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21화 (620/963)

621화. 끝이 없음이라 (3)

푸스스스!

폭우에 꺼진 산불에서 이는 그것처럼.

연호정의 몸에서 피어나는 연무량은 대단했다.

어찌나 짙은지 마치 산자락을 덮은 구름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내 은은한 사색(四色)으로 물든 농밀한 운무가 그의 전신을 떠나 하늘 높이 치솟았다. 신비롭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쿵!

한 발을 내딛는데 당가 내원 전체가 뒤흔들린다.

사람이 아니라 태산처럼 큰 거인이 움직인 것 같았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에서도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도무지 사람의 형상이라 보기가 어려웠다.

신비롭고도 기괴한 광경.

생명체가 아닌 대자연의 분노 그 자체가 형상화된 것 같았다.

‘완전하지 않아.’

육사제장은 직감했다.

대체 어떤 깨달음이 있어 저 무한의 경지를 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연호정은 오르는 도중이지 올라선 것이 아니다.

무극(無極)이란 곧 태초의 혼돈이라, 그에 진입한 자들의 과정도 전부 다르다.

과거 자신처럼 단번에 올라선 자들도 있었고 지금 연호정처럼 오르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자들도 있었다.

‘노리려면 지금!’

마기의 급격한 소모로 수명이 무섭게 줄어들고 있었다.

목숨은 전혀 아깝지 않다. 지금 연호정을 잡지 못하면 위대한 교단은 또 한 명의 난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쾅!

연호정의 코앞까지 이동하고 나서야 대지를 박찬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속도, 음속(音速)을 돌파했다. 신체가 받는 부담조차도 마기로 막았다. 일순간 시야가 흐려지고 강한 현기증이 일었다. 고갈이 목전이었다.

그럼에도 육사제장의 우수도(右手刀)는 정확하게 연호정의 목을 노렸다. 일 갑자의 세월을 육신 없이 지냈지만, 혼에 새겨진 전투 능력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쩌어어어엉!

극단적인 마기 소모를 감수하고 노린 일격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육사제장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주르르륵.

철마신으로 단단해진 오른쪽 손날에 피가 배어 나왔다.

연호정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야.’

어떻게 이 공격을 막았지?

분명 도끼는 움직이지 않았다. 진기가 알아서 방어막을 둘러치지도 않았다. 아니, 공기가 출렁이는 느낌 자체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철마신이 뚫리다니? 음속 이상의 움직임으로 터져 나온 충격파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훅!

육사제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불가해한 현상 앞에 망설이는 것은 하수들의 전유물이다. 그는 경험 많은 마인이었고, 그 이전에 무사였다.

육사제장의 양손 수도가 벼락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쩌저저저정!

신마구살도의 파괴력 넘치는 참격들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기며 스러졌다.

콰드득! 콰드드득!

허공에서 퍼져 나가는 충격파가 신음 흘리는 대지를 마구 부수고 짓눌렀다.

육사제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미 반쯤 썩은 얼굴이 일그러지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지옥의 악귀를 보는 듯했다.

“이놈!”

보였다. 연호정의 움직임이.

신마구살도의 초식이 움직이는 역방향에서 한발 먼저 휘둘러진 두 도끼의 광채를, 그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걸 막았단 말이지!”

쿠르르릉!

육사제장의 오른손에 검붉은 기운이 모이더니, 이내 거대한 칼날을 형성했다.

스르륵.

휘날리는 나뭇잎이 마기의 영향으로 말라비틀어졌다.

치이익!

오른손에 집약된 마기와 반대로 그의 왼손은 조금씩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신체를 유지하는 마기의 농도가 한쪽으로 쏠리자 나머지 부분의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쿠르릉! 쿠르르르릉!

사방 천지로 뻗어 나가는 마기의 여파에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이것도 막을 수 있을까!”

방금까지도 진심이었지만, 이번 공격은 또 달랐다.

대부분이 유실된 혈교의 무학 중 현재까지 이어지는 몇 안 되는 혈교 고유의 공부가 바로 신마구살도였다.

제 위력을 낼 상태가 아니라고 하나, 최고 절초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흑야마영참(黑夜魔影斬).

원한다면 시전자의 생명력까지 몽땅 퍼부어 내리칠 수 있는, 마공 특유의 한계가 없는 죽음의 무공이었다.

“죽어라!”

육사제장이 거대한 흑색 마도(魔刀)를 휘둘렀다.

번쩍!

빛을 머금을 수 없는 흑색의 마도가 빛을 끌어와 완전해졌다.

공기를 불태우며 쏟아져 내리는 참격에 하늘도 신음한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절대의 일격, 제대로 들어간다면 성천의 강자도 생존을 걱정해야 할 만큼의 공격력이었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육사제장이 뒤로 튕겨 나갔다.

콰콰쾅!

조금 전, 연호정이 땅을 갈며 밀려 나간 것처럼.

육사제장도 마찬가지였다. 흑야마영참과 정체 모를 참격이 부딪치며 발생한 고농도의 충격파가 그의 몸을 날려 버린 것이다.

푸스스스스!

육사제장의 왼팔이 연기를 내며 쪼그라들었다.

“쿨럭!”

코와 입에서 시커먼 핏물이 터져 나왔다. 영육이 불일치하여 정상적인 몸의 반응이 떨어진 채였지만, 이 정도 충격파 앞에서는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몇 번 고개를 흔든 육사제장이 몸을 일으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

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쿵!

복숭아뼈까지 파묻힌 발을 들어 올려 다시 한번 대지를 딛는데, 그 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화아아아악!

구부러진 허리를 펴고 천천히 고개를 든다.

푸스스스스!

몸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대신 그의 코와 입에서 검붉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육사제장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초회복?!’

신체 내부에 입은 상처, 내상이 무서운 속도로 치료되고 있었다.

그간의 피해를 정신력으로 극복해 내고 있었을 뿐, 실제 연호정이 받은 피해는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모든 피해가 무한의 경지에 들어서자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회복된다. 그 어떤 신공의 치상결보다도, 어떤 마공의 초회복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어떻게!!’

훅!

흘러나온 연기가 어느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번쩍!

두 눈을 치켜뜨니, 실로 마주보기 어려운 신광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태양을 담은 듯 빛나던 두 눈은 어느새 맑고 깊은 본연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

육사제장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쿵! 쿵!

흑룡부와 백룡부가 땅에 떨어졌다.

연호정이 양손을 쥐고 펴길 반복했다.

우두둑. 우두둑.

마치 어긋난 뼈가 재정립되고 있는 듯했다.

“……음.”

요란하지 않다.

하나의 경지에, 그것도 무림인이라면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지고한 경지에 올라선 무인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반응이었다.

몇 번 주먹을 쥐어 보고, 발끝으로 땅을 툭툭 쳐 보기도 했다. 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기도 하고 허리를 굽혔다 펴 보기도 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생사결 중에 보일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화르르륵!

육사제장의 몸에서 불처럼 강렬한 살기가 일었다.

치이익!

왼팔은 이제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절반이 썩은 얼굴은 그대로지만, 의복 안에 가려진 피부도 조금씩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사제장은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배짱 좋은 건 잘 알겠다.”

울컥! 울컥!

몸은 무너져 가지만 발산하는 기세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타오르는 살기가 그의 마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처음보다 극단적으로 줄어든 수명. 역시나 상관하지 않는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죽음이 아쉽지 않았다.

“그러나.”

쿵!

보란 듯이 한 발 내딛는데, 연호정의 진각과 비슷한 정도의 충격이 올라왔다.

“이제 그 경지에 갓 오른 자식이, 생사의 대적을 눈앞에 두고 여유를 부리다니.”

분노였다.

육사제장은 광기에 젖은 지금 세대의 광혈교도들과는 다른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고대 혈교의 힘을 손에 넣으려는 작금의 광혈과 달리 무사로서 나름의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저리 여유를 부린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그가 버럭 소리쳤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놈! 지금 네놈의 경지가 얼마나 알량한 것인지, 내 저승으로 가기 전에 톡톡히 알려 줄 것이다!”

그때였다.

콰콰콰콰쾅!!

육사제장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흐음.”

대지를 갈아 버린 힘의 결정체.

그의 발밑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역시, 아직은 이 정도인가.”

연호정이 손에 힘을 풀었다.

툭.

땅에 떨어진 것은 바로 쪼그라든 육사제장의 왼팔이었다.

피도 거의 나지 않았다. 이미 죽어 버린 육신, 끈적하고 검붉은 피 몇 방울이 꽤 독한 냄새를 풍겼다.

육사제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연호정은 그를 지나쳐 커다란 나무 앞에 서 있었다.

“……어떻게?!”

폭발적인 속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여 자신의 팔을 뜯어냈다.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왼팔이 아니라 심장이 뜯겨 나갔을 것이다. 애초에 연호정이 노린 것은 자신의 심장이었던 것이다.

“영육이 어긋났는데도 그 정도 반응 속도라면, 생전에는 정말 대단했겠어.”

등을 돌린 채, 또다시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연호정의 뒷모습에서 기묘한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그만한 속도를 냈음에도 충격파가 일지 않았다. 터져 나가는 공기를 순간적인 압력으로 제압한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순간 육사제장은 두 눈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화아아아아악!

이전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지도, 있는 대로 진기를 발산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극한의 마기를 발산하는 자신보다도 훨씬 더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퍼석! 퍼석!

육사제장이 딛고 선 땅이 허옇게 변하며 힘을 잃었다.

스르르르륵.

연호정의 등 뒤에 뿌리를 내린 거목이 미세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쪼그라들고 있었다.

육사제장이 눈을 부릅떴다.

‘이럴 수가?!’

마기는 곧 역천의 기운이라, 기의 밀도가 높아지면 생명력 충만한 대지의 생기에 악영향을 준다. 휘날리는 나뭇잎이 마기에 닿은 것만으로도 바스러진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연호정의 기는 그것마저도 넘어섰다.

‘살기로!!’

마기의 밀도를 넘어서는 살기.

평온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농도의 살기를 뿜고 있다. 그 살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육사제장의 마기보다도 더 살벌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처음이 아니야.”

우우우우우우웅!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멀게 들리는 목소리.

마치 동굴 안에서 말하는 듯 울림 가득한 목소리에 육사제장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이 아니다. 다만, 오랜만일 뿐이다.”

“……?!”

“네놈이 이 경지에 올라 얼마나 대단한 노력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불완전한 육신이라도 고작 이 정도 힘에 그쳤다면, 생전의 경지를 알 만하군.”

콰르르르르릉!

천둥이 울려 퍼졌다.

번쩍!

내리치는 벼락이 순간적으로 연호정의 얼굴을 형용키 힘든 악신(惡神)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자.”

연호정이 오른 주먹을 들어 올렸다.

두근두근!!

육사제장이 깃든 몸, 오래전에 죽어 버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진짜 무극이 무엇인지, 그 썩어 빠진 육신으로 직접 확인해 보도록.”

연호정의 주먹이 움직였다.

번쩍!

순간 육사제장은 어둠 가득한 세상이 새하얀 빛으로 물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의 의식은 사라졌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