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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675화 (675/963)

675화. 반전(反轉) (7)

다른 건 몰라도 철장개의 정보 전달 실력 하나만큼은 무척이나 대단했다.

섬서 곳곳에 똬리를 튼 문파, 혹은 고수들에게 개방의 연락이 닿았다. 그 속도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빨랐으며, 그만큼 사태가 급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내 사손들에게 달리 할 말이 없구먼. 다만,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이 사람을 믿어 주게나. 화산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지만, 그 대상이 종남으로 바뀌었어. 누가 되었든 마땅히 도우러 가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습니다. 종남이라도 필시 우리를 도우러 왔을 겁니다.”

“그렇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가야만 하네. 이미 연호정 대수와 그 일행이 움직였어. 놀라운 고수들이지만, 그들만으로 선봉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일 게야.”

“알겠습니다. 당장 동원 가능한 매화검수(梅花劍手)와 장로들을 부르겠습니다. 만에 하나를 위해 본산에 최소 병력을 남겨 두는 것은 이해해 주십시오.”

“허허, 나는 일선에서 물러난 골방 늙은이에 불과해. 사손께서 이리 나서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야.”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사백조 어르신께서 이리 말씀하지 않으셔도, 모두가 도우러 가야 할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염병, 그 망할 인간이 그랬단 말입니까?”

“그랬……소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언제 여기에 오셨소?”

“사천에서 큰일이 터졌잖습니까. 사부님 좀 찾아뵈려고 가는 도중이었는데, 마침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이거 안 되겠군. 거지들도 좀 모아야겠습니다.”

“물론 그래야지. 함께하시겠소?”

“섬서 상황은 나보다 장로께서 더 잘 알지 않습니까? 병력을 끌고 갈 테니, 철장개 장로께서는 뒤를 맡아 주십시오.”

“알겠소. 하면 지금 당장 출발하시오. 사태가 급박하오.”

“알겠습니다. 살아 돌아와서 보자구요!”

“그, 그런 말씀 마시오! 당연히 무사히 돌아오셔야지! 방주님께서 다시 제자를 키우려면 얼마나 힘드시겠소?!”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본방의 방도가 되려면 다들 혓바닥에 바늘 몇 개씩은 달아야 하는 겁니까? 장로씩이나 되신 분께서 그게 할 말이에요?!”

“뭐? 종남이?”

“그렇다는데요.”

“……근데 왜 우리한테 연락이 왔대?”

“안 도와주면 섬서에 있는 기반을 싹 다 날려 버리겠답니다.”

“이 미친개 같은 영감태기가!”

“장난 같지는 않던데요? 눈에서 불이라도 뿜을 기세더라고요. 그간 이런저런 부탁들을 해 오는 걸 애써 무시했는데, 이번에도 무시하면…….”

“……개방에서 전격적으로 나선다는 건가.”

“만에 하나 종남이 무너지면, 아니 무너지진 않더라도 큰 타격을 받으면 섬서가 꽤나 어지러워질 겁니다.”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지.”

“예. 그걸 아니까 우리를 가장 먼저 족치려고 드는 거 아니겠어요?”

“시벌, 하여간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우리처럼 힘없는 놈들이 대개방의 치졸한 장로 말을 무시해도 되겠어?! 싹 끌고 가야지! 시발!”

“어라? 문주님도 가시게요?”

“내가 안 가면? 수하들만 우르르 보내고 나 혼자 편하게 술이나 퍼마셨냐고 직접 찾아와서 몽둥이찜질을 할 텐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에이, 또 엄살이시네. 말이야 바른말이지, 문주님이 그런 늙은이 몽둥이질에 당하겠어요? 요새 유명한 그…… 누구였지…… 아! 그래, 호검쌍위 정도가 아니면 젊은 층에 문주님하고 대적할 사람 없어요.”

“그 늙은이는 젊지가 않잖아, 새꺄.”

“어쨌든 칼 뽑으면 문주님이 질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럼? 그 늙은이 작살내고 개방이랑도 싸울까?”

“……아?”

“아? 난리 났군. 이딴 걸 군사라고 모시고 왔으니, 본문의 앞날이 훤하다.”

“그래서, 지금 출발할까요?”

“싹 모아! 출발하게! 시발!”

천하에 이름을 날린 명문부터, 아무도 모르게 세력을 키워 온 문파까지.

종남을 돕기 위해 제각기 창칼을 뽑아 들고 달려오는 이들의 힘은, 어떤 외적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화려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거친 새외의 땅에서 온갖 전투를 치렀던 사음의 병력보다 빠를 수는 없었으니.

각 문파에서 병력을 모아 종남으로 달리기 시작할 때, 이미 명극 휘하 혈랑단이라는 거대 조직은 종남을 백여 리 앞둔 위치에 진입해 있었다.

* * *

번쩍!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던 연호정의 눈이 사납게 뜨였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북쪽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지극히 냉정했다.

패율이 물었다.

“뭔가를 느낀 거냐?”

“냄새가 납니다.”

“냄새라니?”

“사납고 거친 냄새…… 애써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살의의 잔향.”

패율의 눈이 흔들렸다.

“적이냐?”

“그런 것 같습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살의가 이곳을 향하고 있어요.”

“……빌어먹을.”

패율이 뒤를 힐끔거렸다.

종남의 산문이 보였다. 그 뒤로는 넓고 화려하게 치장된 수많은 도관과 궁전들이 보였다.

“저쪽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

“그렇군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당장 쳐들어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뭔가 어수선한 것이, 꽤 지친 것 같아요.”

“그런 것도 느껴지냐?”

“그냥 감입니다. 틀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맞을 확률이 높겠지?”

“저는 제 감을 믿습니다.”

“그럼, 놈들이 언제 이곳을 침공할 것 같으냐?”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공세 측에서 수성 측을 박살 내기 위해서는 기습의 묘리가 최고입니다.”

“……밤이로군.”

“예. 얼마 남지 않았지요.”

내공의 고수는 범부와는 달리 밤이라도 어느 정도 밝게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밝게 본다 해도 밤은 밤이다. 하물며 그 밝게 본다는 것도 내공을 운용해 안력을 돋우어야 하는바. 의식적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야간 기습의 묘리는 무림인에게도 똑같이 통용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얼추 백 리가 조금 넘는 거리지만, 작정하고 돌진하기 시작하면 금방이에요. 하나하나가 보통 고수들이 아닙니다. 체력 분배도 잘 되어 있겠지요.”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냐?”

연호정이 입술을 달싹였다.

“청궁…… 천하관…… 태청소…… 북동쪽…….”

“뭐 하냐?”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열거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패율이 팔짱을 꼈다. 지금 연호정을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잠시 후.

“외부에서 종남을 칠 때, 가장 먹음직스러운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뜬금없이 뭔 소리냐?”

“말씀해 보십시오.”

이건 또 왜 이러냐.

패율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공격 측이 어떤 놈들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만에 하나 화살이나 화포를 들고 왔다면, 서북방의 청목애(靑木崖)를 노릴 것 같다.”

“창칼을 든 평범한 무림인들이라면?”

“뭘 고민하겠어? 산문 입구 아니면…….”

“…….”

“남서방의 사도암(思道巖) 쪽이 아닐까?”

“잘 보셨습니다.”

확실히 패율은 감각이 있었다. 황석태라면 더 잘 알았겠지만, 부대를 운용해 본 적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패율의 전술적 안목은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산문으로 올 확률은 낮습니다. 적의 병력이 종남을 압도한다 하더라도, 정정당당하게 산문으로 들어서면 피해가 너무 커요. 거기다 수성의 이점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곳이 산문으로 이어져 있는데, 수성의 이점은 곧 공성의 악수가 됩니다.”

“그럼 정말 사도암?”

“사도암, 그리고 청목애. 둘 모두를 봐야 할 겁니다. 공세 측이 보는 가장 효율적인 곳은 당연히 막아야 하고, 이쪽에서 상상치 못했던 곳 중 가장 위험한 곳도 막아야 하지요.”

“하나 의문이 드는데.”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야 지금 종남에 와서 이곳저곳 기웃거려도 봤고 홍적 장로의 지도로 지형도 익혔지만, 놈들도 이곳을 잘 알까?”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다만, 놈들도 구대문파의 위상만큼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대문파를 공격하려 드는데, 최소한 어디가 약점인지는 알고 오지 않겠습니까?”

“하긴, 우리가 모르는 세작들이 중원 곳곳에 숨어 있을 테니까.”

“일단은…….”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장로들부터 만나 보시지요.”

잠시 후.

두 사람이 종남파 상궁에 도착하자, 몇몇 장로들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무림맹 의정군 대수 연호정입니다.”

그는 일부러 묵룡부의 특임 부관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괜히 그들에게 반발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패율은 그런 연호정을 보며, 정말 많이 참는다고 생각했다.

중앙에 선 장로, 일장로 구윤이 예를 취했다.

“의정군의 젊은 대수를 이렇게 보는구먼. 일장로 구윤일세.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야.”

“별말씀을요.”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세. 외적이 종남을 치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 하였는가?”

패율은 답답했다.

홍적에게 말을 전하고 장로회의를 한 지가 한참인데, 아직도 고작 저런 말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연호정이 침착하게 말했다.

“벌써 백여 리 앞에 와 있습니다.”

“뭐라?!”

구윤을 위시한 장로들은 깜짝 놀랐다.

“바람에 실린 살의가 이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들의 전력을 알 수는 없지만, 보통 놈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기운이 읽히지 않는 놈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말인즉, 자신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강자라는 뜻이었다.

구윤이 다급히 물었다.

“놈들이 벌써 이 근방에 와 있다고? 그것이 참말인가?”

“그렇습니다.”

“자네는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읽히니까요.”

“읽힌다니? 대체 어떻게?”

궁금할 만도 할 것이다. 종남 입장에서는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절차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패율에게는 아니었다.

지금껏 부글거리는 속을 얼마나 참고 참았는지 모른다. 패율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것이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상궁을 넘어 사방의 도관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중원 전체를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 된 놈들이오! 놈들의 병력은 당장 중원과 전면전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란 말이오! 그런 놈들이 벌써 코앞까지 왔는데, 여태 회의나 하면서 병력도 모으지 않았소이까!”

분노가 가득 실린 목소리였다.

연호정이 패율을 바라보았다.

“선배님. 그만하십시오.”

“너도 적당히 해! 도와주러 온 손님을 안으로 들이지는 못할망정 바깥에 세워 둔 것도 모자라, 반나절이 지나도록 회의나 한답시고 여유를 부리는 이들을 보고 가만히 있으란 거냐!!”

홍적이 노기 어린 음성으로 외쳤다.

“가만히 듣자 하니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구나! 점창 최연소 장로라 하더니 세상이 다 자네 것처럼 보이는가!”

더 화를 내려던 패율은 이내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호정.”

“예, 선배님.”

“돌아가자. 빌어먹을 종남, 무너지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해. 이따위 정신머리 없는 놈들, 차라리 적의 손에 멸망해 버리라지.”

그때였다.

쾅!!

무지막지한 굉음과 함께 살벌한 충격파가 종남산 일대로 번져 나갔다.

화가 나서 뭐라 외치려던 장로들은 물론이고, 한참 멀리 떨어져 있던 종남의 문인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굉음의 근원지는 바로 연호정이었다. 연호정의 진각이 종남산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강력했던 것이다.

“진정하십시오.”

“…….”

“이곳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도 많고, 아직 어린 도동들도 많습니다. 화가 난다고 선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선배님.”

패율이 침음하며 눈을 감았다.

연호정이 구윤에게 말했다.

“적이 코앞에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종남의 전 병력을 모아 수성 준비를 해 주십시오. 그중 청목애와 사도암은 특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그, 그것이…….”

“검을 쥐지 못하는 이들은 지금 당장 산 아래로 내려보내셔야 합니다. 칼에는 눈이 없는 법입니다. 섣불리 지키려다가 오히려 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조금 더 차분하게 준비하려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다소 공격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겠다.

‘항상 이렇지.’

하은교를 끌어내기 위해 제자를 납치한다는 미친 생각을 떠올렸을 때처럼.

연호정은 이번에도 남들이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방법에 손을 대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오직 그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살벌한 방법이었다.

“제가 적장을 만나 보겠습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 수 있을 겁니다. 그 전까지, 최대한 준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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