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화. 거짓된 살의 (10)
하은교의 기세는 고요하고도 서늘했다. 연호정처럼 폭발적이거나 호연종처럼 살벌하지 않았고, 당형처럼 압도적이거나 양천처럼 사납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영역에 있는 모두가 숨도 못 쉴 것 같은 압박감을 받았다.
전력을 끌어 올리지 않았는데도 천하의 고수들이 얼어 버렸다. 말 그대로 고수 아닌 자들이 없음에도, 그들 모두 보이지 않는 맹수가 심신을 옭아매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제야 여광은 아차 싶었다. 수치심과 분노에 사로잡혀,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잊은 것이다.
우우우우웅!!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하은교의 기파는 기이한 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리가 없음에도, 저 멀리서부터 메아리치는 풍성한 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연호정의 입이 열렸다.
“백도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지만, 연호정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아련하여 그들의 귓가로 쏙쏙 파고들었다.
“민중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도덕적 이상향이니, 방법은 다를지라도 정의(正義)를 이루는 데에 한 몸 바쳐야 한다.”
연호정이 여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광은 하은교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강제였다. 하은교의 서늘한 기도 앞에서, 그는 눈알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천하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있으니, 정의를 해석하는 방법도 제각각일 거요. 그러나 분명히 말하는데, 지금 그대의 언사에는 정의가 느껴지지 않소. 그저 스스로도 겪어 본 적 없는 케케묵은 원한에 휩싸인 고집만이 가득할 뿐.”
“…….”
“심지어 현실을 보지 못해 그렇게나 위대하다고 자신하는 제 문파를 멸망의 길로 빠트릴 뻔하기까지 했지.”
종남이 무너진다?
과한 해석이지만, 작정하면 못 할 것도 없다. 진심으로 분노한 음제가 지금 당장 종남으로 쳐들어가면,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랜 세월 쌓아 놓은 무공과 기술이 있으니, 수적 우위와 더불어 전대의 고수들까지 동원하면 음제에게 타격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음제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남 역시 확실하게 무너진다. 특히나 대량 학살에 특화된 음공에 당하면 절정고수급도 저항 한 번 못 해 보고 피살될 것이다.
“잘 아셨으면 좋겠소. 당신이 이 자리에서 살아 나가는 이유를. 종남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종남이 그간 섬서의 평화를 위해 이바지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살아 나가는 것이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것을 안다면, 언행에 조심하고 세상을 위해 더 힘을 써 주시오. 종남의 명망 높은 선사들께서 이룩했던 협행의 족적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마시오.”
“…….”
“남들보다 우월한 힘을 지녔다고 오만해지면, 떠받들어야 할 민중을 어느새 지배하고자 하는 스스로를 보게 될 거요.”
하은교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살려 보내 주실 거잖습니까?”
가만히 그를 보던 하은교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나는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종남의 대장로처럼 개인의 잘못을 그 집단의 악랄함으로 생각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네.”
“반대로, 그 집단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으로 인하여 지금 세대의 소속원을 악인이라 보지도 않으시죠.”
“그래, 그렇지.”
“선배님께서 위대하신 이유가 무공 때문이 아님을 오늘 알았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하은교가 왼손을 내렸다.
후우우우웅!
서늘하게 퍼져 나갔던 하은교의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다.
“허억! 허억!”
종남 검사들 대다수가 격한 숨을 뱉었다. 하은교의 압도적인 기운에 숨조차 쉬지 못했던 것이다.
하은교가 여광을 보며 말했다.
“내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것이야. 차후 종남이 오늘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장문인을 찾아가든 무림맹을 찾아가든 할 것이네. 그대들은 그에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할 게야.”
주르륵.
여광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하은교가 연호정의 등을 살짝 눌렀다. 기운을 일으키느라 그의 몸에 신경을 덜 썼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의 일을 교훈 삼을 수 있을 정도의 수양이 되었길 바라네.”
“…….”
“가게. 내 더는 자네들을 보고 싶지 않아.”
결국 여광은 고개를 떨어트린 채 몸을 돌렸다.
그때, 그의 눈에 황석태가 보였다.
황석태는 말없이 여광을 바라보았다. 서늘하고도 깊은 그의 눈동자는, 백도의 명문이라는 종남 대장로의 눈보다 더 맑아 보였다.
여광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걸어갔다. 종남 검사들을 밀치면서까지 가는 뒷모습에 통렬한 패배감이 가득했다.
하은교가 한숨을 쉬었다.
“저치의 표정을 보니 반성은 글렀구먼.”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썩어도 준치라고, 괜히 구파일방 출신이겠습니까.”
“출신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묘한 소리를 하는군.”
“사람을 판단하진 않지만, 적어도 종남에 올바른 정신이 박힌 어른이 한 명도 없진 않을 겁니다.”
“그게 아니겠지.”
“예?”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그래야 종남이 살 테니까. 다가올 전쟁에 종남파는 굉장한 전력이 될 텐데, 이런 일로 망가지면 쓰겠는가.”
연호정이 멋쩍게 웃었다.
“들켰습니까?”
“자네는 은근히 읽기 쉬운 사람일세.”
“사천이 안정을 찾았으니, 적들은 본 병력을 투입할 진입로를 찾을 것입니다. 그 진입로가 섬서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하은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읽기는 쉽지만, 알기는 어려운 사람이로군.”
“과찬이십니다.”
그때, 강량이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보복 행위는 하지 않겠지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여기서 보복까지 하게 되면 종남은 끝장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주제도 모르고 음제 선배님 앞에서 나대던 인간 아닙니까? 분을 못 삭여서 또 난리를 칠지 누가 압니까?”
패율이 말했다.
“난리를 친다 해도, 이번과 같은 일은 없을 거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검사들의 얼굴을 봤거든.”
“종남 검사들이요?”
“그래.”
패율의 눈이 아련해졌다. 여광의 행태와 휘하 검사들을 보며, 그는 점창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떤 문파든 존경받을 만한 어른이 있는가 하면, 상종 못 할 늙은이들도 있는 법이지. 누구를 따르느냐에 따라 본인의 인생도 달라지는 법이야.”
“뭔 말이래요?”
“다만, 나는 저 검사들의 얼굴에서 나름의 깨달음을 보았다.”
자존심 상한 여광이 엇나갈수록, 젊은 검사들은 그의 잘못을 더욱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말하자면 각성이다. 젊기에 어설프지만, 젊기에 옳은 길이 무엇인지 고민할 기회도 많다.
“뭐, 또 같은 짓거리를 한다면 그땐 어쩔 수 없지. 선배님 말마따나 선공으로 박살 낼 수밖에.”
“그러다가 무림맹에 찍힙니다. 선배님 문파도 생각해야지요.”
“나야 점창에서도 내놓은 자식 취급이잖냐.”
“하하하.”
강량의 웃음소리가 유독 시원하게 들렸다.
하은교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평화를 바라면서도 분란이 없으면 따분해한다네. 반대로, 삶이 팍팍해져도 분란을 일으키길 주저치 않아. 증오를 쏟을 대상이 있어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람들은 거짓된 살의에 중독되었다네.”
“거짓된 살의요?”
“실상을 알고 보면 굳이 화낼 일이 아닌데도 스스로 최면을 걸지. 저놈들이 문제다, 이놈들은 죽여야 한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다, 라고 찍어 두곤 맹목적으로 욕하길 주저하지 않아.”
“…….”
“그들은 다름을 모르는 게 아니야. 그저 다름을 틀림으로 해석하는 게 더 쉽고 통쾌하다는 걸 아는 거지. 사무치는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고.”
하은교가 탄식을 토해 냈다.
“종국에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네. 저 여광처럼.”
“…….”
“나는 그런 이들을, 내가 가장 잘하는 음(音)으로 치유해 주고 싶었다네. 그게 내 꿈이었지.”
일행은 괜스레 숙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씁쓸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하은교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참 별의별 일이 많은 하루였네. 바쁜 건 알지만, 동이 틀 때까지는 이곳에서 푹 쉬게. 일도 체력이 되어야 능률이 오르는 법이라지 않은가.”
패율과 황석태, 강량이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강량은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패율은 절벽 끝에 앉아 허공에 다리를 휘저었고, 황석태는 말에 기대앉아 창날을 손질했다.
연호정은 여전히 평상에 앉아 있었다. 하은교가 명문혈에서 손을 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선배님.”
하은교의 얼굴에 은근히 엄한 기색이 어렸다.
“쉴 시간이 많지 않을 것 아닌가? 자네는 이 일행의 장(長)이야. 장이 흔들리면 일행 전체가 흔들리네.”
“…….”
“잠자코 있게. 축시(丑時)가 지나기 전까지는 본래 상태의 칠 할까지 회복시켜 놓을 것이니.”
“예에.”
연호정의 얼굴은 그답지 않게 몹시 어색했다.
회귀 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온갖 사건에 개입했고 임무에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했다.
그런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다. 혼자 힘으로는 절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나 친근하게 내상을 직접 다스려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런 일은 흑암제 시절에도 없었다.
그 ‘최초’의 경험이 연호정을 어색하게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쩌면 저도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응?”
“거짓된 살의라는 것 말입니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저는 삼교를 증오합니다. 그 증오심은 진짜입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이렇게까지 미쳐 날뛸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
“증오하고 또 증오하고, 분노에 미쳐 광기마저 드러낼 정도로 스스로를 잡아먹으면서 상대해야 할 놈들인가.”
“…….”
“어쩌면 저는 제 존재의 이유를 놈들에게서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은교의 눈이 따뜻해졌다.
“자네는 참 스스로를 잘 돌아보는군.”
“그러지 않았으면 진작 광기에 물든 마인이 되어 버렸을 겁니다.”
실제로 마귀가 될 뻔했다. 하은교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 것이다.
“자네, 무극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겠지?”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얼마 되지 않은 것치고는 대단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더군. 단순히 그러한 싸움에 능한 것이 아니라, 마치 무극의 힘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잘 아는 것만 같았어.”
연호정이 말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은교가 말을 이었다.
“무극은 양날의 검이라네.”
“……?”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궁극의 힘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곧, 인간이 버틸 수 없는 궁극의 시련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네. 아까 전, 자네가 살기에 잡아먹혔을 때처럼.”
연호정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은교가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마치 기죽은 자식을 위로하는 것처럼, 그녀의 손짓에 묘한 정이 묻어 나왔다.
어쩌면 그녀는 연호정에게서 버린 자식을 떠올리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연배도 비슷하니까.
“살기 따위에 잡아먹히지 말게. 그러지 않아도 자네는 강해.”
“……알겠습니다.”
하은교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 주변을 수놓은 별빛들이 저마다 아리따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곱구나, 하늘은.”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