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71화 (671/963)

671화. 반전(反轉) (3)

“헉!”

눈을 뜬 지소현은 숨을 거칠게 할딱거렸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머리 한쪽이 커다란 돌에 짓눌리는 듯했다. 어지러우면서도 묘하게 상쾌한 기분이었다.

“일어났느냐?”

“스승님?”

“그래.”

지소현이 몸을 일으켰다.

“이게……?”

“지금은 다소 어지러울 것이다. 그래도 몸은 얼추 괜찮아졌을 게야.”

“네?”

“네가 쓰러진 지 거의 하루가 지났다.”

지소현은 얼떨떨했다.

“하루라니요?”

“사음교의 주구가 뿜은 살기에 정신을 잃었느니라.”

“아!”

그제야 지소현은 깨달았다. 자신이 왜 정신을 잃었는지.

그래서 놀라웠다.

‘살기에 정신을 놓다니!’

지소현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상대가 제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고작 살기 따위에 정신을 놓다니?

그녀는 예인이기 전에 무인이었다. 무인으로서 이런 수치가 또 있을까 싶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제자를 보며, 하은교가 담담하게 말했다.

“언제나 그러했지.”

“네?”

“너는 언제나 음(音)보다 무(武)가 먼저였느니라.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말이다.”

지소현은 당황했다.

“스, 스승님.”

“너를 탓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물론 너는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성장했지만, 그것은 사람마다 흥미를 느끼는 분야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네가 음을 놓을 성격도 아니잖으냐?”

지소현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은교가 미소를 지었다.

“죄송할 일이 아니래도. 다만, 그런 너의 본심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애써 무보다 음을 더 강조했다. 나도 쓸데없이 고집을 부린 셈이지.”

“스승님.”

“음이란 무공처럼 격식 있는 분야가 아니다. 진정한 음은 악기를 배운 적 없는 어린아이에게도 찾아온다. 세상 무엇이라도 음이 될 수 있다. 가르치지 않아도 놓지만 않는다면, 너 역시 음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지소현은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스승은 자애로운 분이었지만, 언제나 나름의 벽을 세우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이었지만, 일정 이상의 거리를 허용하지 않으셨다.

그런 스승께서, 지금은 평소와 달리 풍성한 감정을 보여 주고 계셨다.

“스승님. 혹시…….”

“내 너에게 하나의 무공을 제외하고는 전부 전수하였느니라. 그것만 완성해도 거친 강호 무림에서 초일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

“…….”

“부디 알고 싶구나. 이미 알고 있음에도 네 입으로, 네 진심을 듣고 싶다.”

하은교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너는 무공으로 천하에 이르고 싶으냐?”

무거웠던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흔들리던 시야도 또렷해졌다.

달라진 스승의 모습. 그 변화가 어떤 의미인진 모르겠지만, 지소현은 언젠가 스승의 저러한 질문이 제게 날아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많이 고민했지만, 지소현은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스승이다. 스승 앞에서 솔직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까.

“음은 저에게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부입니다.”

“그러냐.”

“하지만 무공은 어느새 저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하은교는 제자가 왜 그런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세상에 대해 잘 모를 때만 해도, 제자는 무공보다 음에 더 흥미를 보였다. 그쪽으로 재능도 출중했고, 납치당해서 배우던 것도 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세상이 얼마나 험한 것인지를 배우게 되었을 때.

자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으리란 걸 깨달았을 때.

나아가, 스승의 이름이 강호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부터 지소현은 힘을 숭상하게 되었다.

더는 그리 부당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처럼 타인의 손에 의해 불행한 삶을 강제당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

스승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지소현의 눈은 음보다 무를 좇게 되었다.

하은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잘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때때로 오해하고는 하지. 자신이 가르친 이가 언제나 어린애일 거라고, 언제나 보호해야 할 존재라고 착각하고는 해.”

“…….”

“음과 무예를 떠나, 너는 이미 세상에 대해 알고 있다. 아직 부족하지만, 너 자신이 스스로를 잘 알고 있거늘 어찌 네게 내가 바라는 삶을 강요하겠느냐.”

“……스승님.”

“전수해 주마.”

하은교의 얼굴에 엄기(嚴氣)가 어렸다.

“천하 무림인들이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두려워하던 음제의 진짜 무공을, 네게 전수해 주마.”

지소현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익힌 무공만으로도 능히 강호의 고수로 이름을 떨칠 만했다. 한데 그조차도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 전부를, 이제야 전수하게 된 것이다.

“다만, 처음 무공을 배웠을 때처럼 자세를 봐주거나 뜻을 풀이해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무공이기 때문이다.”

“네?”

“구결과 법문을 외우고 스스로 고뇌하거라. 마지막으로 전수하는 나의 무공은 깨달음의 무공이다. 그것을 제대로 개화하는 것은 너의 몫이다.”

깨달음의 무공. 설명과 가르침만으로는 경지에 오를 수 없는 지고의 무공이라는 뜻이었다.

하은교가 담담한 목소리로 구결을 말했다.

깜짝 놀란 지소현은 자세를 바로 하고 스승의 말을 들었다. 그 말을 외우고 또 외웠다.

시간이 흘렀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하은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신공의 구결과 법문을 완벽히 외울 때까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해서 알려 주는 것이다.

다행히 지소현은 똑똑했다. 단련된 내공과 감수성 풍부한 음예를 배워 하단과 중단이 몹시 탄탄했으니, 자연스레 상단전도 어릴 때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구결과 법문을 스물두 번째 불러 주자, 지소현은 그 복잡한 글자들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었다.

“역시 똑똑하구나.”

당장 외웠다고는 해도 하루가 지나면 몇 글자 빼먹을 수도 있을 만한 양이었다.

하지만 지소현은 그러지 않았다. 막힘없이 줄줄 뱉는 걸 보면, 짧은 시간 그 많은 구결과 법문을 머리에 단단히 새겨 넣은 것이 분명했다.

하은교가 미소를 지었다.

“너는 언제나 착하고 똑똑했지. 너와 같은 제자를 두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를 것이다.”

“스승님……?”

구결과 법문에 취해 멍하니 입을 달싹이던 지소현은 다시 불안함을 느꼈다.

하은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소 갑작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할 일이 있고, 너에게도 너만의 운명이 있을 것이다.”

“……?!”

“헤어질 때가 왔느니라.”

“스, 스승님!”

지소현이 벌떡 일어났다.

하은교가 고개를 저었다.

“헤어질 때라 하여 완전한 이별은 아니다. 내게는 할 일이 있다. 그것을 위해 잠시 떨어지는 것이야.”

“무슨 일로……?”

하은교가 미소를 지었다.

암울한 감정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비로소 자신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일대 거장의 미소가 거기에 있었다.

“저버린 천명(天命)을 바로잡으려 한다.”

“……!”

“어려운 일일 것이다. 당연하겠지. 그러나 더는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지은 죄를 외면하면서 천하인들을 힘들게 했으나, 이제는 아니야. 내가 나로서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을 하러 갈 것이다.”

주르륵.

지소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 헤어짐이 스승과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

하은교가 지소현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라. 무엇이 슬프고 두려워 그리 우느냐? 이미 네 안에 선대의 모든 것이 있거늘.”

“스승님.”

“오냐.”

지소현이 한 걸음 물러난 후 절을 올렸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그래.”

“스승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신 것들을 꽃피울 것입니다.”

하은교가 크게 웃었다.

“너의 존재가 이미 나에게 꽃과 같다. 그저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구나.”

절을 한 지소현의 앞에 마주 앉은 하은교가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다시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연호정 대수의 곁에서 천하를 배우거라. 물론 네가 원한다면 홀로 독야청청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무공으로 천하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만한 선생이 또 없을 게야.”

“……네.”

“조금 더 쉬거라.”

하은교의 손가락이 지소현의 혼혈을 짚었다.

스르륵.

지소현이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잃었지만,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제자를 보는 하은교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그녀에게 있어 지소현은 또 하나의 자식과 같았다.

다만, 처음에는 버린 자식을 대체하는 존재에 가까웠다. 굳이 말하자면 그리 순수하고 깨끗한 관계는 아니었달까.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고 애써 주는, 어린 나이에 벌써 어른이 되어 버린 제자를 보며, 차츰 지소현의 존재 자체가 하늘이 자신에게 주신 큰 선물임을 알았다.

“이승에서 재회하지 못하더라도, 훗날 이승 아닌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게야. 그때까지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지소현을 재우고 밖으로 나온 하은교.

그녀의 눈에 연호정이 보였다.

하은교가 물었다.

“바쁜 사람이 여긴 또 어인 일로 오셨는가?”

“…….”

연호정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은교 역시 말없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그 후련하고도 애잔한 미소는 그대로였다.

잠시 후,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꼭 그리하셔야 합니까?”

하은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은 참으로 아름답고 청아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질 만큼의 기품도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할 줄 알고?”

“사음교로 찾아갈 생각이십니까?”

하은교는 그저 미소만을 띠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정말 저 젊은 청년은 놀랍다고.

첫 만남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 인연조차도 이제 겨우 이틀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情)이란 하루 만에도 십 년의 깊이를 자아내게도 하는 법. 하은교는 자신의 마음과 가치를 잘 알아주는 일세의 벗을 만난 기분이었다.

“미안하네. 사실 자네들을 도와주고 싶었어.”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천하인의 일임과 동시에 저희의 일입니다. 선배님께서 당장에 하실 일이 있는데, 굳이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그랬겠지.”

“다만…….”

“아네.”

“…….”

“알아. 자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하은교가 한층 시원시원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진즉에 이랬어야 했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어. 지금까지도 내가 지은 죄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지. 꼴에 죽음이 무섭기도 했을 게야.”

“…….”

“젊을 때 천륜을 어겼네. 이후 나의 삶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어.”

“…….”

“자네를 만나 다행이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미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걸세. 자네에게 고맙고 또…… 미안하네.”

누군가는 답답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음교의 본진이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찾아가려는 것도, 굳이 연호정을 돕지 않고 떠나는 것도, 나아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제자와 헤어지려는 것 또한.

그러나 그것은 세상을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보는 것.

하은교는 이제야 스스로를 되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되돌리려 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합리(合理)란 말만큼 불합리한 표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아는 연호정은 더 이상 하은교를 말릴 수 없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하은교는 성큼성큼 걸어가 연호정을 안아 주었다.

“늙은이의 목숨 따위 걱정하지 말고 거침없이 나아가게.”

“…….”

“잘할 수 있어, 자네는. 이전에도 그랬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연호정을 놓아준 하은교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승에서건 저승에서건, 꼭 다시 만났으면 하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두 사람이 사심 없는 미소로 서로를 마주했다.

잠시 후.

하은교가 절벽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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