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5화. 거짓된 살의 (7)
두두두두.
거대한 말이 순식간에 능선을 타 넘더니 어느새 협곡이 보이는 야산에 도달했다.
“후우.”
황석태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푸르륵!
몇 번 발을 구른 말이 세차게 투레질했다.
그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럼에도 말의 체력은 건재했다. 당가에서 얼마나 신경을 써 줬는지 알 수 있었다.
황석태가 뒤를 바라보았다.
번쩍!
저 멀리서 한 줄기 시린 검광이 피어오르다가 사라졌다.
‘역시 빠르군.’
이곳으로 오면서 나무를 부러트리거나 바위를 날려 길을 막는 등, 거의 곡예에 가까운 기마술과 무공으로 종남파의 추격자들을 막았다.
아무리 고수라도 지형 자체를 무시하고 거리를 좁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거기에 황석태 특유의 기마술과 천하에 다시 없을 명마 덕에 거리를 이 정도로 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이 속도면 이각 내…… 어쩌면 일각 안에 여기에 도달할 수 있다.’
황석태가 말의 갈기를 쓸었다.
“조금만 더 힘내자.”
히히힝!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듯 말이 가볍게 울음을 토했다.
황석태가 고삐를 휘둘렀다.
“이랴!”
두두두두!
재차 힘차게 달리는 말.
순식간에 산 아래를 타고 내려가더니, 이내 협곡 입구에 도달했다.
“왔수?”
강량이 그를 맞았다.
황석태가 눈을 빛냈다.
“패율 장로는?”
“선배는…….”
강량은 그답지 않게 말을 끌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저기.”
강량이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길게 이어진 협곡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숲이었다.
“저쪽 부근에서 초고수들 간의 격전이 일었소.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중 한 명이 형님인 건 확실하오.”
황석태의 눈이 흔들렸다.
“결과는?”
“모르오. 이곳에서는 무엇도 알 수 없소. 그저 싸움이 터졌고, 끝났다는 것만 알 뿐이오.”
“하면 가지 않고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형님이 이곳에서 대기하라고 명을 내렸소. 아니…….”
강량이 이를 악물었다.
“만에 하나 싸움이 벌어지면 퇴각하라고 하셨소.”
“…….”
“설마 그럴 일이 있겠나 싶었는데, 정말 싸우더군. 공기의 흐름에 묻어나는 기운으로 볼 때 사이한 무공을 쓰는 자인 것 같은데…… 확신이 서지 않소.”
“그 말은 상대가 음제일 수도 있다는 뜻인가?”
“그렇소.”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패율 선배가 직접 가 보겠다고 했소. 나도 걱정되긴 했지만, 형님 말마따나 일단 물러나자고 했는데…….”
“그 양반은 그럴 생각이 없었군.”
강량이 한숨을 쉬었다.
황석태는 강량을 이해했다. 그리고 패율도 이해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황석태 자신이었다면 아무런 미련 없이 퇴각했을 것이다.
아군 걱정이 안 돼서 그런 게 아니다. 걱정은 걱정이고 작전은 작전이다. 그러자고 입을 맞췄으면, 그렇게 움직여야만 했다.
“우리도 가 보세.”
“……가 보자고?”
“자네도 가고 싶다면서.”
“그건 그렇지만.”
“이미 패율 장로가 먼저 움직인 이상, 우리의 퇴각은 의미가 없어.”
“…….”
“게다가 섬멸전도 아니고, 우리의 목숨을 걱정해서 퇴각하란 말을 했으니 잃을 건 목숨밖에 없지.”
명쾌하고도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벙찐 강량은 이내 씩 웃었다.
“목숨 걸지 않겠다면서?”
“차라리 저쪽으로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런 거야.”
“그건 또 뭔 말이오?”
“종남이 따라붙고 있다. 꽤 화가 난 것 같아.”
“엥? 종남이?”
우우웅.
강량이 귀왕진기를 끌어 올렸다.
“컥!”
정말이었다. 예민한 기감에, 저 후방 멀리서 달려오는 날카로운 기운들이 바로 포착되었다.
연호정과 패율을 걱정하느라 멀리서 누가 다가오고 있는지도 놓쳐 버렸다.
강량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뭐요? 왜 화가 난 거요?”
“저쪽이 시비를 걸었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뭐가 되었든 병력을 데리고 오라고 했으니 그 말은 지킨 거야.”
“이런 황당한!”
“그래서 갈 건가, 말 건가?”
한숨을 푹 쉰 강량이 말에 올랐다.
“살살 달리쇼.”
“이랴!”
황석태의 짧고 날카로운 외침에 그의 기마가 힘차게 땅을 박찼다.
강량 역시 말을 몰았다.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는데, 차라리 격전지를 향해 가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빠르다!’
어느새 황석태는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있었다.
기마 간의 체력이나 속도 차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짧은 시간, 이 정도 거리 차이가 난다. 말을 다루는 기수의 실력 차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사람마다 재주가 다 다르다더니, 저렇게 뛰어난 기마술을 가졌을 줄이야.
번쩍!
그때, 후방 협곡 입구 쪽에서 한 줄기 살벌한 검기가 치솟았다.
강량이 외쳤다.
“종남이 협곡 입구에 도착했소!”
“알아!”
황석태가 힘차게 적룡창을 내질렀다.
콰득! 쩌어어억!
매서운 창술에 길을 막고 있던 나무 세 그루가 좌우로 쓰러졌다.
그 강력한 위력에 강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저 창술은?’
황석태의 창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휘이이잉! 콰직! 콰지지직! 퍼어어엉!
붉은색 광영이 번뜩인다 싶은 순간 앞을 가로막는 거목들이 기가 막힌 각도로 부러지며 길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신기(神技)에 이른 창술이었다. 섬세함도 섬세함이지만, 그 위력이 실로 대단했다.
‘저렇게 강했나?’
강량이 기억하는 황석태도 충분히 강했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맞상대해서 이길 자신이 없을 정도로.
한데 지금의 황석태는 그때의 기억보다 훨씬 더 강한 것 같았다.
퍼어어엉! 퍼퍼퍼펑!
송곳처럼 날카로운 창풍(槍風)에 수도 없이 부서지는 나무들.
그리고 마침내 제법 널찍한 숲길이 나타났다. 더는 나무를 부수며 전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황석태가 외쳤다.
“속도를 높여!”
강량이 이를 악물고 고삐를 흔들었지만, 황석태는 그런 그보다 배는 더 빠르게 달렸다.
‘기마구나.’
그제야 강량은 황석태의 창술이 이전보다 더 강해진 이유를 깨달았다.
‘기마 집단…… 그래, 황 단주는 그 자체로도 강하지만 기마에 탔을 때 더 강하다.’
강량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인마일체(人馬一體)의 무공이라니.’
초절정고수들의 싸움에서 기마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고수들이 내뿜는 내력과 발경을, 제아무리 튼튼한 말이라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석태만큼 기마술을 잘 다루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마의 속도와 중량감이 아무리 대단해도 고수의 내공력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황석태는 기마의 속도와 중량감을 최대치로 살리는 창술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황석태라면 어떤 고수와 싸워도 기마를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동시에 기마의 힘을 받아 무공 자체의 위력도 증폭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차원이 다른 고수라면 모를까, 그 정도가 아니면 황 단주의 무공은 난공불락의 위력을 자랑할 것이다.’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내가 아직도 저 양반의 힘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다.
패율은 어떨까? 패율은 아직도 자신에게 보여 주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인가?
그럼 연호정은?
훅!
잠시 상념에 빠져드는 것도, 빠져나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히히히히힝!
말을 멈춘 황석태, 그리고 곧장 그의 곁에 다가간 강량도 말을 멈추었다.
“……!!”
두 사람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 이게?!”
떠듬떠듬 입을 여는 강량. 하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황석태가 말했다.
“용암이라도 터진 것 같군.”
두 사람이 보는 격전지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부서져 사방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 안쪽, 반경 이십여 장이 넘는 공터는 군데군데 눌어붙은 채로 굳어 검게 변질되거나 정체 모를 회색빛 가루가 쌓여 있었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끔찍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살기다.”
강량이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황석태가 질린 얼굴로 말했다.
“잔존하는 살기가 느껴져. 정말 지독하군. 그저 편린에 불과한데도 이렇게 독하다면…….”
“형님이오.”
“뭐?”
강량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너무 독랄해서 몰랐는데…… 이거 형님의 살기요.”
“그걸 어떻게 알지?”
“그런 느낌이 나니까. 오랫동안 부대끼면서 살다 보면 그 정도는 아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무리 오래 붙어 지냈다고는 해도 잔존하는 살기로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황석태에게는 그러했다.
‘이 녀석.’
황석태는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강량을 바라보았다.
‘천재인 줄은 알았지만, 역시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이 나랑은 달라.’
분명한 약자이인데도 자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천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른 나이에 무종지벽을 뚫은 것은, 피를 토하는 능력 외에 하늘이 내린 재능 덕도 있었다.
‘부럽군.’
황석태가 애써 고개를 돌렸다.
“무극의 고수가 각 잡고 싸우는 광경을 본 적이 없어. 하지만 이 격전지…… 연 부관도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나도 그렇소.”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죽었다면 시체라도…….”
그때였다.
[올라들 오시게.]
순간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강량이 황석태에게 말했다.
“들었소?”
“들었네.”
“……누구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 수 있다.
두 사람에게 전음을 보내는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였다.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빠질 정도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삐이이이.
어디선가 부드러운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이군.”
“맞아. 저쪽으로 오라는 것 같은데.”
“……함정은 아니겠지?”
“모르지. 하지만 전음에 실린 목소리를 들어 볼 때, 별다른 의도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건 모르는 거잖소. 우리는 상대도 안 될 고수인데.”
두 사람은 직감적으로 상대가 음제라는 것을 알아챘다.
황석태가 고삐를 들었다.
“어차피 우리를 죽일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 다른 곳으로 도망쳐도 죽을 것이다. 음제의 실력이라면 우린 반 각도 도망칠 수 없어.”
“…….”
“가 보자고.”
“하긴.”
강량이 협곡 쪽을 바라보았다.
“종남 놈들도 처리해야 하니까.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저들도 음제 앞에서 염병 떨지는 못하겠지.”
“이랴!”
히히히힝!
힘찬 용음을 토해 낸 두 사람의 말이 잘 닦인 산을 타 올랐다.
산 하나를 넘고, 계곡을 끼고 우회하여 절벽으로 이어지는 길까지 올랐다.
“왔냐.”
놀랍게도 그곳에는 패율이 있었다. 그답지 않게 공손한 자세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황석태와 강량이 모옥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삼십 대 초반의 미부가 뒷짐을 진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패율이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빨리 말에서 내리고 인사드려라.”
“에?”
“음제 선배님이시다.”
“아!”
두 사람이 후다닥 말에서 내려 포권을 취했다.
“강량이 음제 선배님을 뵙습니다!”
“묵룡부 철기단주 황석태가 성천을 뵙습니다.”
하은교가 미소를 지었다.
“백도의 장로라는 녀석보다 흑도의 후배님들이 훨씬 더 예의가 밝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