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81화 (681/963)

◈681화. 피는 어디로 흐르는가 (6)

왜일까?

구윤은 생각했다. 세상이 느려진 것 같다고.

그래서인지, 달려드는 사형의 얼굴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주름, 얼굴 윤곽, 표정, 눈빛.

그리고 그 안에 깃든 감정까지.

‘사형.’

구윤은 여광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일말의 불안감은 가지고 있었다. 여광은 강하고 독했지만, 상당히 극단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다만 평소에는 마음을 잘 다스렸고, 다소 오만한 성정을 지녔을지언정 종남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 못지않았기에 휘하 문인들도 여광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존경했더랬다.

그래서 구윤은 느긋해지려 했다.

사형제들끼리는 몰라도, 어린 제자들에게는 어른들의 여러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종남에는 여광처럼 딱딱하고 독한 어른이 있는가 하면, 장문인처럼 협의와 엄정함이 가득한 어른이 있기도 하다는 것을.

그럼 자신은?

천성적으로 다혈질적이면서도 진지하지 못한 자신은 느긋하고 인내심 많은 어른이 되어야 했다. 누구도 그러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삼십 년이 지난 지금, 구윤은 본래 자신의 천성이 어땠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훌륭한 변화였다.

그래서일까?

여광의 저 표정에도, 저 원인 모를 분노에도 차분한 스스로를 느꼈다.

심지어 허리춤에서 뽑아 든 저 검이 자신의 가슴을 노리는 걸 보고 있는 와중에도.

‘대사형.’

구윤은 눈을 감았다.

‘무엇이 사형을 그리 폭압적으로 만든 겁니까.’

대항할 수 없다. 아니, 대항하지 않는다.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고 다짐한 후, 그는 아랫사람에게 욕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악인을 징벌하는 강호행을 할 때도 최대한 악인을 교화시키려 노력했다.

그러한 습관이, 인이 박여 버린 성정이 그의 신체를 통제했다.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쩌어어어어엉!

순간 엄청난 공명음과 함께 살벌한 검풍(劍風)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구윤이 눈을 떴다.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사문에서의 위치가 어떻든 간에.”

담담한 목소리는 이전과 똑같았다.

여광의 검은 구윤의 가슴에 닿지 않았다. 정확히 한 치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그 검을, 연호정이 맨손으로 잡고 있었다.

맨손으로 초절정고수의 검을 쥐었는데도 그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이유 없이 동문을 살해하려 한 이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까드드드득!

좌중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특히 여광의 얼굴에는 놀라움 이상의 경악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검이 휘어졌다.

부러트린 것도 아니고, 힘으로 휘게 했다. 심지어 장문인급의 무력을 갖춘 초절정고수의 공력이 실린 검이었다.

연호정이 여광을 노려보았다.

여광이 흠칫했다.

“종남의 일이니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무림맹 대수로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로군. 당신은 지금 종남의 병력을 책임질 이를 죽이려 하였소.”

“……뭐?”

“미쳤든 어쨌든, 당신의 상황을 고려해 주기에는 선을 지나치게 넘었소.”

쾅!

“컥!”

여광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가 쥔 검은 검병부터 부서져 땅에 떨어졌다. 그 검에 공력을 실은 여광 역시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연호정이 검지를 튕겼다.

퍼버버벅!

여광이 그대로 쓰러졌다.

의식은 있는지 눈은 껌뻑이고 있었다. 하지만 마혈과 아혈이 짚여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연호정이 구윤에게 말했다.

“전투가 코앞입니다. 맹으로 끌고 갈 수는 없으니, 이쪽에서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

구윤이 침음하듯 말했다.

“손속에 사정을 두어 감사하오.”

“감사를 받아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구윤이 홍적을 바라보았다.

홍적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 여광을 들쳐 메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호정이 말했다.

“가둬 둘지 싸우게 할지는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다만, 이것 하나는 명심하십시오. 만약 그를 참전시킨다면, 전투에 해가 되는 언행으로 아군의 사기를 저해시킬 시 전시법(戰時法)에 의거하여 즉결 처형할 겁니다.”

구윤이 한숨을 쉬었다.

“알겠소.”

패율이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이왕이면 가둬 두시오. 괜히 풀어 줬다간 종남 검사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줄 거요.”

구윤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패율이 연호정에게 속삭였다.

“근데 왜 살려 둔 거냐? 이참에 확 날려 버려도 괜찮았을 텐데.”

연호정은 패율을 무시했다.

“이제는 일 얘기나 합시다. 사소한 사건은 잊으십시오.”

“그럽시다.”

문파의 장로가 다른 장로를 죽이려 한 사건이었다. 절대 사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패배하면 종남이 사라진다. 종남 전체의 문제를 생각하면, 분명 사소하다고 할 만한 일이었다.

“화산과 개방에서 병력을 뽑아서 오고 있을 겁니다. 철장개 장로가 말하길 그 외에 친분 있는 문파의 병력도 끌고 오겠다고 했으니, 못해도 오백 이상의 아군이 올 겁니다.”

“원시천존께 감사할 일이오.”

“천하의 원시천존께서도 외부 병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까지 알려 주진 못하실 겁니다.”

어느새 연호정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어린 도동들과 무공을 배우지 않은 학도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두 하산시켰소. 종남의 사람이 아니면 모르는 길이니, 안심해도 좋을 것이오.”

“종남의 검진(劍陣)은 점창과 공동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전투적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이오.”

“적들이 어떻게, 언제 쳐들어올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정 전은 아닐 겁니다. 운이 좋으면 말한 대로 동이 튼 연후에 쳐들어올 테지만,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기습에 취약한 곳을 전부 말해 주십시오. 같이 돌면서 최소한의 전술부터 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붉은 노을이 세상을 뒤덮는 시간이 되었다. 하늘에는 두툼한 반달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도 명극과 혈랑단의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본래라도 지금쯤 움직이기 시작해 자정 전에 도착하여 종남을 공격했을 것이다.

종남은 넓은 만큼이나 고수가 많았다. 하지만 전투 경험이 충분한 고수를 꼽자면 개중 삼 할도 채 되지 않았다.

그것은 종남만의 문제라고 할 순 없었다. 무림 대다수의 문파가 그러할 것이고, 그것이 딱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구파일방의 무공은 실전을 겪지 않아도 강하다. 나아가 일정 경지에 오르면, 실전을 겪어 본 이와의 차이가 무섭게 줄어든다.

눈앞을 스쳐 가는 칼날을 보면서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 기본적으로 도가와 불가의 무공을 기반으로 두어 심신의 조화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무공을 익혔다 해도 대규모 전투는 또 다른 법이었다. 실전을 겪지 않은, 그러나 무공은 충분히 연마한 고수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 주느냐에 따라 이번 싸움의 성패가 갈릴 것이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완연한 밤이 찾아왔다.

세상이 어두워지자 검사들의 긴장감이 무섭게 고조되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에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때, 산문에서 긴장감 넘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구냐!”

황석태가 창과 손을 들었다.

“황석태라고 한다. 연호정 부관, 아니 연호정 대수의 일행이다. 안에 그리 전하라.”

“창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라!”

무척이나 공격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황석태는 순순히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전시 상황이었다. 얼굴을 모르는 무사임에도 공격부터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놀랄 만한 일이었다.

잠시 후.

“황 단주.”

연호정이 직접 산문으로 나왔다.

황석태가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눈 검사에게 말했다.

“이제 검 좀 치워 주지?”

검을 거둔 검사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황석태가 피식 웃었다.

‘괜찮군.’

절도 있는 언행이었다. 긴장감이 다소 과한 것 같지만, 적어도 눈먼 칼에 맞아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주섬주섬 적룡창을 주워 들고 일어난 황석태에게 연호정이 말했다.

“화산은?”

“곧 올 거야. 내가 먼저 출발했지.”

“좋아. 고생했네.”

“그러게나 말이야.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은 적이 없는데.”

황석태가 무릎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나와 함께한다고 참 이 꼴 저 꼴 많이 보지?”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 주게나.”

“그러지. 이번 전투를 무사히 넘긴다면.”

“백주는 안 돼.”

“그건 좀 아쉽군. 일단 가지. 자네 안목이 필요해.”

그렇게 해시(亥時) 중반이 되었을 무렵.

“화산입니다!”

산문을 지키는 검사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화산의 검사들이 지원군으로 왔습니다!”

“우아아아아!”

우렁차게 뿜어져 나오는 목소리가 종남산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화산의 합류는 긴장감 가득하던 종남 검사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마치 산 전체에 거대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충만해진 사기(士氣)가 일시에 군기(軍氣)로 바뀔 만큼 대단한 변화였다.

구윤이 화검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종남의 구윤이 화산의 큰 어른께 인사드립니다.”

화검자가 손사래를 쳤다.

“과한 인사일세. 더 빨리 오지 못해서 미안할 따름이야.”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렇게 와 주신 것만으로도…….”

순간 울컥한 구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화검자의 뒤에는 인연이 있는 화산의 장로 셋과 이백에 가까운 병력이 도열해 있었다.

하나같이 삼엄한 기도가 일품이었다. 그들 모두가 화산에서도 내로라하는 절정고수들, 매화검수들이 분명했다.

개중에는 창을 든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기세 역시 매화검수들 못지않았다.

구윤과 장로들은 감격했다. 아닌 말로, 화산이 침공당했다 한들 종남에서 저만큼의 병력을 파견했을지 의문이었다.

그때였다.

“장로님!”

구윤의 눈이 커졌다.

“아니, 너희들은?!”

혁은과 종남 검사들이 구윤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다행입니다! 저희가 늦지 않았군요!”

“너희는 어디에 있다가 지금 온 것이냐?!”

정신이 없어서 여광과 함께했던 검사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조사하지 못했다.

혁은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처음에는 화산이 적의 표적인 줄 알았다네.”

화검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걸 안 후학들이 곧장 화산까지 달려왔어. 우리를 돕겠답시고.”

“……!”

“안타깝게도 그 표적이 종남으로 바뀌었네만, 이들을 보고 어찌 우리가 애를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말 좋은 제자들을 두셨네.”

구윤이 혁은의 어깨를 꽉 쥐었다.

“잘했다. 그리고 고맙다. 너희가 종남의 정신을 보여 주었구나!”

혁은이 고개를 숙였다.

“허락 없이 움직인 죄는 이번 전투가 끝난 연후에 달게 받겠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오늘 이후, 또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 있다면 누가 제지하더라도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나는, 너희는 그리 가르침을 받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잘했다. 잘 돌아왔어.”

지원군과 소속 검사의 등장은 참으로 반가운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전운은 한층 짙어졌다.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것은 곧, 그만큼 적의 침공 시간도 앞당겨질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더욱더 고조되는 긴장.

그리고 막 자정이 넘은 순간.

“……왔군.”

연호정이 통천부를 들고 일어났다.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화검자 역시 눈을 빛내며 일어났다.

“적이 오고 있는 모양이다.”

구윤이 외쳤다.

“전원 전투 준비!”

차차차차차창!

수백 자루의 검이 뽑히며 찬연한 검광을 피워 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