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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608화 (607/963)

608화. 문제의 중심 (3)

“쿨럭!”

피를 토하며 주저앉은 당호의 얼굴에 낭패가 어렸다.

‘뭐야?’

주르르륵.

몸 곳곳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서둘러 내공을 운용, 혈을 짚어 지혈해 의식이 흐려지는 걸 막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과다 출혈로 쓰러지는 건 막았으되, 상처로부터 침투한 발경이 온몸을 헤집어 놓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제법이구나.”

치이이익!

당관의 몸에서 연기가 났다.

사자소혼진의 진기 흐름 억제를 힘으로 무너트리는 그였다. 그의 체내에 침투한 진법의 기운이 제왕독공의 기운을 이기지 못해 모공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당호는 확신했다. 성천의 경지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 진법 안에서 멀쩡할 수 없을 거라고. 아니, 설령 성천의 강자라 할지라도 이 진에서 벗어나려면 꽤 공을 들여야 할 거라고 확신했다.

사자소혼진은 실로 그럴 만한 위력을 지녔다. 그가 귀문주 당충호에게 받은 기술 중 손에 꼽히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한데 통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힘으로 깨부쉈다면 뭔가 기이한 독이나 폭약을 썼다고 의심이나 할 수 있으련만.

“벌써 끝이냐?”

울컥한 당호가 벌떡 일어나려다가 이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우웨엑!”

쏟아 내는 핏물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당호의 눈이 흔들렸다.

‘언제 내상이……?!’

순간 그는 도반삼양귀원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주르륵.

내상을 감수하고 진기를 끌어올려 전신 혈도를 살피니, 그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런 미친!’

당호가 떨리는 눈으로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관은 무심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신에서 진한 연기를 뿜어내며 당당하게 선 그의 얼굴은 마치 신화 속 안개를 헤치며 나타난 거인처럼 보였다.

‘침투경에도 독기가 어려 있다. 어찌 이럴 수가!’

침투경은 발경 특성상 순수한 진기 외에 독기를 싣기가 지극히 어려운 공부다.

한데 당관의 침투경에는 독기가 실려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상처에 남은 발경 흔적에까지 독기가 남아 있었다.

발경은 죽어도 독기는 죽지 않았다. 그 독기가 끊임없이 내상을 유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당호조차도 모르게!

심지어 직접 손을 쓴 것도 아니고 암기로 공격했음에도.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당관의 목소리는,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정말 마지막이다. 그의 분위기가 그리 말해 주고 있었다.

“얌전히 무릎을 꿇어라. 죽음을 면치는 못하겠지만, 본가 사서에 반역자로 이름이 오르진 않을 것이다.”

“…….”

“어찌할 테냐.”

당호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자소혼진으로 끌어들여 놓고도 당관을 이기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더불어, 놈이 패배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현실 자체에 분노한 것이다.

‘죽인다.’

극도의 분노 때문에 오히려 표정은 차분해졌다. 하지만 들끓는 살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크기를 불리고 있었다.

‘찢어 죽인다!’

그때, 당호의 눈에 당관의 손에 들린 철구가 보였다.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철구는 절반 가까이 함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 잡아 뜯거나 힘으로 부순 것이 아니었다.

‘뭐였지?’

철구를 보는 당호의 눈이 점점 멍해졌다.

‘조금 전 그건 대체 뭐였느냔 말이다!’

당관의 손에서 한 치 정도 떠오른 철구에서 뿜어진 빛의 꽃잎.

매화 잎 같기도 했고, 버드나무 잎 같기도 했다. 엄청 작은 댓잎처럼 보이기도 했고, 잡초 가닥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수많은 빛의 편린들이 사방을 뒤덮으며 조여 오는 기이한 암기술은, 당호 생애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신(神)의 기술이었다.

“역시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냐?”

당관의 얼굴이 굳어졌다.

“잘못은 했다지만 너 역시 당씨의 피를 이은 녀석이니 그 자존심이 어지간할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하였으나, 생각해 보면 널 모욕하는 발언이었을 수도 있겠다.”

빌어먹을.

당호는 초조했다.

단 한 방이었다. 저 이름 모를 무공은 사자소혼진으로 증폭된 내공이나 진기 흐름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실력의 차이, 내공의 차이도 무효화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하물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진기와 의념만으로 그러한 기술을 구사한 것 같았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곧장 미지의 살법이 날아들 것이다.

‘어떻게 하지?’

이길 방법이 없다. 역전은 불가능했다. 굳이 본능이 아니더라도, 드러난 결과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 그걸 쓰면……?!’

당호는 강렬한 유혹에 휩싸였다.

귀문의 존재와 달리 ‘그것’은 당가주만이 아는 당가 최후, 최악의 병기였다. 그리고 그 병기를 당호 역시 갖고 있었다.

‘안 돼. 그걸 쓰면 진짜로 암왕이 나올 수도 있다. 그리되면…….’

어느새 그에게는 아버지도 암왕이 되어 있었다.

당호의 눈이 충혈되었다.

‘그리되면, 나는 암왕도 죽여야 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쓰면 암왕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사자소혼진 같은 신묘한 진법 따위가 아니었다. 그 병기를 쓰면 암왕이 문제가 아니라 당가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최후의 병기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는.

“널 죽이겠다고, 형제라 생각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난 아직도 너를 형제라 생각한다. 혈육이라는 것은 그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단번에 끊어 낼 수 없을 만큼 끈끈한 인연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고 있다.”

닥쳐!

당호는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과연 그것을 쓸 것인가? 하지만 지금 써도 되는가? 그걸 쓰면 나도 위험한데? 아니, 어차피 그걸 쓰려면 이곳에서 벗어나야만 할 텐데?

머릿속이 한순간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런 결과는 정녕 예상치 못했다. 순간적으로 사람을 속이는 기술에는 능하지만,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빠져나올 기지는 부족한 그였다.

“그러나, 그래도.”

스르릉.

당관이 철구에서 삐죽 튀어나온 부분을 잡아떼었다.

한데 뭉쳐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쑥 당기니 너무나도 쉽게 빠졌다. 이음새도 보이지 않을 만큼 꽉 뭉쳐 있었던 것 같은데, 어찌 저런 게 가능한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끝을 봐야겠지. 더는 이 미친 싸움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

스릉.

철구에서 뽑아낸 것은 작은 칼날이었다. 비수보다도 더 작아서 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크기였다.

그러나 당호는 당관의 손에 들린 저 작은 칼이 너무나도 위험해 보였다.

바늘 하나, 모래 한 줌만 쥐여 줘도 암기술을 구사하는 것이 당가의 무인이다. 하물며 당관은 그런 당씨의 정점이었다.

‘위험해. 진짜 위험해!’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시간이 느린 듯하다가도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간다. 당호의 초조함이 한계치에 도달했다.

“네가 지은 죄를 생각하면 온몸을 갈아 버려도 시원찮겠지만, 그래도 혈육이니 시신만은 온전히 유지해 주마.”

당관이 비수를 쥔 손을 들었다.

“잘 가라.”

제기랄! 제기랄!!

“……하겠소.”

“뭐?”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뭐라 하였느냐?”

당호가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래를…… 하겠소.”

“…….”

당관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거래라니,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거래를 말함인가?

“못난 놈.”

당관의 얼굴에 기어이 혐오감이 드리워졌다.

“진실로 말하마. 진실로, 너는 더 이상 내 형제가 아니다.”

그가 비수를 휘둘렀다. 일말의 머뭇거림도 느껴지지 않는 냉정한 움직임이었다.

피잉!

당관의 손을 떠난 비수가 벼락처럼 당호의 이마를 노렸다.

몸이 멀쩡해도 막거나 피하기 힘든 공격이었다. 당호는 고개를 숙인 그대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때.

쩌어어어어어엉!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허어.”

누군가가 당호의 옆에 나타났다.

“정말이지 아슬아슬했어. 안 그래, 당호?”

묘한 목소리였다.

조곤조곤한 목소리, 하지만 귀에 탁탁 꽂힌다. 조금 더 크게 말해 주면 좋았을 걸,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더니 결국 이 지경이 되어서야 거래라. 진즉 말했으면 서로 고생하는 일 없이 말끔하게 처리되었을 것을.”

백면인이 키득키득 웃었다.

“하긴, 사람이 다 그렇지. 꼭 되지도 않는 자존심을 부리다가 마지막에 후회를 해. 결과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누구냐.”

“음?”

백면인이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관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고 물었다.”

백면인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올시다. 나도 내 이름을 들은 지가 오래돼서.”

묘한 자였다.

목소리나 말투도 그렇지만, 행동도 가볍기 그지없었다. 희극적인 몸짓이 마치 어느 유랑극단의 해학극 속 인물 같았다.

“너.”

당관이 당호를 보며 말했다.

“대체 누굴 집안에 들인 것이냐!!”

쩌어엉!

갑작스레 커진 목소리였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당관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눈앞의 백면인이 보통이 아님을. 당장 지금의 자신조차 승패를 가늠하기 힘든 고수임을.

그리고 그런 걸 떠나서…… 이 작자는 중원 무림인이 아니었다.

논리가 아닌 직감이었다. 말투나 행동을 떠나 기이한 기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당호가 고개를 들었다.

굴욕감으로 가득한 얼굴, 그러나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린 표정이었다.

“정리해 주시오.”

“암, 그래야지. 거래에 응했는데, 정작 거래할 사람이 사라지면 안 되잖아? 거래자의 목숨을 노리는 놈들은 전부 치워 버려야지.”

“사자소혼진은 치워 주겠소.”

“아니, 치우지 마. 오히려 안 치우는 게 좋아. 네 덕분에 나도 이 진법에서 많이 놀아 봤거든.”

“……언제?!”

“항상 그랬지.”

당호의 얼굴에 질린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왕이면 죽이고, 안 되면 팔 하나라도 뽑아 놓으시오.”

“걱정하지 마. 죽일 수 있으니까.”

스르륵.

당호가 서서히 멀어졌다.

당관이 버럭 외쳤다.

“감히 어딜 가느냐!”

피피피피피핑!

철구에서 뽑혀 나온 수십 개의 빛살이 당호를 향해 쏘아졌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였다. 당호가 손도 못 쓰고 당한 것이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그때, 백면인이 움직였다.

쩌저저저저정! 픽!

“어이쿠야, 이게 뭐야?”

스르륵.

당호가 사자소혼진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곳에, 백면인이 남았다.

백면인은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찢어진 장포 속에서 핏물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거…… 정말 엄청나군.”

백면인의 목소리가 한층 진지해졌다.

“제대로 된 기술을 구사한 것도 아니요, 그냥 암기를 날린 것만으로도 이런 관통력과 선회력이 나온단 말이지?”

“네놈은 뭐냐?”

마음 같아선 당장 당호의 뒤를 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눈앞의 이 백면인이 자아내는 기묘한 기도가 그를 안개처럼 옭아매고 있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당호의 도반삼양귀원공이 반쪽짜리가 된 원인, 그 기괴한 마공을 전해 준 사람이 바로 이놈이라는 것.

백면인에게서는 그 무공의 냄새가 진하게 나고 있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소. 이름 들은 지가 오래돼서 까먹었다고.”

툭. 툭.

대체 어디에 숨기고 있었던 건지.

어느새 백면인의 손에 기다란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가 들려 있었다. 얼핏 봐도 무게가 삼십 근은 나갈 것 같은 중병(重兵)이었다.

“쓸데없이 주절거리는 건 그쯤 합시다. 동생이랍시고 기회를 주니 마니 어쩌고저쩌고, 내 귀가 다 아플 정도였소이다. 원래 싸울 때 그리 말이 많소?”

“……?!”

부우우웅!

삼첨양인도를 빙글빙글 돌리던 백면인이 자세를 낮추었다.

“자, 칼부림의 시간이올시다!”

“이놈!”

치리리리리링!

철구가 비산하며 백면인을 향해 쏘아지고, 백면인의 삼첨양인도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