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86화 (686/963)

◈686화. 불타는 산 (4)

푸화아악!

붉은 선혈이 대지에 흩뿌려진다.

청목애의 절벽 정면을 타고 오르는 늑대들, 좌우에서 벽을 타고 빠르게 접근하는 늑대들.

그 수가 무려 오백이 넘었다.

게다가 그들 하나하나가 검붉은 전포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평범한 성인 남성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많다.’

종남의 사장로, 동권의 눈이 흔들렸다.

‘많고 강해. 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이!’

쉬이이익! 쩌어엉!

검사 몇 명이 절벽을 향해 검기를 쏘아 냈다.

벽이 부서지면서 혈랑단원 셋이 추락했다.

동권이 외쳤다.

“벽을 노리지 마라! 벽이 부서지면 오히려 우리에게 불리해!”

터어어엉!

동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십여 명의 혈랑단원이 부서진 절벽 부위를 밟고 엄청난 속도로 올라왔다.

그 몸놀림이 실로 대단했다. 마치 짐승을 연상케 한다고 할까

절정의 무공을 배웠다고 모두가 그와 같은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을 터, 혈랑단은 근본적으로 이런 지형에서도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은 모양이었다.

차아앙!

검을 뽑아 든 동권이 그들을 향해 검을 내리치려 할 때였다.

퍼어어어어엉!!

일순 강렬한 폭음과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청목애 절벽 위로 날아왔다.

동권의 눈이 흔들렸다.

‘철망?!’

사방 십여 장을 뒤덮을 만큼 거대한 크기의 철망이 무려 세 개나 날아오고 있었다. 마치 화포로 쏘아 낸 듯, 그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섬뜩한 것은 철망을 이루는 재질이었다.

일반 철망보다 훨씬 더 얇고 촘촘하다. 밤이라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어두운 밤, 절정고수 수준의 안력과 예민함이 아니면 쉽게 발견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잘라 내야 한다!’

동권이 성라검법(星羅劍法)을 구현하려는 찰나였다.

번쩍!

붉은 광망이 이글거린다 싶더니, 묵직한 창풍(槍風) 세 줄기가 각 철망의 중앙 부위를 노리고 쏘아졌다.

펑! 펑! 펑!

창풍이 폭음을 내며 터졌다. 그러자 쏘아진 철망 세 개가 그 자리에서 회전하다가 저 멀리로 훨훨 날아갔다.

동권이 뒤를 돌아보았다.

황석태가 적룡창을 거두며 말했다.

“망을 함부로 자르려 하지 마시오! 밀어 내거나 터트려서 접근 자체를 봉쇄해야 하오!”

생의 절반 이상을 집단전으로 보낸 그였다. 저런 종류의 철망이 얼마나 질긴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동권이 물었다.

“검기로도 잘리지 않는 건가?!”

“그걸 모르니 베지 말라는 거요! 자칫 잘못하다간 잘린 상태로도 덮쳐 올 수 있소!”

동권은 황석태의 말을 즉각 이해했다.

‘실수했구나.’

흑도 사파는 저런 암기류를 크게 발달시켰다. 어떤 것들은 당가의 암기보다도 더 악랄하기도 했다.

그런 것을 상식적으로 대처하려 했다니, 실수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동권은 정신을 똑바로 다잡았다.

그때였다.

퍼어엉!

청목애의 절벽 위쪽으로 강력한 장력이 쏘아졌다.

뒤흔들리는 절벽, 와중에도 절벽을 타고 오르는 혈랑단원들의 움직임에는 미동이 없었다. 거미처럼 벽에 붙어 올라오는 그들의 움직임은 또 하나의 신기(神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시작됐군.”

황석태의 눈이 번뜩였다.

절벽이라고는 하지만 청목애는 그리 높지 않았다. 경험 많은 일류고수라면,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차 몇 모금 마실 시간에 오를 정도였다.

혈랑단의 등반을 이 정도로 막아 낸 것도, 종남 검수들의 검법이 위협적인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투 양상이 달라졌다.

‘이 정도 장력이라면 종남 장로급에 비해도 부족함이 없다.’

황석태가 보는 곳에는 세 명의 고수가 모여 있었다.

사나운 혈랑단의 기세 속에 절묘하게 섞여 들어 있어 수준을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황석태의 예민한 안목은 그들 셋이 바로 오백 혈랑단의 대장들이라는 걸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허공을 격한 장법으로 이곳의 대응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퍼퍼펑!

혈랑들 틈으로 파고들면서도 순간순간 장력을 쏘아 내 종남의 검진을 뒤흔든다.

“이익!”

동권이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번쩍!

밤하늘의 별 무리를 지상으로 끌어내린 듯하다. 빛나는 검기의 그물이 혈랑단 한복판으로 쏘아졌다.

그때, 거대한 검 한 자루가 압도적인 움직임을 발했다.

쾅!

성라검의 검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동권의 눈이 커졌다.

몰려드는 늑대 떼, 누가 누구인지 파악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 속에 강력한 고수가 있어 자신의 검기공을 한순간에 흩어 냈다.

‘이럴 수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받은 게 있으면 그만큼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

번쩍!

한 줄기 큼직한 단창이 허공을 격하고 쏘아졌다.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분명한 것은, 날아오는 단창의 힘과 속도가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합!”

오장로 신휴가 천둔장법(天遁掌法)으로 날아오는 단창을 쳐 냈다.

퍼억!

신휴의 눈이 커졌다.

단창을 쳐서 날려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방향이 살짝 틀어졌을 뿐인 단창은 후미에 대기 중인 검사 하나의 복부에 박혔다. 검사가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이……!’

무시무시한 관통력이었다.

속도가 빠른 물체일수록, 작은 힘으로도 궤도를 바꾸기 쉬운 것은 상식이었다. 하지만 저 단창은 달랐다. 그리 빠르면서도 강력한 힘으로 무장되어 있어, 천둔장법의 힘으로도 궤도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후미에 대기 중이던 검사들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황석태가 외쳤다.

“부상자를 뒤로 빼라! 당황하지 마! 이곳은 전장이다!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

황석태의 낭랑한 음성이 검사들의 마음을 일깨웠다.

동료가 치명상을 입었지만, 그 때문에 당황해서는 안 된다. 화가 나도 다스려야 했고 슬픔도 억눌러야 했다.

“마음을 다스려라! 흔들리는 순간 끝이다!”

진심 가득한 외침으로 검사들을 독려한 황석태가 동권을 바라보았다.

황석태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권이 외쳤다.

“용음(龍吟)!”

스르륵!

넓게 퍼진 진법 중앙에 길이 열리고, 중년 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번쩍! 퍼억!

기다렸다는 듯 쏘아진 단창에 도사 하나가 쓰러져 버렸다. 쓰러진 도사의 가슴팍에는 굵직한 단창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동권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출수(出手)!!”

중년 도사들이 양손을 휘둘렀다.

삐이이익!

시원하고도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수십 자루의 비수가 곡선을 그리며 절벽 중앙으로 쏘아졌다.

손을 휘두른 방향은 사선인데, 정작 쏘아진 비수는 휘어져 절벽 중앙으로 날아든다. 보고도 믿기 힘든 암기술이었다.

퍼버버버벅!

혈랑단원 열다섯이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절벽을 타고 오르는 적의 수만 백이 넘었다. 그중 열다섯이라면 별것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공격은 그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음!”

비수를 날렸던 중년 도사들이 뒤로 빠지고, 그 자리를 또 다른 도사들이 채웠다.

“출수!”

삐이이이이익!

이전보다 더 많은 수의 비수가 절벽 곳곳으로 쏘아졌다.

퍼버벅! 쩌어엉!

다시 이십여 명의 적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중 절반은 죽지 않았지만, 절반은 등뼈나 목덜미에 비수가 박혀 즉사를 면치 못했다.

황석태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상당하구나.’

종남의 용음비(龍吟匕)라는 무공이었다. 칼날 중앙에 세 개의 구멍이 뚫린 비수가 날아갈 때 내는 시원한 소리와 방향을 예측기 어려운 공격력이 특징이었다.

구파일방은 수많은 무학의 보고였다. 종남처럼 비도술을 지닌 문파도 있으며, 배운 이는 거의 없지만 독공(毒功)을 다루는 도사들도 있었다.

평소에는 자신이 배운 무공을 드러내지 않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큰 활약을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독을 묻혔으면 더 좋았겠지만.’

용음비에 대해 들은 황석태는 구윤에게 비수에 독을 바를 것을 권했다.

하지만 구윤은 그것을 거부했다.

‘위급하다 하여 비수에 독까지 바를 수는 없네. 자네가 보기엔 답답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선(線)이야.’

구윤의 말대로였다. 황석태는 그들이 답답했다. 생사가 갈리는 전장에서 체면 때문에 독을 쓰지 않는다는 건 분명 배부른 소리였다.

동시에 그는 구윤의 말을 이해했다. 선이라는 단어를 이해했다.

위기의 순간에도 자신들만의 확고한 원칙을 지키기 때문에 강한 것이다. 구파일방 모두가 그럴 것이고, 흑도에도 그런 문파가 있었다.

황석태가 외쳤다.

“다시 방진!”

파바박!

비수를 날린 도사들이 모두 후방으로 빠지고, 열렸던 진의 중앙이 다시 검사들로 채워졌다.

그때였다.

피피피피핑!!

혈랑단 후미에서 수십 개의 불화살이 쏘아졌다.

동권과 신휴의 눈이 흔들렸다.

“이런!”

당황한 그들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화살은 절벽 위 검진을 향해 쏘아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사거리가 엄청나게 길어서, 그들을 한참이나 지나쳤다.

‘왜?’

그때, 황석태가 외쳤다.

“후미 검사들은 화살을 쳐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사들이 검기를 날려 댔다.

퍼버버벅!

화살 중 삼 할이 부서져 땅으로 떨어졌다. 남은 칠 할은 그대로 종남 본산 인근으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앙!! 콰콰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거대한 불길이 솟구쳤다.

“폭약! 폭약이다!”

폭약 달린 화살이었다. 정확히는 암기의 일종인 수전(手箭)으로, 기름과 화약 주머니를 함께 달아 놓은 것이었다.

황석태가 버럭 외쳤다.

“당황하지 말라고 하였다! 후방으로 물러나지 마! 자리를 지켜라!”

후우웅!

그때, 바람이 불어왔다. 종남 검사들이 혈랑단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불어오는 역풍이었다.

‘이런!’

그렇다.

화살과는 달리 수전을 쏘아 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놈들은 그것을 검사들을 향해 쏘지 않고 한참 떨어진 곳으로 쏘아 내 불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불길이 역풍을 맞아 종남 병력 쪽으로 열기를 전달했다.

이 싸움터 자체를 봉인해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황석태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검사들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당황이 내려앉았다.

말한다고 다스릴 수 있을 만한 감정이 아니다. 심지어 몇몇 검사들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실질적인 피해를 주는 것보다 이곳의 사기를 뒤흔드는 것을 택했다.’

대담한 전략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겠지.’

황석태의 예상대로였다.

파바바바바박!

종남 검사들이 당황하는 사이, 마침내 세 명의 고수가 엄청난 속도로 절벽을 뛰어 올라왔다.

‘정확하게 알고 있구나!’

무림인들의 전쟁이란 바로 이와 같다.

사기도 중요하고, 병력의 질도 중요하며, 환경도 중요하다. 전략 전술?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고수와 하수 간의 격차가 분명한 무림인들은 병법보다도 순간의 박자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떤 박자인가?

바로 고수가 투입하여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박자였다.

콰아앙!

절벽을 사선으로 꿰뚫은 거대한 검날에 막강한 발경이 폭발했다.

절벽 끝, 이 장 너비의 땅이 와르르 무너졌다. 파괴력 넘치는 검법에 종남 검사들이 일제히 당황했다.

그리고 그 너머.

마침내 진짜 고수들이 등장한다.

사람 몸뚱이만 한 거검(巨劍)을 든 일 조장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활을 든 이 조장, 그리고 칼날 달린 비갑(臂鉀)을 장착한 사 조장이었다.

하나하나가 무종을 돌파한 진짜 고수들이다. 전투의 흐름을 읽고 적절한 등장 순간을 포착한 적장들이 마침내 청목애로 올라온 것이다.

일 조장, 화한이 외쳤다.

“모두 죽이겠……!”

그때였다.

쩌저저저저정!

엄청난 검력의 소용돌이를 막아 낸 화한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황석태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어느새 그의 앞에 나타난 용호진인의 얼굴 곳곳엔 검댕이 묻어 있었다.

“빈도가 너무 늦진 않았나?”

“늦었소!”

“초면에 너무하는군.”

황석태가 외쳤다.

“진을 빼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종남 검사들이 뒤로 빠지고, 동권과 신휴, 용호진인이 튀어 나가 이 조장과 사 조장을 향해 검장(劍掌)을 휘둘렀다.

“장로 셋은 궁사(弓師)를 공격하시오!”

황석태가 단숨에 거리를 좁혀 사 조장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콰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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