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4화. 불타는 산 (2)
종남 본산 사도암.
쩌저저저정!
수많은 검과 그만큼의 창검이 부딪치며 화려한 굉음을 일으켰다.
종남 삼장로, 초숙이 외쳤다.
“튀지 마라! 끝까지 진형을 유지해! 압박해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
사도암으로 통하는 길 전체를 봉쇄한 종남 검사들의 숫자는 거의 이백을 헤아렸다. 오십 명씩 하나의 큰 진을 이루니, 무려 네 개의 검진으로 적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종남의 검진은 그 자체로 굳건한 성벽과도 같았다. 나아가 일류의 진법답게 검사들의 진기를 받아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적을 압박했다.
“낙뢰검진(落雷劍陣)과 낙하검진(落霞劍陣)! 둘 사이를 더 조여라!”
쩌어어어엉!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오던 혈랑단의 마인들이 종남의 화려한 검예에 막혀 물러났다.
살짝 떨어져서 종남의 진법을 내려다보던 패율은 내심 감탄했다.
‘대단한 반탄력이군.’
점창의 진법과는 다르다.
물론 점창의 검진 중에도 저처럼 검사들의 내공력을 바탕으로 무형의 반탄기를 일으키는 것이 있었지만, 한없이 사나울 뿐 저처럼 도도하진 않았다.
공격형으로는 점창의 진법이 좋을 것 같지만, 수성을 생각하면 종남의 진법이 몇 수는 위일 듯했다.
더하여, 가장 취약한 사도암에 이와 같은 검진을 친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뚫리면 종남 본산까지 일직선으로 뚫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패율의 눈이 야수처럼 사방을 훑었다.
합동 공격에 관심이 없고 전술적 안목도 황석태보다 부족하지만, 적어도 싸움의 흐름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예민한 사람이 그였다.
‘뚫리지 않는 성벽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겠지.’
패율의 눈이 벼락처럼 혈랑단을 훑었다.
‘강하다.’
그가 보는 혈랑단의 전력은 몹시 강했다.
사도암에 몰린 혈랑단의 수는 삼백을 헤아렸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전력이 청목애 측에 몰려 있었다.
병력을 둘로 나눴는지 셋으로 나눴는지는 알 수 없다. 둘로 나눴다면 사도암과 청목애가 끝이고, 셋으로 나눴다면 초고수들의 감각에도 잡히지 않는 곳에서 또 다른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뭐가 되었든 당장 여기부터 사수하는 게 우선.’
그때, 잠시 주춤했던 혈랑단의 진형이 변했다.
우우우우우!
혈랑단 곳곳에서 늑대가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검사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늑대의 울음소리지만, 평범한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사이한 공력으로 가득 찬 낭소(狼騷)는 정명한 신공을 익힌 검사들의 집중을 무섭게 흔들고 있었다.
사라라라락!
울음소리가 지속되는 와중, 혈랑단의 진형이 뾰족한 형태로 변모했다.
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우!!
낭소가 갈수록 크고 우렁차졌다. 단체로 지르는 게 아니라 돌아가면서 질러 소리가 끊이질 않게 하는 것, 집단전의 한 형태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혈랑단이 진격 준비를 마친 순간.
화아악!
삼장로 초숙의 몸에서 푸른 진기가 솟구쳤다.
“갈(喝)!!”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음파가 혈랑단의 늑대 울음소리를 지워 냈다.
초숙이 외쳤다.
“괴이한 술수에 홀리지 마라! 검심(劍心)은 정심(貞心)에서 오는 법이다! 종남의 가르침을 잊지 말라!”
한껏 힘을 집중하여 터트린 일갈은 흔들린 검사들의 마음을 단숨에 바로잡았다.
우르르릉!
낙뢰검진의 진력이 상승하며 우레와 같은 소리를 냈다.
스르르릉.
낙하검진의 진력이 상승하며 서늘한 칼날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패율은 초숙을 보며 나직이 감탄했다.
‘대단하군.’
순간적으로 적의 음공을 간파, 있는 대로 힘을 모아 일갈하여 돌진하려는 적의 움직임을 막음과 동시에 아군의 검심을 바로잡았다.
경험이 없다면 미리 소리쳐 중구난방의 분위기가 되었을 것이다. 상황을 읽는 판단력이 수준급이다. 사도암의 책임자로 초숙이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차아아앙!
검을 뽑은 초숙이 혈랑단의 첨단부를 가리키며 외쳤다.
“더러운 사마외도의 종자들! 산의 정기가 더럽혀지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들의 피로 산을 물들여 종남의 힘을 만천하에 알려 주겠다!”
우렁찬 목소리는 천둥소리를 방불케 했다. 단순히 내공력이 강한 걸 떠나, 목소리 자체에 강력한 호승심과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적의 기세를 꺾고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에 탁월한 목소리였다.
‘나쁘지 않아.’
패율의 손이 기형검에 닿았다.
‘굳이 이곳에서 힘을 보탤 필요가 있을까.’
그는 연호정과 황석태의 말을 떠올렸다.
‘선배는 논외입니다. 감대로 움직이십시오. 워낙 발이 날랜 분이니, 전장을 누비며 아군 병력에 허점이 생기는 곳을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진을 친 병력은 무조건 내 명령대로 움직일 걸세. 기회를 봐도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야. 하지만 당신은 달라. 당신은 스스로의 판단하에 움직이는 게 좋겠어. 어차피 종남과 화산의 무공에 어우러질 만한 전투술도 아닐 테고.’
패율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청목애 쪽으로 가 봐야…….’
그때였다.
쩌어어어어엉!
살벌한 울림과 함께 초숙의 몸이 비틀거렸다.
“시끄럽다, 늙은이.”
삼백 혈랑단의 우두머리, 삼 조장 평소가 특유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초숙의 눈이 흔들렸다.
창졸간의 기습이라지만, 고작 단검 하나를 던진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자신보다 못하지 않은 무력이었다.
평소가 으르렁거렸다.
“늙은이의 모가지부터 물어뜯어 주마!”
“죽일 놈이!”
초숙이 검에 강력한 내공을 쏟아부으려던 찰나였다.
쩌어어엉!
강궁의 화살처럼 튀어 나간 한 명의 고수가 평소를 밀어붙였다.
평소의 눈이 부릅떠졌다.
‘뭐야?!’
기습자가 하단에서 상단으로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정!
한 번의 휘두름에 네 번의 충돌음이 터졌다. 일검에 발경을 네 번이나 터트린 것이다.
엄청난 쾌공이었다. 검속도 빠르지만, 발경의 생성 속도는 칼 놀림보다도 훨씬 빨랐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올려 친 검을 순식간에 역수로 잡더니, 기괴한 움직임으로 측방으로 이동해 유령처럼 목을 노린다.
그 움직임이 변칙적이고도 빨랐다. 깜짝 놀란 평소는 재빨리 고개를 틀었다.
피슉!
검에 닿지는 않았지만, 검에 실린 발경이 목덜미 쪽 피부를 찢었다.
엄청난 예리함을 지닌 검경이었다.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상처를 쑤시고 들어온 경력이 근육과 신경까지 파괴했을 것이다.
평소의 안광이 붉어졌다.
쾅!
회전이 걸린 단타 일권(一拳)에 기습자가 뒤로 물러났다.
일타필살의 위력이었다. 짧은 순간 발휘되는 가공할 살법, 사음교가 자랑하는 혈랑단의 조장다운 무공이었다.
평소가 버럭 외쳤다.
“넌 또 뭐……!”
번쩍!
말을 이을 새가 없었다.
물러나면서 상체를 회전, 역수로 쥔 검으로 반월을 그리는데, 허공을 가르는 무형의 검기가 단숨에 평소의 빗장뼈를 노렸다.
‘이익!’
평소가 등 뒤에서 두 자루 단창을 뽑아 들었다.
쩌어어어엉!
늑대의 머리가 화려하게 장식된 단창, 낭두쌍창(狼頭雙槍)으로 검격을 막아 냈다.
‘묵직하다.’
순간적으로 방출한 검기인데도 발경에 실린 무게감이 굉장했다.
어지간한 수련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검이었다. 평소가 두 자루 단창을 사납게 휘둘렀다.
퍼퍼펑!
붉은 광채가 번뜩인다 싶더니, 어느새 기습자가 서 있던 땅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스르륵!
마치 따스한 봄바람에 몸을 실은 꽃잎처럼.
우아하기 그지없는 몸놀림으로 낙뢰검진과 낙하검진 앞에 내려서는 한 명의 초고수가 있었다.
손에 들린 검은 소검이라 불릴 만큼 짧았지만, 검폭은 여느 장검보다 훨씬 넓었다. 중원은 물론 새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검형(劍形)이었다.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말이다.”
기형검을 든 검사, 패율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목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 밥에 쇳가루라도 비벼 먹냐? 도저히 들어 줄 수가 없잖아.”
평소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혈랑단은 지금 즉시……!”
“낙뢰!”
초숙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쳤다.
“낙뢰일검세(落雷一劍勢)!”
낙뢰검진을 이룬 검사들이 혈랑단의 첨단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번쩍! 퍼어어엉!
진력이 집중된 검파(劍波)가 혈랑단의 진법 첨단부를 무식하게 뒤흔들었다.
동시에 패율이 재차 평소에게 달려들었다.
쩌저저저정!
두 사람의 창검이 불꽃을 튀기며 부딪쳤다.
평소가 외쳤다.
“돌격해라! 오른쪽 진부터 박살 내 버려!”
퍼어엉!
평소의 몸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패율의 검격을 막아 내면서 명령까지 내렸다. 빈틈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우우우우우!!
잠시 흐트러졌던 혈랑단의 진형이 다시 뾰족한 공격진이 되어 낙뢰검진을 향해 돌진해 왔다.
패율의 눈이 번뜩였다.
딱 봐도 낙뢰검진이 낙하검진보다 사나웠다. 공략이라고 한다면 낙하검진부터 공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평소는 낙뢰검진부터 박살 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안목이 좋군.’
종남의 무공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위력이 강한 만큼 빈틈이 있는 낙뢰검진을 노린 평소의 판단력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죽일 놈!”
우우우우웅!
평소의 몸에서 붉고 사나운 진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일단 네놈부터 죽이고 보겠다!”
패율이 씨익 웃었다.
“바라던 바다!”
파아아악!
탄력 가득한 신법으로 달려든 패율이 회풍검을 구현했다.
쉬이이잉! 쩌엉! 쩌어엉!
바람의 흐름을 담은 검격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사납다. 회전하며 일격, 일격 중첩되는 회풍연환의 검격은 그야말로 절정의 위력을 발휘했다.
‘좌수검(左手劍)?!’
두 개의 단창으로 패율의 검격을 받아 내는 평소의 무공 역시 대단했다. 빠르고 절도 있는 몸놀림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며 흘려 내는데, 체력을 온존하고 최대의 효율을 발휘하는 전장의 격식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갑자기 검을 쓰는 손을 바꾸었다. 단순히 투로의 이점을 살리기 위함은 아닐 터.’
순간 평소의 눈이 패율의 오른쪽 어깨 위로 삐죽 튀어나온 몽둥이를 포착했다.
평소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드리워졌다.
파아아아악!
스물다섯 번의 검격을 하나하나 분쇄한 평소가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혔다.
패율의 눈이 빛났다.
‘좋아!’
파악!
단숨에 등 뒤로 손을 뻗은 그가 단창을 뽑아 평소의 머리통을 향해 그대로 찍어 내렸다.
그때였다.
‘……?!’
평소의 상체 움직임이 미세하게 틀어졌음을 직감한 패율은 재빨리 몸을 틀었다.
촤아악!
낭두창 하나가 그의 어깨 의복을 베고 지나갔다. 피하지 않았다면 좌측 어깨가 통째로 날아갈 뻔했다.
패율의 눈이 흔들렸다.
‘이놈, 내가 창을 뽑는 박자를 읽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파아아아악!
후속타를 포기한 평소가 단숨에 혈랑단의 후미로 따라붙었다.
콰아아앙! 쩌저저저저정!
혈랑단과 낙뢰검진이 부딪치며 무시무시한 폭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평소가 단원들의 어깨를 밟아 가며 초숙을 향해 달려 나갔다.
패율이 아니라 초숙을 노린다. 패율 역시 잡아 죽이고 싶은 건 매한가지였지만, 이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선 적장인 초숙부터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쿵!
매서운 진각과 함께 패율이 단창을 쏘아 냈다.
번쩍! 콰앙!
평소가 초숙을 공격하는 그 순간을 노린 단창이 대지에 박혀 들며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크윽!”
“으음!”
달려들던 평소도, 방어를 준비하던 초숙도 신음을 흘리며 제각기 옆으로 몸을 날렸다. 패율의 단창이 평소의 공격 흐름을 끊어 버린 것이다.
패율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파바바바박!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려던 패율이 순간 방향을 바꾸어 혈랑단의 공격진 측면을 들이받았다.
퍼어어엉!
혈랑단원 두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패율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나와 싸우지 않고 간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쩌저저정! 퍼억!
사나운 검격에 또 다른 혈랑단원 하나의 목이 하늘 높이 날아갔다.
평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치사한 자식이!”
“전쟁 중에 치사는 무슨! 열 받으면 이리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