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76화 (676/963)

◈676화. 피는 어디로 흐르는가 (1)

“후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은 여인이 산 아래 펼쳐진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나흘 만에 섬서라…… 엄청 무리했네.”

제아무리 신법에 자신이 있어도 이리 빨리 도달하기는 힘든 거리였다.

하물며 팔십 근이 넘는 거대 병기까지 짊어지고 왔다. 축기(畜氣)를 돕는 단약까지 섭취하며 달려온 길, 그게 아니었다면 아직 하남 서부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끙차!”

쿵!

시커먼 거대 도끼가 땅에 박혔다.

여인이 투덜거렸다.

“도대체가, 어떻게 이런 걸 쥐고 휘두를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이 아니야.”

도끼를 보니 새삼 타고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육이나 관절이 부서지지 않는 것도 놀랍지만, 이걸 몇 시진이고 휘두를 만한 체력이 있다는 게 더 무시무시하다.

“어디 보자.”

산에 오르기 직전 개방에서 정보를 받은 그녀가 남은 거리를 계산했다.

“지금쯤이면 그쪽도 섬서로 진입했을 테니까…….”

사천의 일을 마무리한 뒤, 묵룡부에서 받은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섬서 중앙으로 간다고 했다.

참 쉬는 날 하루 없이 잘도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본 지 오래되었지만, 그런 부분에서는 여전한 모양이었다.

“빠르면 이틀, 넉넉히 가면 나흘.”

여인, 묵비가 한숨을 쉬었다.

“빨리 가서 쉬자.”

빨리 간다고 쉴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길, 모용가주의 말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으로 볼 때 무척이나 위험한 임무일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니 더더욱 빨리 가야 할 것이다. 투덜거리고는 있지만, 내심 걱정스러웠다.

투웅!

물을 마시고 호흡을 가다듬은 묵비가 도끼를 챙겨 들고 재차 힘차게 땅을 박찼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은인이자 전우를 만나러 가는 길.

나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에 기대와 걱정이 가득했다.

연호정이 섬서로 들어와 지소현을 납치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터어엉!

자세는 여유롭기 그지없지만, 나아가는 속도는 그 누구보다도 빨랐다.

개방의 후개, 가득상의 신법은 그처럼 고급스러웠다. 각고의 수련을 했는지 방출되는 진기의 양은 최소화되었고, 잔잔한 기도는 물처럼 고요했다. 진기를 지극히 효율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본디 개방의 후계자들은 정식 방주가 되기 전까지는 무공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실제 무공보다도 정보의 분석 능력과 무림 전반에 걸친 지식의 습득을 훨씬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소양을 잘 쌓고 나면, 이후에야 스승의 내공과 깨달음을 물려받고 빠르게 고수로 진입한다. 그것이 통상적인 개방 후계자의 성장 환경이었다.

가득상은 달랐다.

그 역시 시작은 비슷했지만, 지금 그가 익힌 무공은 중원의 어느 대문파 수장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몇 년만 지나면 불혹의 나이다. 당대 용두방주 화진천이 내공과 더불어 개방 최고 비기인 강룡(降龍)의 무공까지 전수한 지금, 그는 개방의 수장으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덕체(智德體)를 완벽하게 갖춘 새로운 용. 이제는 잠룡(潛龍)이 아니라 창룡(蒼龍)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 그가, 연호정과 종남을 돕기 위해 매서운 질주를 이어 가고 있었다.

‘망할 양반 같으니.’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가는 그의 등 뒤로, 은신술에 뛰어난 고수들이 하나둘씩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가 개방에서 내로라하는 조직의 무인들이었다. 중원 전역에 퍼진 고수 모두를 집결시키진 못했지만, 당장 섬서 인근에 퍼진 고수들만 모아도 손쉽게 백 단위가 나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부님을 중독시키냐!’

사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가득상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연호정이 사부님을 중독시켰단 얘기를 들었을 때, 가득상은 강한 불쾌감과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흘러가는 사태를 냉정하게 읽은 그는 연호정의 행동을 이해했다. 이해와 감정은 다른 영역이었지만, 적어도 연호정이 아무 이유 없이 사부님을 중독시킨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당가 사태가 완료되고 나선 직접 찾아와 해독까지 해 줬다니, 달리 의도가 있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들도 그만큼 다급했고, 마땅한 대응책이 없었기도 했다.

그러나 가득상의 마음에 고인 감정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만큼 대부분은 씻겨 날아갔으되, 앙금이 없지는 않았다. 어떤 이유라도 스승은 곧 부모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나한테 좀 맞자!’

그러니 그 전까지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 연호정이 죽어 버리면 울분을 풀 기회도, 다시 그 살벌한 우정을 쌓아 갈 기회도 없을 테니까.

파라라라락!

최단 거리로 돌파하다 보니 울창한 숲을 마주하게 되었다.

찰나의 시간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가득상의 때 묻은 장포가 일순 크게 부풀었다.

가득상이 쌍장을 내질렀다.

콰르릉!

폭음과 함께 나아간 무형의 장력이 전방의 나무들을 살벌하게 박살 냈다.

일격에 길이 생겼다. 나무의 굵기와 빽빽함을 생각하면, 감탄을 넘어 경악이 튀어나올 정도의 위력이었다.

가득상이 외쳤다.

“힘들 더 내라! 최소한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지는 종남산에 도착해야 한다!”

연호정이 종남산에 도착하기 하루 전이었다.

“상황은?”

“무척이나 급박합니다.”

철장개의 제자는 스스로의 별호를 철권개(鐵拳丐)라고 지었다. 스승은 장법으로 고수가 되었으니, 자신은 권법으로 일가를 이루겠다는 포부를 담은 것이었다.

헛웃음이 절로 나올 별호였고, 실제로 유치하기까지 했다. 안타깝게도, 권법 실력 역시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 처리만큼은 예외였다. 철권개의 정보 분석 능력과 순간 판단력은 스승인 철장개를 넘어설 정도였다.

“화산에서는 장로 셋과 매화검수 백오십이 하산했습니다. 그리고 십여 년 전부터 양성 중인 매화창수(梅花槍手)들도 이번 전투에 투입된다고 합니다.”

“매화검수 백오십이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군. 게다가 매화창수라…… 정통 있는 화산 무공에 실전성을 갖춘 외부 무공까지 익힌 이들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대외에 한 번도 보여 주지 않던 병력인 만큼, 이번 전투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주시해야 할 이들입니다.”

“그들의 힘을 주시하기 이전에, 종남 전투의 결과가 승리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분석은 그 이후야.”

“물론입니다. 중요한 것은, 화검자 어르신께서 직접 나서신 이상 화산에서도 이번 종남 사태를 절대 가벼이 보지 않았을 거란 점입니다.”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병력을 지원했다는 뜻이렷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매화창수들의 무공이 매화검수와 별 차이가 없을 거라고 봐도 되겠구나.”

“최소한은요.”

“뭐가 어찌 되었든, 장로 셋과 매화검수 백오십 병력만 해도 충분히 대단하다. 화산에서 엄청 신경을 썼다고 봐야 해.”

섬서 최대 문파 중 하나인 종남을 공략하기 위해 온 놈들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번 전투는 외세인 광신삼교가 처음으로 명성 높은 대문파를 무너트리려는 전투다. 그 심각함과 상징성만큼이나, 전투에서의 승패가 중원의 사기를 가를 것이다.

“현재 후개의 위치는?”

“산양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다소 무리한다면,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종남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벌써 산양이라고? 이미 엄청나게 무리하셨군.”

“예. 강룡무(降龍武)를 전수하셨다고는 해도 이 속도는 정상이 아닙니다. 쉬는 시간도 없이 달려오고 계실 겁니다.”

“얼마나 붙었지?”

“장선단(長仙團)과 십보단(十步團)에서 각기 칠십여 명 정도가 붙었답니다.”

철장개의 눈이 깊어졌다.

“모자라진 않겠지……?”

장선단과 십보단은 개방 본단에서 관리되는 몇 안 되는 정식 전투 부대다.

개개인의 무위를 떠나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 철저히 단련된 이들이니, 실전에서의 활약이 뛰어날 것이다.

문제는 적의 숫자였다.

‘대체 어떤 길로 오고 있는 거냐?!’

이미 적의 병력이 섬서에 도달했다는 것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정보력을 북부에 집중한 뒤에야 놈들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유추라도 할 수 있었다.

‘최소가 오백 이상이다. 최악의 경우 천이 넘어.’

사실상 말이 유추지, 정확성에 있어서 낙제점을 받을 만한 정보였다.

오백 이상에서 천이라면 병력만 두 배 차이다. 이렇게까지 오차가 큰 정보를 다루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기가 막히는군.’

오백이든, 천이든, 이천이든.

그 정도 병력이 섬서에 들어왔다는 걸 몰랐다는 것부터가 치명적이었다. 그렇다고 개방의 섬서 지부가 농땡이나 부리고 있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종남과 화산 사이에서 정보력으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런데도 몰랐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였다.

‘섬서 무림의 주요 단체들이 어디에 밀집해 있는지를 철두철미하게 파악해 두고 있었든지, 그도 아니면…….’

철장개의 눈이 흔들렸다.

‘오랜 시간 꾸준하게, 조금씩 고수들을 섬서에 침투시키고 있었던 거다.’

전자든 후자든, 놈들의 준비성이 철저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이번에 종남이 무너지면, 그때부터는 섬서도 속절없이 무너질 것이다.’

싸움에서 기세와 사기가 지닌 중요성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승리가 불가능한 전투도 불타오르는 사기와 기세만으로 이겨 버린 사건은 역사에서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의 정신력은, 기세는 그렇게나 중요한 것이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사천과 하남에서도 병력 충원을 꾀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철권개가 물었다.

“한데 사부님.”

“공석이다, 이 망할 제자 놈아.”

“쩝, 장로님.”

“뭐냐?”

철권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이 작자들은 누구입니까?”

“그 작자들이 누군데? 문서를 보여 주든 글자를 읽어주든 해야 알아들을 거 아냐?”

“커험! 화웅문(火熊門)이라는 문파 말입니다.”

“아, 그놈들?”

“이름 한번 기가 막히게 지었네요. 불붙은 곰탱이가 개파조사인 문파래요?”

“스스로의 별호를 철권개라고 지은 네놈은 어떻고?”

“다르죠, 그거는.”

“뭐가 달라, 유치한 게 똑같구만.”

“됐고요, 이 사람들은 누구죠?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인데요?”

철장개가 입맛을 다셨다.

“위험한 놈들이다.”

“예?”

“복건성에서 활개 치던 흑도 놈들이야. 물론 말이 활개지, 주변에 드러나지 않도록 자신들을 잘 숨기면서 일대 경제권을 장악했었지.”

“흑도라고요?!”

“그래.”

철권개가 조금 망설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흑도 문파한테 도움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물론 맹부의 동맹이 체결된 이상 쓸데없이 난장을 치진 못하겠지만…….”

“괜찮아. 놈들 우두머리하고는 만나 본 적 있으니까. 능구렁이 같기는 해도, 나름대로 의리도 있고 무공도 강한 놈들이다.”

“얼마나 강하길래요?”

“무공만 따지면, 내가 그쪽 수장과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무(無)에 가깝다.”

“……예? 사부님이요?”

“그래.”

철권개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그렇게 강합니까?”

“그래서 대단한 거다. 후개와 비슷한 연배인데, 그 나이에 무종지벽을 넘었다면 이는 보통 대단한 게 아니야. 게다가 후개에게는 방주가 있었지만, 놈에게는 달리 사부가 없어. 한데도 스스로를 숨긴 채 조직을 관리하고 있었다. 음흉하든 뭐든, 능력 하나는 기가 막힌 놈이다.”

“어, 엄청나군요. 보통 자제심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인데.”

“상황 판단 능력도 수준급이다. 무림맹 의정군이 광동성으로 출정했을 때, 곧장 섬서로 올라와 살림을 꾸렸어. 그간 이뤄 놓은 걸 전부 포기하고.”

“……!!”

“욕심 때문이라도 그러기 힘들었을 것이다. 좋은 책사가 있더라도, 수장이 적기에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의정군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철장개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녀석들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할 만큼 힘든 상황이다. 자세한 건 나중에 듣고, 우선 도주한 사음교의 병력부터 파악해라. 그놈들이 섬서를 빠져나가지 않았다면, 언제고 힘을 회복해서 재차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몰라.”

“아, 예!”

철권개가 나가자 철장개가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조금만 버티자, 조금만.”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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