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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616화 (615/963)

616화. 무너트리다 (4)

“끄으으응!”

당병찬은 깜짝 놀라 자신의 앞을 바라보았다.

황면인이 내리치는 참마도를 막은 사람이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에, 여기저기 베여 의복도 제구실을 못 하는 상태였다.

전쟁이라도 치른 듯한 외양. 베이고 찢긴 의복 속에 드러난 어깨와 상완 근육이 대단했다.

“시벌, 뭐가 이렇게…….”

훅!

어깨와 상완 근육이 일순간 크게 부풀었다.

“강하냐고!”

카아앙!

폭발적인 검경(劍勁)에 그 무거운 참마도가 뒤로 튕겨 나갔다.

굉장한 탄력, 무서운 내공이었다. 검의 예기를 줄인 채 힘으로 튕겨 내는 기술, 공력의 밀도가 어지간한 초절정고수를 상회하고 있었다.

모용군의 눈이 흔들렸다.

“자네는?!”

“후욱!”

빛살처럼 달려와 당병찬을 구한 자.

바로 강량이었다.

“어디 있다가 이제야 온 것인가?!”

“시파,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오! 여기까지 쫓아온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실상을 알면 놀랄 만한 일이긴 했다.

강량이 남은 황면인 하나와 싸운 시간은 실제로는 지극히 짧았다. 하지만 그 시간이 아무리 짧았다 한들 치열하기 그지없는 싸움이었고, 그 시간 동안 이들 무리가 걸어서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리 빠르게 도달했다는 건, 강량의 신법이 이전과 차원이 다른 속도를 냈다는 뜻이었다.

‘이상해.’

전장을 둘러보는 강량의 눈빛은 매서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 몸이 왜 이러지.’

후욱!

회심의 일격이 막힌 분노 때문인지, 참마도를 든 황면인의 공격은 이전보다 한층 더 매섭고 강렬했다.

강량이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엉!

강량의 몸이 미친 듯이 뒤로 밀려났다. 반면 참마도를 휘두른 황면인은 그 자리에서 주춤하고 말았다.

‘대체.’

파아아악!

뒤로 밀려난 강량이 다시 화살처럼 전방으로 튀어 나갔다.

밀려 나간 충격이 심할 텐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얼핏 보면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황면인의 눈에서 살기가 폭발했다.

쩌저저저정!

강량의 귀살검은 빠르고 변칙적이었다.

반면 황면인의 참마도는 강하고 단순했지만, 그 빠르기가 강량의 검법 못지않았다.

당연히 강량이 힘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부딪침 이후, 강량은 또다시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끼기긱!

황면인의 두 발도 살짝 밀려 나갔다.

놀랍게도 강량의 마지막 일검에 황면인 또한 나름의 충격을 받은 것이다.

강량의 경지를 생각하면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비슷한 경지에서의 한두 수 차이도 아니고, 아예 단계가 다른 영역에서 이와 같은 결과를 내는 건 누구라도 힘들다.

터어어엉!

강량은 또 한 발 나아갔다.

참마도와 부딪치며 내상을 입었는지 코에서 뜨끈한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도 눈빛은 점점 생생해졌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진기의 밀도도 더 높아졌다.

강량의 검이 어두운 흑회색 기운을 뿜었다.

쩌저정! 쩌정!

황면인 역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자신보다 하수의 공격에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 무공을 연성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자존심에 힘을 남겨 두던 황면인은 지금에 이르러 자신의 모든 마기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쩌어어엉!

강량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황면인의 참마도가 도끼질하듯 내리쳐졌다.

쩌엉! 쩡! 쾅! 콰앙!

무식한 힘이었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가 없었다. 일격을 막은 충격이 너무 커서 다리를 움직이는 건 물론 내공 운용조차 어려웠다. 그 자리에 서서 막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망할 놈!’

힘으로 짓누르겠다.

칼질의 의도가 확실했다. 찢어진 자존심을 복구하기 위해 반격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속셈이었다.

그리고 그런 황면인의 판단은 옳았다.

‘회피가 안 돼.’

콰앙!

내리찍는 힘이 갈수록 강해졌다.

한 번 막아 낼 때마다 내상이 심해졌다. 거기에 관절과 근육이 받는 부하는 더 심각했다. 벌써 온몸의 근육 곳곳이 파열되었다. 관절은 어긋난 건지 부러진 건지 부위마다 통증이 올라왔다.

귀왕진기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반으로 쪼개졌을 것이다.

부웅!

심지어 변칙적인 공격까지 들어온다. 연신 직선으로 내리찍던 참마도가 곡선을 그리더니, 일순 하단에서 상단 방향으로 솟구쳐 올라왔다.

강량의 눈이 부릅떠졌다.

쩌어어어어엉!

엄청난 공명음에 흑혈대원과 당병찬까지도 뒤로 밀려 나갔다.

울컥!

강량의 코와 입에서 또다시 피가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그 와중에도 검을 놓지 않은 게 대단했다. 아니, 이 공격에 죽지 않은 것만도 놀라운 일이었다.

‘다들 이런 건가? 하나같이 이런 괴물들밖에 없는 거야?’

무종지벽을 돌파한 고수들은 이렇게나 다른 것일까.

파앙!

거리를 좁힌 황면인이 재차 참마도를 들어 올렸다.

“이만 죽어라.”

말 한마디 없던 황면인도 지긋지긋한 듯 살기 어린 목소리를 뱉었다.

강량의 눈이 흐릿해졌다.

몸은 너덜너덜했고, 내공은 불안정했다. 그 많은 내공이 다 어디로 갔는지, 이젠 좁쌀만큼의 양밖에 남지 않았다.

‘형님.’

연호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 무턱대고 복수를 천명하던 자신에게 날 따라오라며 손을 내밀었던 그의 얼굴이.

‘어떻게든 따라왔는데, 복수도 못 해 보고 죽게 생겼습니다.’

이런 결과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칼날 위를 걷는 강호인들의 삶에서, 절치부심 살아남아 원수의 목을 따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쩌면 떠다니는 부평초처럼, 자신 역시 복수는커녕 그저 강호를 떠돌다 생각지도 못한 적의 칼날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현실이 될 줄이야.

쐐애애애액!

참마도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들 힘은 물론 고개를 들 힘조차 없었다.

‘이렇게 죽…….’

그때였다.

‘검이 부러졌어? 부러진 검으로 싸워.’

찰나의 찰나를 쪼갠 순간.

비무를 끝내고 탈진한 자신 옆에 앉아서 히죽대던 연호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말이 떠올랐다.

‘부러진 검을 놓쳤어? 그럼 주먹질을 하면 되잖아? 양팔이 부러졌어? 그럼 발로 차서라도 싸워라.’

‘……말 참 쉽게 하시네. 그럼 다리도 부러졌으면, 그땐 이빨로 물기라도 합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

‘…….’

‘그럼 칼이 날아오는 걸 훤히 보면서도 가만히 있을래? 발악은 해 봐야 할 거 아냐?’

‘아무리 발악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면요?’

‘결과가 똑같다고 체념하니까 열 합은 더 버틸 수 있었던 이번 비무가 이리 쉽게 끝나 버린 거다.’

‘……!’

‘결과가 똑같아도 물고 늘어져야지. 결국 죽더라도, 널 죽인 놈 팔뚝에 살점 한 뭉텅이는 뜯어내고 가야 할 거 아냐. 그래야 조금이라도 덜 억울하지 않겠어?’

‘…….’

‘승부에 집착하라는 말이 아니야. 네 혼에 집착해라. 죽음은 순간이다. 그 숙명과도 같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방법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독기야.’

독기, 집착, 욕망, 광기, 호승심.

연호정의 말은 한 줄기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이 되어 강량의 두 눈에 신세계의 빛을 찾아 주었다.

쩌어어어엉! 쾅!

참마도가 대지를 찍었다.

주르르륵.

강량의 왼 주먹이 피범벅이 되었다.

참마도는 강량을 베고 지나가지 않았다. 칼날이 내리치는 순간 강량의 좌권(左拳)이 칼날 면을 후려쳐 튕겨 내 버린 것이다.

우둑!

강량의 왼 팔목과 팔꿈치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경력으로 가득한 참마도를 맨손으로 치며 주먹이 부서지고 관절이 어긋난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검을 들 힘이 없으면…….’

강량이 고개를 들었다.

황면인과 눈이 마주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그의 눈은 여느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주먹질이라도 하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이놈!”

퍼억!

강량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황면인의 각법이 얼굴을 강타한 것이다.

서걱!

동시에 황면인의 가슴에 기다란 검상이 새겨졌다. 안면을 맞는 순간 검을 휘둘러 베어 버린 것이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량의 고개가 서서히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믿을 수 없는 반격에 황면인도 잠시 얼이 빠진 모양이었다. 검상은 깊지 않았지만, 심리적으로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심지어 얼굴도 멀쩡했다. 바위도 부숴 버릴 위력의 각법, 머리통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도 입 안이 터진 거 빼고는 멀쩡했다.

우우우우우웅!!

강량의 몸에서 한층 더 짙어진 흑회색 진기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으아압!”

황면인이 기합을 지르며 참마도를 휘둘렀다. 좌하단에서 우상단 방향이었다.

번쩍!

허공을 가른 참마도가 물결과도 같은 충격파를 일으켰다. 베는 것이 아니라 휘둘러 날려 버리는 일격이었다.

하지만.

퍼어억!

어느새 참마도를 피한 강량이 순식간에 그 자리로 돌아와 부러진 왼 주먹으로 황면인의 가슴을 후려쳤다.

“쿨럭!”

황면인의 가면 밖으로 핏물이 번져 나왔다.

깊진 않지만, 얕지도 않은 검상이었다. 그 상처에 발경 가득한 주먹이 꽂히니, 한순간 체내로 침투한 경력이 오장육부를 진동시켰다.

황면인의 눈이 흔들렸다.

‘후속타!’

재빨리 자세를 잡은 황면인은 연이은 공격이 없음에 의아해했다.

우두두둑!

강량의 왼팔이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치이이이이익!

활화산처럼 일어난 귀왕진기가 몸 곳곳을 돌아다니며 파열된 근육을 치료하고 부러진 뼈를 맞추기 시작했다.

우우웅! 우우우우웅!!

상처 가득한 신체에 스며든 귀왕진기가 육체를 수복했다. 수복하고 빠져나온 진기는 벼락처럼 빠른 속도의 운기로 이전보다 한층 더 깊은 내공력을 갖추게 되었다.

두 눈을 의심케 만드는 변화.

시커멓던 강량의 동공이 점점 흰자위를 침범하더니, 이내 흰자위까지 온통 검게 물들었다.

“하아…….”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른한 신음.

귀왕진기는 극소량만 남았던 게 아니었다. 어느새 근육, 관절, 뼈, 혈관, 신경 곳곳으로 침투하여 새로운 육체,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하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모든 깨달음을 안고 인간의 한계를 돌파한 검사의 진기가, 그 주인의 목숨을 지저 깊은 곳에서 태양 빛 가득한 창공으로 끌어 올렸다.

황면인이 발작적으로 참마도를 휘둘렀다.

번쩍!

공명음이나 파공성 따위는 없었다.

지극히 예리한 섬광이 두터운 참마도의 칼날을 사선으로 잘라 내 버린 것이다.

치이이이이익!

평범해 보이던 철검의 검신이 먹물과도 같은 빛으로 물들었다. 먹빛으로 물든 검신에서 허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래, 이거였다.”

핏자국 가득한 강량의 얼굴에 환희의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게 너희가 보는 세상이었어!”

“으아아아!”

다시 한번 잘린 참마도로 공격해 오는 황면인.

강량의 몸이 훅!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을 지나쳤다.

촤아아아악!

대량의 선혈과 함께 황면인의 몸이 사선으로 잘려 나갔다.

먹빛 검신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강량이 버럭 외쳤다.

“너흰 절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폭발적인 신법과 함께 나아간 강량이 또 다른 황면인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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