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79화 (679/963)

◈679화. 피는 어디로 흐르는가 (4)

“저기다.”

화산의 대장로, 용국진인이 종남산을 가리켰다.

“얼마 남지 않았다! 다들 힘을 내라!”

화산에서 종남까지.

섬서 전체를 놓고 보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섬서를 위시한 중원의 성(省)은 작은 나라 하나를 세울 수 있을 만큼 크다.

극한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밤낮을 달리며 회복할 수 있지만, 아직 그만한 경지에 오르지 못한 이들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질주를 화산의 무인들 모두가 정신력으로 버텨 내며 여기까지 왔다. 매화검수들과 창수들의 몸은 땀으로 푹 젖었지만, 그들의 눈빛만큼은 처음 하산했을 때처럼 날카로웠다.

이웃 문파가 위험해서? 자칫 종남이 멸문하면 외세의 공격을 자신들 홀로 받아 내야 할 수도 있다는 중압감 때문에?

그렇지 않다.

“후욱! 너희도 조금만 참아라!”

혁은의 외침에 종남 검사들의 몸에서 희뿌연 수증기가 피어났다.

진기는 거의 고갈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그중 태반이 무리한 내공 운용으로 경미한 내상까지 입었다.

그러나 그들이 발하는 걱정과 분노, 강렬한 의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가고 있었다.

후욱!

뜨겁게 일렁이는 종남 검사들의 열기는 화산의 지원군에게도 인상적인 것이었다.

힘든 와중, 용호진인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지 않소, 사형?”

“그래, 그렇구먼.”

“우리 화산이 무너질 줄 알고 앞뒤 안 가리고 도우러 온 의인들이오. 충만한 협의도 놀랍거늘, 그 먼 거리를 왕복하고도 정신력이 꺾이질 않았소. 체력 이전에 의지의 문제요.”

용국진인이 화산의 무인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저 종남 검사들의 무력은 이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저들의 불타오르는 의지는 냉정한 매화의 기도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성향은 다르지만, 매화검수와 창수들 역시 크게 자극을 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종남에도 인재가 많구나.’

고맙고, 또 안쓰러웠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정신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었다.

용국진인이 화검자에게 말했다.

“사백조님, 아직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듯한데 일각만이라도…… 사백조님?”

화검자의 시선은 저 멀리 북서부를 향해 있었다.

용국진인이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사백조님.”

“……공기가 달라졌다.”

“예?”

화검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공기가 달라졌어. 조금 전과는 분명 다르다.”

“무슨 말씀이신지……?”

화검자 역시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무극에 이르지 못했지만, 선도(仙道)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었다. 동시에 스스로는 신선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알고, 대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의 삶을 선택한 ‘깨달은’ 이였다.

그래서 아는 것이다. 공기가 달라졌음을.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 무신(武神)의 길에 올라선 두 사람이 만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아는 것이다.

무림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 무공이 아니라 선안(仙眼)에 비치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한 사람의 힘이 하늘이 내린 한계를 부수고 법칙을 가지고 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 불려야 마땅한 법.

거리가 한참이나 떨어졌다면 모를까, 격전지 인근에서라면 화검자도 그러한 존재들의 부딪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만나기만 해도 하늘이 숨을 죽이는 이 비정상적인 공기가, 그에게 불길함을 선사했다.

“일각은 무리겠다. 반 각만 쉬도록 하자. 숨만 조금 고르고, 곧장 종남으로 향하는 것이 좋겠다.”

용국진인은 당대 화산의 장로 중에서도 유독 화검자를 존경하는 이였다. 같은 대장로이기도 하고, 용국진인의 성정 자체가 어른들에게 깍듯하기도 했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화검자가 황석태에게 말했다.

“자네는 체력이 남는다면 먼저 종남으로 가는 게 좋겠네. 자네가 지닌 전략적 안목은 저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황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가겠소.”

“그러시게.”

파아악!

화산에 말을 맡긴 채 함께 달려온 그였다. 그의 무공은 일파의 수장급이라 할 수 있을 터, 땅을 박차고 나아가는 그의 기도는 고요하게 꽉 차 있었다.

화검자가 탄식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 * *

“재미있구나.”

차갑게 가라앉은 명극의 얼굴에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네 말인즉슨, 지금 당장 날 따돌린 후, 내가 이끌고 온 병력을 찾아가 공세를 감행하겠다는 뜻인가?”

“별로인 것 같나?”

“별로인 걸 넘어 최악이군.”

명극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네가 움직이면, 나는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나 역시 당장 종남으로 달려가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초토화시킬 수 있다네.”

“그렇겠지.”

“서로의 패를 하나씩 없애자는 건가? 이건 전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전략 전술을 논하려고 온 게 아니야. 네 말마따나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 위해서 온 것이지.”

“자네 말대로 하면 종남은 멸망해.”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진 않을 거야. 엄청난 피해를 보겠지만, 멸망하진 않을 거다.”

“모욕적일 정도의 헛소리군. 자네도 알 텐데? 이 영역에 올라온 이상, 동등한 수준의 고수가 없다면 개개인이 구대문파 하나를 상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여전히 하나지.”

“뭐?”

“너 하나라고. 한 문파를 증발시키는 데엔 개인의 무력보다 집단의 전략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많이 죽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가 돌아갈 때까지 멸망은 못 시켜. 내가 네 병력을 와해시키고 돌아오면, 그때부터 너는 나와 남은 종남의 병력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 거다.”

“희망찬 꿈이구먼. 그게 쉽겠나? 내가 데리고 온 병력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내 집 앞마당에서는 몽둥이로도 화살을 상대할 수 있는 법이지. 너 혼자서 모든 게 가능했다면, 굳이 병력을 끌고 올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

“잊지 마라. 여기는 우리의 터전이다. 침공한 거야 너희 자유지만, 싸움의 흐름까지 너희의 의도대로 흘러가진 않지.”

명극은 말없이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굳이 해가 떨어질 때를 노려 기습을 감행하려는 것도, 종남을 밀지 못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확실하게 뿌리를 뽑기 위해서였다.

조금이라도 뿌리를 남겨 두면 어떤 식으로든 재생할 것이다. 더하여 아군의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 하겠다.

연호정은 바로 그 부분을 날카롭게 찌른 것이다.

명극이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이 옳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너무 무모한 책략이다. 서로의 병력을 소진하면서 끝장을 보자는 건데,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겠나?”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바로 여기였다. 여기가 바로 승부수였다.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지. 아닌 말로, 뒷일만 생각하면 나보다는 너 자신을 걱정해야지.”

“그게 무슨 말이냐?”

“너희의 계략들을 하나하나 부숴 오며 지금 이 자리에 온 것이 나다. 자랑 같지만, 거칠기 그지없는 나를 위해 주는 무림의 위정자들이 많아. 한 번의 실수로 나를 억압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어때?”

“…….”

“너희 사음교, 큰 실수도 한 번쯤은 얌전하게 용서해 줄 만큼 아량 넘치는 조직이었냐? 내가 볼 땐 아닌 것 같은데?”

명극의 볼이 살짝 씰룩였다.

“본교를 너무 거칠게 보는군. 침공당하는 너희 입장에서야 어쩔 수 없겠지만, 본교 역시 자비로운 조직이다.”

“그래서, 나한테 얻어터지고 도망친 그 패배자 놈은 예전처럼 너희 조직에서 땅땅거리며 살 수 있고?”

순간 명극은 할 말을 잃었다.

호연종.

도주하는 그를 마주치면 그냥 죽여 버리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자신이었다.

그것이 바로 사음교다. 자신이 악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사음교의 분위기가 그렇다.

쓸모를 다해도 공이 크면 나름의 대우를 해 준다. 그러나 공이 없으면 그냥 없애 버린다.

놔주는 게 아니라 없앤다. 특히나 크나큰 임무에 실패하면, 거의 무조건 강등되거나 죽임을 당한다. 그것이 사음교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럴 리가 없다.’

명극은 부인했다.

‘나는 교주께서 직접 키운 후계자 중 하나야. 한 번의 실수로 날 내칠 분은 아니지.’

억측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후계자 중 임무에 실패한 녀석 하나는 아직도 교내 일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눈 밖에 난다.’

사음교주는 직접 키운 후계자가 한 번 실수했다고 내칠 만큼 바보는 아니다.

그러나 눈 밖에는 난다. 한 번의 실수가 두 번의 실수를 부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신(神)이란 실수가 없는 존재여야만 한다. 과거의 실수가 도마 위에 오르면, 교주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 후계 싸움에서 승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역시 그렇군.”

명극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종남을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하는 한, 데리고 온 병력에까지 큰 타격을 입고 돌아가는 너를 기쁘게 맞이해 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명극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리자? 내가 그렇게 멍청한 놈처럼 보이나?”

“날리든 말든 알아서 선택해.”

“웃기는 놈이로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누구나 임무의 실패를 걱정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교를 위한 충정은 그대로야.”

“그래?”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받은 명령은 철저히 수행토록 한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너와 종남은 최소한 십 년은 재기 불능으로 만들 자신이 있느니라.”

“눈물겨운 충성심이군. 그래서…….”

연호정이 팔짱을 끼었다.

“시간 벌어 줄래, 아니면 지금 병력 불러서 종남 칠래?”

“…….”

“알아서 선택해라.”

선택이라…….

명극이 말했다.

“나도 하나만 물어보지.”

“언제든지.”

시간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던 연호정은 상대의 질문에 몹시 관대했다.

“진심이냐? 서로의 병력을 박살 내고 최후에 도움을 청하러 가겠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작전 말이다.”

“작전이 아니야. 그냥 맞불을 놓는 거다.”

“그게 우리의 계책들을 다 부숴 놓은 희대의 문제아가 할 말이냐?”

“말 한번 잘했다. 내가 너희의 계책들을 다 깨부술 수 있었던 건 똑똑해서가 아니야. 반쯤 미친놈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

“그리고 나는, 너희와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 어떤 순간에도 미칠 수 있지.”

사실이다.

여유롭게 웃고 있지만, 명극은 연호정의 눈과 목소리에서 진실된 광기를 엿볼 수 있었다.

“자, 선택해.”

이제부터는 압박이다.

“기다려 줄 거냐, 아니면 지금 올래?”

명극은 연호정의 분위기 조절 능력에 내심 감탄했다.

동시에, 조금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자존심을 긁으면서도 제 놈의 선택지를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상대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

‘무공이 아니야. 이놈의 진짜 무기는 천재적인 무공이 아니라, 말 몇 마디로 상대의 선택을 강요할 수 있는 폭압적인 외교 능력이다.’

명극이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언제까지 기다려 주면 되나?”

“내일 동이 틀 때까지.”

“기가 막히는 놈이로군.”

“싫으면 모험을 걸어 봐.”

가만히 북쪽을 바라보던 명극이 그대로 허공에 몸을 날렸다. 봉우리 절벽에서 아래로 뚝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해가 뜨는 순간, 너희는 죽은 목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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