 신묘함을 보여 준다.
스륵.
당호가 서자 당관도 접근을 멈추었다. 둘 사이에는 십여 장의 거리가 있었다.
당관이 말했다.
“바로잡을 때가 되었다.”
“…….”
“순순히 무릎을 꿇어라.”
당호가 턱을 치켜들었다.
“당치도 않은 소리.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끔찍한 최후는 면케 해 주지.”
더 이상의 존대도, 뭣도 없다.
당관이 손을 들었다.
우우우우웅.
한 자루 비수가 진녹색으로 물들었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내게는 최악이다.”
“얌전히 무릎을 꿇으면 네 자식들은 낙원소로 보내지 않겠다.”
“……!”
당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그게 가능하겠냐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당호는 제 조카를 낙원소에 보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겠다고 말한 것이다.
“썩어 빠진 놈!”
화아악!
그렇지 않아도 분노를 참지 못하던 중, 당호의 발언은 일말의 동정심마저 앗아 가 버렸다.
“네놈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번쩍!
당관의 손에서 날아간 비수가 순식간에 당호의 목 앞까지 도달했다.
빛살과도 같은 속도, 단숨에 당호의 목이 꿰뚫릴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티이잉!
튕겨 나간 비수가 가주전의 외벽에 박혔다.
“……역시.”
비수를 튕겨 낸 팔이 은은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매 아래로 드러나는 연혈비갑. 공격을 예상하고 팔을 들어 막았지만, 충격이 뼛속까지 들어찼다.
힘의 차이가 클 줄은 알았어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인정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당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놈이 나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에 도달했다는 걸, 인정하겠다.”
당관이 차갑게 말했다.
“인정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더 이상 널 형제로 여기지 않을 것이니, 너의 모든 것을 무너트려 주마.”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화아아아아악!
당호의 소매 안에서 은은한 황색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양이 많지는 않은 듯했는데, 어느새 구름처럼 주변을 뒤덮었다.
‘칠보단혼산(七步斷魂散).’
당가의 오대극독 중 하나다. 강호에서도 유명한 독으로, 천하의 고수라도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목숨이 날아간다는 흉악한 물건이었다.
당관이 코웃음을 치며 손을 휘저었다.
후우우우웅!
거대한 구름을 이루었던 황색 연기가 당관의 장심(掌心)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독인의 경지를 이뤘어도, 제왕독공을 익혔어도 오대극독 정도가 되면 아무렇게나 다룰 순 없다.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당관에게는 예외 사항이었다.
그는 독공의 경지를 높이기 위해 오대극독을 제 몸에 쑤셔 박아 가며 생사의 수련을 한 사람이었다. 무형지독 정도가 아니고서야 목숨을 잃을 리는 없었다.
“당씨 문중의 주인을 상대하면서, 고작 극독을 풀어 내는 게 전부냐?”
당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둥!
순간 당관은 심장이 강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오만함은 여전한 것 같군. 내가 다루는 칠보단혼산이, 네놈이 아는 칠보단혼산과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주르르륵.
당관의 코와 입에서 시커먼 핏물이 흘러내렸다.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진다. 눈은 충혈되었고, 손끝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중독 증상이었다.
“너를 위해 준비한 게 많았는데, 이리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
“다시 말한다.”
치이이이익!
당관의 코와 입에서 흐르던 핏물이 한순간 적갈색 연기로 화하며 흩어졌다.
창백했던 얼굴에 다시 혈색이 돌고, 충혈되었던 눈도 본래대로 돌아왔다.
당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극독 정도로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당관의 손끝에 누런 물기가 어렸다.
뚝. 뚝. 치이익!
손끝에서 떨어진 물기가 바닥에 닿은 순간 땅이 타들어 갔다.
단순한 칠보단혼산이 아니었다. 당호가 살포한 독을 매개로 삼아 체내의 탁기까지 모조리 뽑아낸 것이다.
약간의 내공이 소모되었지만, 오히려 몸 상태는 이전보다 더 좋아진 셈이었다.
당관이 주먹을 쥐었다.
“잡술로 증세와 침투 경로를 바꿨다고 하여 근본적인 독성마저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니라.”
당관이 주먹을 휘둘렀다.
‘위험!’
콰앙!
허공을 격하고 쏘아진 권풍에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던 바위가 폭발했다.
당호의 얼굴에 식은땀이 어렸다.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서 다행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이번 일격으로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후우우웅.
주먹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당관의 표정을 가렸다.
“그러나 그냥 죽으면 안 되지. 네놈의 더러운 민낯을 모두가 본 연후에 죽어야 할 것이다.”
당호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내 목숨을 네놈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파아아아앙!
당관이 어느새 당호의 이 장 거리 앞에 도달했다.
눈이 부신 속도였다. 신법에 자신이 있는 당호조차 순간 기겁할 만한 속도였다.
당관의 손이 당호의 어깨를 노렸다.
찌이이익!
당호의 어깻죽지 부근의 옷깃이 그대로 찢어졌다.
당호 정도가 되면 전신의 기가 융통무애하여 어지간한 충격에도 옷에 흠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쉽게 옷을 찢어발겼다.
어깨가 잡혔다면 팔 하나가 그대로 찢겨 날아갔을 터.
‘죽는다.’
당호가 섬영보를 극성으로 구사했다.
‘잡히면 죽는다!’
파파파파팡!
두 사람의 신형이 허공을 어지럽게 수놓았다.
당가인으로서 누구보다 신법에 자신이 있는 당관, 독과 암기의 성취보다 경신술의 성취가 훨씬 뛰어난 당호.
두 형제의 움직임은 절정고수의 눈으로도 좇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대단하군.’
치밀어 오르는 살의를 떠나, 당관은 당호의 경신술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싸가지의 속도에 비할 정도야.’
순간의 폭발적인 속도만 놓고 보면 연호정이 미세하게 더 빠를 것이다.
그러나 지속성으로 보면 당호가 분명 한 수 위였다.
이건 정말 대단한 것이다. 경신술은 여타 무공과는 달리 경지와 제법 동떨어진 것이지만, 극한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 속도를 보여 주는 건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음을 증명한다.
‘이런 재능을 갖고서.’
당관의 눈이 어두워졌다.
‘대체 왜 사도(邪道)에 빠져 버린 것이냐.’
당호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재능에 한계가 있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당관이 봤을 때, 당호의 재능은 절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보다는 못할지언정 그 차이는 결코 크지 않았다. 단순 노력으로 뒤엎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 재능을 믿고 한 발, 한 발 착실히 나아갔다면 지금쯤 자신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는 고수가 되었을 것을.
당관이 힘차게 손을 뻗었다.
퍼어어어엉!
허공에 폭발이 일며 당호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파아앙!
공격하기도 전에 상대가 회피할 곳을 인지한 당관이 어느새 당호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훅!
대단하다.
찰나지간 허리를 꺾어 권격을 피해 냈다. 이 순간만큼은 천하의 당관이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퍼퍼펑!
속도에선 뒤지지 않지만, 무력 자체의 차이는 분명했다.
당관은 이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숨 쉬듯 자연스레 격공장을 구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호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당호의 신형이 위태로워졌다. 어떻게든 격공장과 당관의 순간 기습까지도 피해 내고 있지만, 점점 시야가 어지러워지고 기감도 피폐해지고 있었다.
번쩍!
비로소, 마침내.
움직임에 파탄이 난 당호의 허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당관이었다.
퍼어어어어억!
한 줄기 비수가 날아가 당호의 복부에 꽂혔다.
단숨에 죽일 생각이라면 극독을 실은 권장으로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섬세한 독술로는 당호를 제압하는 데에 시간이 들었다.
암기 역시 마찬가지다. 단번에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무궁무진한 당가살법(唐家殺法)을 봉인해야만 한다.
그런 걸 쓰지 않고도 충분히 제압이 가능한 자. 그래서 당관이 가주인 것이다.
“이만 끝내도록…… 음?!”
빠른 속도로 땅에 떨어지던 당호가 일순 몸을 뒤틀었다.
타아아앙!
한 줄기 비수가 당관에게 날아갔다.
당관이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비수를 잡아챘다.
‘이건?’
이 비수는 당호의 배에 박혔던 비수였다.
한데 놀랍게도 비수 날에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분명 배를 뚫고 들어갔는데?!’
더 놀라운 것은.
‘강하다.’
비수를 잡은 손에 희미한 충격이 남았다.
당호의 실력으로 뿜어낼 만한 힘이 아니었다. 수사포접공의 무리(武理)조차 버거울 만한 공격력이었다.
‘어떻게……?!’
파바바박!
땅에 내려선 당호가 당관을 향해 쌍장을 휘둘렀다.
콰르르릉!
당관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치솟아 올라오는 장력의 위력이 실로 대단했다. 천하의 당관조차 함부로 받아 내기 꺼려질 만한 힘이었다.
피이이잉!
회전하여 장력을 피해 낸 당관이 땅에 내려섰다.
“후우우우.”
가볍게 숨을 내쉬는 당호. 그의 두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관이 차갑게 말했다.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그걸 내가 왜 말해 주겠느냐?”
당호가 씨익 웃었다.
피처럼 붉게 달아오른 동공이 그의 미소를 흉악하게 꾸며 주었다.
“예상 그대로구나. 역시 네놈은 가주의 그릇이 아니야.”
“……?!”
“잘 왔다, 나의 왕국에.”
콰드득!
주변 땅 곳곳에서 시커먼 그림자 수십 개가 튀어 올라왔다.
* * *
번쩍!
혼란으로 가득했던 당형의 눈에 놀라움이 드리워졌다.
“귀문(鬼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