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화. 천하를 논하다 (2)
황면인의 몸뚱이가 산산조각이 나고 연호정이 번개처럼 사라진 그곳에서.
“…….”
흩어진 시체 조각을 둘러보던 모용군이 이내 적면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은 적면인들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자신들을 이끌 상관이 없어서인지, 연호정의 압도적인 기파에 짓눌려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담담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모용군의 눈에 일순 살기가 일었다.
번쩍! 촤아아악!
만전의 태세를 갖추어도 모용군의 일검을 막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작정하고 기습한 모용군의 칼질 세 번에 대다수 적면인의 몸이 찢겨 날아갔다.
퍼어억!
남은 적면인은 황석태의 몫이었다. 바람처럼 달려와 내지른 창격에 적면인들은 전멸했다.
푸슉!
마지막 적면인의 목을 뚫은 창을 빼낸 황석태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잔인하군.’
모용군이 죽인 적면인들의 시체는 마치 짐승에게 찢긴 듯 참혹했다.
그의 무공과 뇌기라면 굳이 이런 상태를 만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죽이기 위해서가 아닌, 분풀이에 가까운 살인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죽음이라는 것에 차이는 없다지만.’
모용군이 말했다.
“마인들을 척결했으니 다시 안으로 들어가지.”
“그럽시다.”
강량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더는 이런 놈들이 없는 거요?”
모용군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르지. 적어도 지금 내 기감에 걸리는 놈들은 없네.”
강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석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인은 없지만, 또 누가 오긴 오는군.”
“당가의 정예 부대인 것 같네.”
부대의 정체는 흑풍대와 녹의대였다. 당형에게 이 싸움에 참전하라 명을 받았지만, 이동 속도의 차이가 극심해서 이제야 도착하게 된 것이다.
“힘든 싸움 다 지나가니까 오다니, 참 느리구먼.”
담담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날이 선 목소리였다.
황석태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싸워야 할 수도 있소.”
당가의 정예 부대는 당호의 명을 듣고 있었다. 그간의 과정을 모르는 황석태는 당연히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모용군도 동의했다.
“살기가 느껴지지 않지만, 대비는 하는 게 좋겠네.”
“그나저나.”
강량이 끼어들었다.
“패율 선배는 어디로……?”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네. 따로 보낼 곳이 있었다더군.”
“음.”
황석태가 말했다.
“당가 내부의 일 때문에 보낸 건 아닐 것이오.”
강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생각이오. 이런 중요한 순간에 강한 전력을 일부러 빼냈다면 내부가 아닌 외부의 일일 수밖에.”
“그렇지.”
모용군이 의외라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감이 좋은 건가.’
황석태야 묵룡부 최강의 부대를 통솔하는 입장이니 이 정도 안목이 있다는 게 크게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량은 경험이 많지 않은 고수였다. 무종지벽을 넘은 건 대단한 일이지만, 실제로 부대를 통솔하거나 순간의 판단이 작전의 성패를 담당하는 전투에서의 경험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저런 안목이라?
‘아는 것이다.’
모용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연호정을 잘 아는 거야. 전투 경험과 관계없이, 연호정이라는 인물의 특장점을 잘 알기 때문에 자연스레 거기까지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자신보다 이 둘이 연호정에 대해 더 잘 알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기분이 묘했다.
적을 잘 아는 사람은 적의 가족도, 친구도 아니다. 적의 적이다.
서로를 사냥감으로 생각하는 사냥꾼이 상대를 더 잘 파악하려 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실제로 모용군은 그러려고 노력했고, 연호정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둘을 보니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호정.’
모용군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좌중을 압도하면서도, 자신에게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은 채 황면인에게 다가갔던 녀석의 모습.
울컥!
자존심이 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한다.
모용군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했다.
인지는 했지만, 인정이 안 된다.
연호정이 자신보다 재능이 있는, 소위 말하는 천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녀석 때문에 화는 나도, 자존심이 상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왜냐?!’
모용군은 속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도대체 그놈에게 어떤 숙명을 내렸기에, 이리도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안겨 주는 것이냐!’
저 하늘에 신이 있다면 정말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했다.
비단 연호정 때문에 이리 화가 나고 질투가 나는 건 아니었다.
연호정과 함께하는 이들 또한 이상할 정도로 발전이 빠르다. 보는 눈도 달라지고, 속세의 난장 속에 발을 들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탈속한 느낌을 준다.
그 사실이 모용군의 감정을 자꾸만 자극하는 것이다.
별것 아니었던 놈들이 연호정과 함께 하면 달라진다? 그 말은 둘 중 하나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어 연호정에게 천운을 몰아주었거나 아니면…… 연호정에게 사람의 근본을 뒤바꾸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거나.
전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후자라는 것인데.
‘타고난 패자라는 것이냐.’
모용군의 눈이 점점 충혈되었다.
‘경험으로도, 노력으로도 뒤엎을 수 없는 패자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것이냐?!’
전에 연호정이 말했다. 자신은 재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고. 그저 운이 좋아서 남들보다 한 발자국 먼저 나아갈 수 있었던 거라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그 경지에서 멈추었다면 모르되, 무극을 개방한 이상 연호정의 말은 설득력 없는 기만에 불과하다.
‘……빌어먹을.’
주르륵.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나답지 않군.’
연호정이 천재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천재면서 누구보다도 노력했기에 그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도.
굳이 놈의 자질을 두고, 놈의 말을 떠올리면서 화를 낼 이유가 없다.
결국 모용군이 화가 나는 것은 무력 그 자체였다.
유일하게 연호정보다 한발 앞서 있다고 자부하던 영역에서 추월을 당해 버렸다.
그 상실감, 그 황당함이 너무 컸다.
‘포기하지 않는다.’
핏발 가득한 모용군의 눈에 집착과 광기가 어렸다.
‘네가 제아무리 대단한 위치에서 내 앞길을 막는다 한들, 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야. 네가 아니라 성천 모두가 덤벼들어도 내가 원하는 것을 끝끝내 쟁취할 것이니라.’
훅!
분노와 허탈함으로 수그러들었던 뇌기가 일순간 타오르는 광기로 다시 힘을 받았다.
파지지직!
갑작스레 몸 전체를 누비는 뇌기.
자신을 보는 두 사람을 인지한 모용군이 가주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세.”
* * *
폭음과 함께 날아간 당호가 몇 번이나 땅을 구르다가 멈추었다.
연호정이 당여선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당여선은 이미 죽었다.
출혈 때문이 아니었다. 그 잠깐 사이 거의 모든 생기가 빠져나갔지만, 그것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니었다.
‘마기 침투.’
경동맥으로 침투한 마기가 단숨에 상단전을 파괴해서 육체의 기능을 정지시켜 버렸다. 그래서 죽은 것이다.
연호정이 당호를 바라보았다.
스르르륵.
당호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우우우우우웅!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그의 몸에서 검붉은 마기가 일렁거렸다.
역천의 기운임에도 생생한 활력이 느껴졌다. 몸 여기저기가 망가졌지만, 그 역동적인 마기가 무섭게 집중되며 초회복을 노리고 있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흡공(死吸功).”
사흡공.
양천의 대제자였던 엽성이 익힌, 당관의 아들 당양선이 익힌 흡성대법의 일종이다.
이 사태의 주범이니, 당연히 당호도 익히고는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저놈은 당호가 아니었다. 황면인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사흡공도 삼교 쪽에서 흘러나온 무공이라는 것.’
그 또한 알고는 있었다. 다만 정말 그런 것인지, 십 할의 확신은 없었다.
지금에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사흡공이 어디에서 흘러들어 왔는지.
‘전혀 달라.’
후우우우우웅!
망가졌던 다리가, 부러졌던 척추가, 끊어졌던 심맥이 엄청난 속도로 복구되었다.
부러진 광대뼈는 물론 쑥 빠져 달랑거리고 있던 눈알까지도 들어갔다.
그야말로 인간의 능력이 아니었다. 사흡공이 제아무리 대단하고 마기의 초회복이 뛰어난 치상결이라 한들, 저런 회복력은 이치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결국 답은 하나.
‘사흡공의 원본은 중원에 알려진 사흡공보다 훨씬 사이하고 독하다.’
쿵!
한 걸음 앞으로 나선 당호가 고개를 들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순간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뭐야? 그놈이 아니잖아?’
벌겋게 달아오른 눈빛은 육신을 버리고 채혼술을 시도한 칠사제부 부장이란 놈의 것이 아니었다.
“당호!!”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외침이었다.
연호정이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관은 연호정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살기로 불타오르는 그의 눈은, 오로지 당호만을 담고 있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저놈은 위험합니다. 제가…….”
“아버지를 부탁한다.”
“……?!”
“어서.”
광기에 가까운 분노를 내보이면서도, 당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가만히 그를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풀고 오십시오.”
훅!
연호정이 쓰러진 당형에게 다가갔다.
당관은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당호를 향한 분노가 한계를 넘어섰지만, 그는 연호정을 믿었다. 자신은 어찌할 수 없지만, 연호정이라면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도록 나름의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거면 되었다. 지금은.
당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끝까지.”
화아아아악!
체내 조직에 있는 한 방울의 내공까지 모조리 발산되는 것 같았다.
당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제왕독기가 회흑색 운무를 일으키며 하늘 높이 치솟았다. 회오리치며 올라가는 운무를 따라 그의 머리카락도, 의복도 미친 듯이 펄럭거렸다.
“끝까지 그 난리를 치는 것이냐!!”
성난 사자의 포효와도 같았다.
압도적인 감정이 묻어나는 외침에 당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호가 외쳤다.
“닥쳐! 내가 당가의 주인이다! 네까짓 게 뭔데 주인한테 대드는 것이야!”
마성(魔性)으로 갈라지는 목소리는 이미 당호의 것이 아니었다.
칠사제부장이 육신을 빼앗으려 했으나, 그것이 실패한 것이다. 도리어 칠사제부장의 혼이 흩어져 버리고, 죽어서도 잊지 못한 당호의 욕망이 칠사제부장을 쫓아내고 제 몸을 되찾은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집착, 그리고 욕망.
마공의 폭발적인 성장에 더없이 어울리는 진짜 마인(魔人)의 현현이었다.
“이곳은 나의 영역이다! 내가 왕이야! 내가 사천의 주인이다!!”
퍼어엉!
이전과는 판이한 속도로 접근한 당호가 당관의 목을 노렸다.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당호가 튕겨 나갔다.
광기에 젖은 와중에도 당호는 당황했다. 이전보다 더 강한 힘을 얻었는데도 이리 튕겨 나오다니?
치리리리리리리링!!
쇳조각들이 부딪치며 퍼져 나가는 소리는 듣는 이를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당호가 당관을 바라보았다.
치리리링! 치리리리링!
회흑색 기파를 뿜어내는 당관 주변에는 어느새 수천 개의 쇳조각과 비수, 암기들이 부딪치며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당관이 부르짖었다.
“살점 하나, 영혼 한 점 남기지 않고 그대로 멸해 주겠다!”
번쩍!
수천 개의 쇳조각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별빛의 바다를 만들었다.
만천(滿天)을 물들이는 살의의 섬광.
사천 당씨 문중이 보유한 최강, 최악의 비기가 그 진정한 모습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