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54화 (653/963)

654화. 존귀한 깨달음 (4)

잘 말린 찻잎을 구한 지소현(池素炫)은 마을을 둘러보았다.

‘좋구나.’

추운 날씨, 많은 사람이 털옷을 껴입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거리에 나와 객잔을 홍보하는 이들, 오늘 새벽에 잡은 고기를 파는 이들, 좋은 비단을 휘두르며 오가는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는 이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광경이었다.

‘내가 이런 심정으로 저들을 볼 줄이야.’

지소현은 고아였다. 부모가 누군지도 몰랐고 당연히 집도 없어 거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이처럼 평화로운 일상에 감동을 느낄 줄 몰랐다. 어린 시절 그녀에게 이들은 하루를 살아가는 양민들이 아닌 차갑고 독한 권력자들이었다.

조금씩 나이가 들고 성숙해질 즈음, 그녀는 어느 기루의 주인에게 몰래 납치당했다.

납치당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구걸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 감사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것은 폭력이나 부자유가 아닌 허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녀로서의 가르침을 받고 정식으로 생활하기 직전.

한 명의 무서운 고수가 기루의 주인을 응징했고 휘하 기녀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그 사람이 바로 지소현의 스승, 하은교였다.

다른 기녀들은 모두 나이도 있고 가족도 있었지만, 지소현은 어린 데다가 가족도 없었다.

결국 하은교는 그녀를 데리고 예인으로 키웠다. 나아가 무공의 재능이 있음을 알고는 무공도 가르쳤다.

음과 무공을 배우고, 나아가 세상의 법도를 배운 지소현은 하은교를 만난 것이 얼마나 대단한 천운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렇게 하은교는 지소현에게 하늘이 되었다.

‘이만 들어갈까.’

한참 그들을 바라보던 지소현은 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거처에서 마을까지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그러나 무공을 배운 그녀에게 있어 이 정도 거리는 이각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마을을 벗어나 산으로 통하는 샛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

지소현의 얼굴이 냉랭해졌다.

반 각 전부터 몇몇 시선을 느끼던 그녀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하은교의 제자가 되고 무공까지 배운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으로 성장했다. 간간이 스치는 시선 같은 건 별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시선 또한 그렇게 치부했는데, 마을에서 제법 멀어진 지금까지도 떨어지지 않았다.

악의가 느껴졌다.

“나오세요.”

스르륵.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풀 여기저기서 몇 명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소현의 눈이 빛났다.

‘산적?’

짐승 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입고, 등이나 허리에는 제법 흉해 보이는 무기를 줄줄이 달고 있었다.

씻지 않아 때가 묻은 얼굴에 수염과 머리카락이 덥수룩하다. 그러면서도 다들 몸집은 근육질이었다. 흉흉한 외양, 누가 봐도 산적이었다.

“정보가 맞았군.”

먼저 입을 연 산적은 이중 가장 왜소한 체격을 지닌 사내였다.

왜소하다고는 하지만 지소현보다는 훨씬 우람한 체격이었다. 손에는 날이 빠진 도끼를 들고 있는데, 그래서 더더욱 흉악해 보였다.

“반반한 년 하나가 집도 절도 없이 마을을 오간다고 하더니만, 듣던 것보다 더 곱잖아?”

목소리에 흉흉한 욕망이 묻어났다.

지소현이 물었다.

“산적이냐?”

사내들이 껄껄 웃었다.

“산적이지. 암, 산적이고말고.”

“두목, 얼른 데려갑시다. 날도 추운데.”

“으으, 못 참겠소.”

꽤나 추잡한 대화들이 오간다.

진심이야 어쨌든, 그러한 대화가 상대를 경동시키는 데에 탁월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건 분명했다.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겠어.’

스승께서 항상 말씀하셨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고.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해서 손을 쓸 때도 항상 신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게 필요치 않아 보였다. 눈빛과 말투, 흉흉한 기세를 보면 굳이 사정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산적 두목이 턱으로 지소현을 가리켰다.

“뒤통수 한 대 갈겨라. 후딱 기절시켜.”

팍!

지소현의 등 뒤에 있던 산적이 재빨리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어느새 산적의 손에는 가죽 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산적이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쐐애애액! 퍼억!

“응?”

산적의 눈이 커졌다. 뒤통수를 가격해야 할 방망이가 지소현의 손에 잡힌 것이다.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기절이 아니라 죽일 기세 같은데?”

“……!”

“너희, 정말 산적 맞아?”

두목의 눈이 차가워졌다.

“덮쳐라!”

파아아악!

남은 여섯 명의 산적들이 지소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빠르고 날카로웠다. 단순한 산적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수준 높은 무공을 배운 것 같았다.

차앙!

가죽 방망이를 놓은 산적이 허리춤에서 소검을 뽑아 휘둘렀다.

번쩍!

소검이 허공을 갈랐다. 달려드는 산적들이 놀라서 돌진을 멈추었다.

“느려.”

소검을 든 산적의 눈이 커졌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 그곳은 바로 자신의 뒤였다.

터어어엉!

북 치는 소리와 함께 산적이 피를 토하고 쓰러져 버렸다.

살과 근육을 치는 게 아니라 내부를 뒤흔드는 장법(掌法)이었다. 침투경의 묘리가 살아 있는 고급의 무리, 방년의 나이로는 구현하기 힘든 무공이었다.

파아아악!

산적들이 제각기 무기를 집어던졌다.

지소현의 눈이 번뜩였다.

날아오는 무기들. 도끼와 단검들이었다. 한데 그 속도가 상당했으며 궤적이 무척이나 절묘했다.

내공 좀 익혔다고 이런 식의 투척이 가능할 수는 없다. 오랜 시간 연마한 비검술(飛劍術)의 일종이었다.

파바바박!

원을 그리는 지소현의 발걸음이 눈부셨다.

그리 빠르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몸놀림이었다. 그 움직임에 허공을 가르는 병장기들이 모조리 빗나가 버렸다.

타악!

심지어 그중 하나의 단검을 낚아챘다.

몸의 회전을 걸어 휘두르는 지소현. 단검이 빛살이 되어 산적 하나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악!”

어깨 근육이 아닌 뼈와 뼈 사이를 찌르고 들어가 연골을 찢고 관절을 파괴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이 뒤로 남은 다섯 명의 산적들이 제각기 도검을 뽑아 들며 지소현에게 덤벼들었다.

지소현의 오른발이 앞으로 나갔다.

훅!

한 발 움직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산적들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기겁한 산적들이 도검을 휘둘렀지만, 지소현의 두 손은 이미 그들의 육신을 한 번씩 후려치고 있었다.

터터터터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덤벼든 산적 모두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쉬며 허리를 펴는 지소현의 차분한 모습은 실로 압권이었다.

산적 두목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과연,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하구나.”

지소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시끄럽다!”

피이이이이잉!

순간 지소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두목의 좌수에서부터 쏘아진 한 줄기 빛살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빠르다!’

피슉!

서둘러 고개를 옆으로 틀었지만, 볼에 작은 상처 하나가 생겼다.

화살처럼 쏘아진 정도가 아니라 실제 화살의 모양을 한 암기, 수전(手箭)이었다.

파아앙!

단숨에 거리를 좁힌 두목이 도끼를 휘둘렀다.

장작을 패는 움직임 그대로였지만, 지소현은 위기를 느꼈다. 접근 속도, 휘두르는 속도 둘 다 예상을 한참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휘익! 쩌어엉!

재빨리 몸을 비틀어 내리치는 도끼날의 널찍한 면을 후려쳤다.

비틀거리는 두목, 그러나 언제 자세를 제어했는지 이번에는 도끼를 횡으로 휘둘렀다.

반월을 그리는 공격은 단순하지만 빠르고 흉흉했다. 복잡한 초식 없이도 신체를 제어하는 능력이 수준급이라 일격, 일격이 부담스러운 살초였다.

번쩍!

철판교의 수법으로 피했지만, 또 어느새 몸을 제어한 두목이 그대로 도끼를 내리쳤다.

병장기의 수급이 자유자재다. 거병(巨兵)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그래도 여느 도검보다 무거운 도끼인데도 무척이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다룬다.

절체절명의 순간.

퍼엉!

땅으로 장력을 쏘아 내 상반신을 세운 지소현이 내리치는 도끼를 휘감으며 두목의 가슴팍에 무릎을 올려 쳤다.

퍽!

“컥!”

신음과 함께 밀려 나간 두목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소현이 물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왜 나를 공격하지?”

“닥쳐라!”

파아앙!

실력의 우위는 명백했다. 두목의 무공은 강했지만, 지소현은 그보다 더 강했다. 지소현에게 실전 경험이 많았다면 승부는 진즉에 끝났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두목은 포기를 몰랐다. 이전보다 느려진 속도였지만, 충분히 빠른 움직임으로 접근한 후 주먹을 휘둘렀다. 지소현에게 도끼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왜지?’

두목의 주먹을 피한 지소현이 그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퍼억!

두목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지소현의 공격은 날카로웠지만, 끝장을 낼 정도로 위력적이진 않았던 것이다.

“으아아!”

비명에 가까운 기합과 함께 두목의 수도(手刀)가 지소현의 목을 노렸다.

지소현의 양손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두목의 팔을 휘감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의 몸이 두목의 등 뒤로 이동했다.

우두둑!

체중 이동으로 팔을 부러트렸다. 두목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망할 년이……!”

퍼어어억!

목덜미를 가격당한 두목이 그대로 쓰러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죽진 않았지만, 족히 반나절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후우.”

숨을 몰아쉰 지소현은 문득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어깨에 단검이 박힌 산적이 땅에 떨어진 칼 한 자루를 쥐고 씩씩대고 있었다.

벌건 살기가 그득한 두 눈. 지소현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누구인지를 밝혀라. 그럼 죽이진 않겠다.”

“개소리! 사람 죽인 적도 없는 년이 어디서 협박이야!”

지소현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자신에게 살인의 경험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주눅 들지 않았다.

“그 운명의 날이 오늘이 될 수도 있지.”

“시끄럽다!”

산적의 몸에서 살기가 폭발했다.

즉각 덤빌 기세에, 지소현은 다시 전의를 끌어 올렸다.

그때였다.

퍽!

기묘한 타격음과 함께 산적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

산적도 의아했는지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왜 무릎을 꿇고 있는지 본인도 모르는 듯했다.

터엉!

북 치는 소리와 함께 산적이 그대로 쓰러졌다. 이번에도 어딜 어떻게 당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얼떨떨한 눈으로 쓰러진 산적을 내려다보던 지소현은 일순 고개를 틀었다.

저벅저벅.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발걸음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지소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군.”

입맛을 다시며 걸어오는 청년은 거대한 창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그 무게가 엄청난 중병이었다. 그런 중병을 들고 있음에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다.

흘러나오는 기파를 느낄 수 없지만 고수임이 분명했다.

청년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말 좀 묻겠소.”

“…….”

“혹시 당신이 음…….”

파아아악!

선수필승이다.

지금 이 자리에, 하필 산적 두목이 다루던 도끼를 똑같이 든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패임이 분명했다.

한마디 말도 없이 달려든 지소현이 단숨에 청년의 옆구리를 향해 장력을 휘둘렀다.

퍼억!

‘됐다!’

뻗어 나간 손, 손에서 발출된 무형의 장력이 청년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그녀의 얼굴에 승리의 빛이 어리는 순간.

빠각!

머리 한구석에서 살벌한 소리가 들리는 걸 마지막으로, 지소현은 기절해 버렸다.

청년, 연호정이 얼굴을 찌푸리며 옆구리를 털었다.

“뭐야, 이 망할 자식. 대화도 없이 공격부터 해? 어휴, 이걸 그냥 확.”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