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화. 무너트리다 (1)
가주전 후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편편한 바위에 앉아 있는 당호의 그림자는 짙고도 짙었다.
우우웅. 우우웅.
미동도 없이 앉은 그의 몸에서 진기가 끊임없이 파랑을 일으켰다.
당호의 뒤에 선 당여선은 침을 삼켰다.
‘뭐지?’
아버지의 몸에서 풍겨 나오고 있는 기묘한 진기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아버지께서 이런 무공을 연성하셨던가?’
도반삼양귀원공의 진기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독기(毒氣)로 보이지 않는 기괴한 무언가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보는 이의 정신을 수렁에 빠트리는 묘한 기운.
당여선은 지독한 불길함을 느꼈다.
그때였다.
“……오셨군.”
훅!
한 줄기 뜨거운 바람과 함께, 수백 년 당가 역사에 선혈을 뿌린 부자 앞으로 한 노인이 다가왔다.
새하얀 의복 위, 시커먼 장포를 걸친 노인.
그리 큰 체격이 아님에도 굉장한 존재감을 자아낸다. 진기를 발산한 게 아닌데도 당여선은 숨을 쉬기 어려운 압박감을 느꼈다.
굳은 얼굴의 당호가 천천히 바위에서 내려왔다.
“오셨습니까.”
노인, 당형은 말없이 당호를 바라보았다.
당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비틀려 보이는, 묘한 미소였다.
“아버지께서 당대 본가의 일에 간섭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버지.
순간 당여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조부님!’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그의 앞에 있는 노인은 기억에도 없는 어린 시절을 끝으로 뵌 적이 없는 조부님이 분명했다.
말로만 들어 왔던 당가의 전설. 당대 강호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성천의 강자 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암왕 당형은 전대를 넘어 당가 역사상 최고라 불리는 절대고수였다.
그 앞에서는 누구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렵다. 자신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는 물론 당가의 수뇌부 모두가 덤벼도 옷깃 하나 건드리기 힘든 고수가 조부님이었다.
당여선은 홀린 듯 당형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뿜어지는 엄청난 존재감에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당형이 당여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헉!’
당여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형의 눈빛을 받은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던 것이다.
무표정했던 당형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드리워졌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여선.”
“……!”
“조부를 봤는데 인사도 하지 않을 셈이냐?”
당여선은 아차 싶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여, 여선이 조부님을 뵙습니다!”
“그래.”
당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요만했던 녀석이 어느새 청년이 다 되었구나. 정말 많이 컸어.”
그럴 상황은 아니었지만, 당여선은 괜스레 벅찬 감정을 느꼈다.
가문의 전설, 강호의 전설로 통하는 고수가 자신더러 많이 컸다고 한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여길 수도 있지만, 그 울림은 결코 작지 않았다. 당여선은 선망 어린 눈으로 당형을 바라보았다.
당형이 다시 당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호의 얼굴은 어느새 미소가 사라지고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당형이 말했다.
“용케 담을 넘지 않았구나.”
“…….”
“잘했다. 담을 넘었다면 모양새가 좋지 않았을 것이야.”
“……그렇습니까.”
“도망친 자식을 잡아 죽이기 위해 날뛰는 부모의 모습이, 보기 좋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오싹!
당여선은 물론 당호조차 그 발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당형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너에게 이유를 묻지 않을 것이다.”
“…….”
“당대 가주를 모함하여 반역자로 몰고, 스스로 가주위에 앉은 녀석에게 이유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을 테니.”
“아버지.”
“또한, 네 녀석이 사천 전 지역에 걸쳐 민간인을 납치해 부덕하기 그지없는 짓거리로 본가의 명성에 먹칠한 행위 역시 굳이 이유를 들을 필요가 없을 듯하구나.”
순간 당호의 눈이 흔들렸다.
‘알고 있다?!’
낙원소의 존재를 알고 있다. 아버지가, 암왕이, 당형이!
‘대체 어떻게?’
아들의 표정을 본 당형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역시 사실이었더냐.”
당호는 아차 했다.
당형도 낙원소의 일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표정이 그에게 확신을 준 것이다.
‘빌어먹을!’
이제 와서 낙원소의 존재가 알려진다 한들 큰 의미는 없다.
하지만 당호는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하게 젖는 것을 느꼈다.
마치 어린 시절에 나쁜 짓을 하다가 엄한 아버지에게 들켰을 때처럼.
당장이라도 불호령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물며 지금의 사건은 어린 시절 저질렀던 나쁜 일과는 그 밀도와 범위가 차원이 달랐다.
그것을 생각한 순간, 당호의 눈이 충혈되었다.
‘나쁜 일이라니.’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일이다? 그렇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당호는 그것을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차근차근 노력한 결과일 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불행이지만, 당호에게는 아니었다.
시대의 패자가 되기 위해선 희생이 불가피하다. 영웅과 공적은 한 끗 차이에 불과한 법, 당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저지른 일들을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훅!
당호의 몸에서 이는 기운이 한층 더 짙어졌다.
당형이 눈을 감았다.
‘역시.’
아들의 몸에 도사리고 있는 저 불길한 마기.
당황하여 제멋대로 꿈틀거리던 마기가 순간적으로 도반삼양귀원공의 기운을 침식했다.
그것만으로도 당호의 마음이 더 어두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당형은 깨달았다. 이미 둘째는 너무 멀리 가 버렸다는 것을. 어린 시절처럼, 혼을 내는 것만으로 끝낼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당형은 탄식했다.
“정말이지, 본가에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찌 나오신 겁니까.”
당호의 볼이 씰룩거렸다.
“아버지께서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깰 분이 아닙니다. 한데 어찌 그 맹세를 깨고 나오신 겁니까?”
“…….”
“전대는 당대의 정치 참여를 금한다는 조항을 어기셨습니다.”
“그 조항을 만든 형의 자리를 빼앗고 가주위를 강탈한 네 녀석이 할 말은 아닌 듯하구나.”
“중요한 것은 이미 그 조항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지요. 뭐가 어찌 되었든, 아버지께서는 그곳에서 나오셔선 안 되었습니다.”
“그러려고 했다.”
당형의 눈이 깊어졌다.
“그러려고 했지. 하지만 지금에 와서, 네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있습니다!”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강렬한 욕망과 드높은 자존심이 함께했다.
“제가 당대 당문의 주인입니다! 당씨 성을 물려받은 모두의 목숨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주인이란 말입니다! 설령 아버지라 한들, 문중의 주인을 억압하려 드는 것은 가법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가문의 주인이라는 녀석이,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도망을 쳤더냐?”
“……!”
“당씨 문중의 주인은 도망 따위 치지 않는다. 너는 가법을 들먹이며 애비인 나의 행동을 지적하지만, 결국 너에게 유리한 가법만을 들먹이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다.”
당호가 이를 악물었다.
“가주란 그런 것입니다! 주인이란 그런 것입니다! 당씨 문중의 주인은 왕이며, 왕에게는 절대 권력이 주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왕이 도주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냐?”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는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수장이라는 자리는!!”
쩌어어어엉!
당형의 폭발적인 일갈에 당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뿜어져 나온 목소리에 엄청난 내공이 실려 있었다.
“한 조직의 수장이란 자리는 권력만을 행사하는 자리가 아니야! 권력은 곧 책임이다! 모든 당씨의 목숨을 한 손에 쥐고 흔든다는 것은 그들 모두를 책임지겠다는 뜻이니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모두를! 아버지나 저 반역자가 나서지만 않았어도……!”
“지금 내 앞에서 네 형을 반역자라 하는 것이냐!!”
당호의 어깨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번쩍!
두 눈 가득 무시무시한 광채를 뿜어내는 암왕의 주시는, 제아무리 막 나가는 당호라도 쉽사리 버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반역을 누가 저질렀느냐?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운 것도 모자라 이 가문을, 이 사천의 대지를 병들게 한 놈의 입에서 감히 반역자라는 말이 나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앞에서!”
당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렇다. 이미 당형은 다 알고 있다. 자신이 한 일을, 그리고 당관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당호는 이미 타인에게 뱉은 거짓말이 진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수준에 와 있었다. 타인을 속이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마저도 어느새 그것이 진실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당형은 그 거짓된 믿음을 무시무시한 일갈로 박살 냈다.
“네가 저지른 짓을 직시하라! 네 잘못을 어쩔 수 없었다고, 꿈을 이루기 위한 삶이었다고 변명하지 마라! 너는 그저 협잡과 거짓으로 본가를, 사천을 병들게 했을 뿐이다!”
“……!!”
당호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매섭게 호통을 치던 당형이 숨을 골랐다. 감정이 격해졌다 한들 이만한 고수가 호흡이 흐트러질 일은 없을 터, 그만큼 심란하다는 뜻이었다.
“이제 다 끝났다.”
“…….”
“내가 나선 이상, 네가 저지른 일이 모조리 밝혀질 것이다.”
우두둑.
당호의 주먹에서 살벌한 소리가 터졌다.
당형이 턱을 치켜들었다.
“무릎을 꿇어라. 지금 무릎을 꿇고 모든 죄를 시인한다면, 적어도 네 자식마저 뇌옥에 갇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헙!”
당여선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아버지의 자식은 곧 자신이다. 조부님의 말은, 아버지가 죄를 시인하지 않으면 자신도 파멸할 거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아버지.”
당여선은 저도 모르게 그리 말했다. 아버지라고.
그때, 당호가 키득거렸다.
“아버지라.”
아버지와 아들. 부모와 자식.
가문과 핏줄, 가법과 혈육지정.
“그런 것은.”
사아아악!
당호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올올이 풀려 나왔다.
마기였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짙어진, 이제는 도반삼양귀원공을 바탕으로 했다고 볼 수조차 없어진 마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미 버린 지 오래야!!”
당호가 힘차게 대지를 찍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득의양양한 얼굴로 당형을 노려보던 당호는 순간 당황했다.
‘어?’
왜 폭발하지 않지? 왜 독탄이 터지지 않지?
왜 암기의 진이 발동하지 않지? 왜 천뢰가 가동되지 않는 거지?
“어설프구나.”
당형은 여전히 뒷짐을 지고 있었다. 뒷짐을 진 채, 묵묵히 당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당형을 보던 당호는 문득 자신의 오른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
당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진각을 밟으려던 그의 오른 다리 곳곳에, 어느새 수십 개의 철판 조각이 박혀 있었다.
푸화아아악!
대량의 선혈이 뿜어졌다.
“크아악!”
당호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오른 다리가 너덜너덜해졌다. 동시에 부서진 철판 조각이 더욱 잘게 부스러지며 그의 혈관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들, 그런 아들을 내려다보는 아버지.
“사천의 땅에서만큼은 진법도, 기관도, 협잡도, 거짓도 통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게는.”
“으아아악! 크아아아악!”
“이제 모든 것을 끝낼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