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4화. 흐름을 바꾸는 자 (5)
“크윽!”
비틀거리는 명극의 얼굴은 창백했다.
기어이 연호정에게서 빠져나간 그다. 하지만 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부러졌다!’
좌측 어깨뼈가 완전히 부러졌다.
도화천신인을 운용하느라 천신갑으로 몸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천신기가 온몸을 돌며 막강한 방어막을 구축하고 있거늘, 그조차 뚫고 들어온 공격에 어깨가 부서져 버렸다.
‘아니, 그게 아니야.’
우우우우웅!
부서진 어깨에서 은은한 황금빛 진기가 흘러나왔다.
그 진기가 이전에 비해 불안정해졌다. 연호정이 자신의 손목을 통해 침투시킨 발경으로 인해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발경을 해소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진기의 방패가 회수되었다. 그 틈을 노린 강력한 화살 한 발이 그의 좌측 어깨를 깨부숴 버린 것이다.
우두둑! 우두둑!
명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화천신기가 빠른 속도로 부러진 어깨를 맞췄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부서진 뼛조각이 많아서 하나하나 수거해 맞춰야 하는데, 긴박한 상황에서 급하게 하다 보니 신경을 건드리고 혈관을 상하게 했다.
‘제기랄!’
나아도 이전처럼 왼팔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우우우우웅.
십여 장 거리를 벌려 좌측 어깨를 봉한 명극이 연호정과 그 옆에 내려선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연 공자! 괜찮아요?!”
“쿨럭!”
피를 토하는 연호정의 얼굴은 명극만큼이나 창백했다. 도화천신인이 담긴 수도 절반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스르르륵.
광명신단의 힘을 받은 청룡기가 내부로 침투한 발경을 해소하고 간장의 능력을 활성화시켰다.
우둑!
뚫린 피부와 근육을 진기의 힘으로 닫아 버렸다.
복부에 칼을 맞으면 내장이 튀어나와 죽는다. 복압이라는 건 사람이 막연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상한 오장육부는 나중에 고치고, 열린 복부부터 진기로 닫는 게 우선이었다. 현무기와 청룡기라면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몸을 보호해 줄 것이다.
입가를 닦은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잘 와 줬다. 아슬아슬했어.”
“제기랄! 복부가 뚫렸잖아요!”
“싸울 수 있어. 이 정도로는 죽지 않아.”
“어떻게 만날 그 모양……!”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묵비가 이내 이를 악물고 시위를 당겼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초고수가 앞에 있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묵비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적장인가요?”
“그래.”
츠츠츠츠츠.
명극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묵비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급하게 오느라 명극의 기세를 느낄 새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에야 비로소 상대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고수인지를 알 수 있었다.
‘괴물이다!’
구파 장문인급의 무력을 지닌 묵비조차도 감히 가늠해 볼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이였다.
말 그대로 무신(武神)의 경지다. 내공 소모가 극심한 데다 심각한 내외상까지 입었는데도, 전신에서 어우러져 나오는 기세가 가히 파멸적이었다.
‘세상에 저런 경지가……!’
흔들리는 전의(戰意), 식어 버리는 투쟁심.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얼마나 다쳤든, 얼마나 손해를 입었든 차원이 다른 고수가 발하는 존재감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긴장 풀어.”
연호정이 묵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우웅.
사신기가 아니었다. 광명신단의 순수한 진기가 그녀의 몸으로 파고들어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았다.
묵비가 서둘러 말했다.
“괜찮아요! 괜히 내공을 소모하지…….”
“어디서 훈수야? 하수가 고수한테 훈수하는 거 아니야.”
부상자가 무슨 헛소리냐고 말하려던 묵비는 순간 깜짝 놀랐다.
‘연 공자도?!’
후욱!
명극의 기세가 창날처럼 날카롭다면, 연호정의 기세는 낮게 깔리는 안개와 같았다.
기질은 확연히 다르지만, 이룬 경지는 비슷하다. 묵비는 연호정의 편안한 존재감 속에서 명극이 이룬 지고(至高)의 무력을 엿볼 수 있었다.
묵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 언제?!’
연호정이 말했다.
“집중해. 놀랄 때가 아니야.”
“네? 아, 네!”
“이건 전쟁이다. 치사하고 자시고를 따질 때가 아니야.”
연호정이 어깨를 살짝 돌렸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만, 그의 투기는 더더욱 살아나고 있었다.
“빈틈이 보이면 주저 없이 쏴라.”
스르륵.
연호정이 천천히 명극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묵비가 말했다.
“연 공자.”
“음?”
“이거요.”
묵비가 등에서 거대한 도끼를 풀어 던졌다.
연호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끼를 잡았다.
사태가 급박하여 적과 연호정의 존재감을 읽지 못했던 묵비처럼, 연호정 역시 묵비의 등에 달린 반가운 친구를 인식하지 못했다.
‘오랜만이군.’
무겁다.
무겁지만, 묘하게 힘이 넘친다. 통천부와 비슷한 무게인데도 왠지 더 가볍게 느껴지는 듯했다.
‘잘 있었냐.’
연호정이 광룡부의 도끼날을 매만졌다.
후우우웅.
서슬 퍼런 도끼날은 여전했다. 백 년, 아니 천 년이 지난다 한들 무뎌질 것 같지 않은 도끼날이었다.
신병이기 광룡부.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금 주인의 손에 들어오니, 병기도 기쁨을 느끼는지 스스로 울음을 터트렸다.
‘좋구나.’
스르르륵.
땅을 뒹굴던 흑백쌍룡부가 저절로 떠올라 그의 허리춤으로 돌아왔다.
‘네 친구들도 좋지만, 역시 승부를 결정짓는 데엔 네가 제격이지.’
견갑에 광룡부를 걸친 연호정이 명극을 바라보았다.
명극이 비틀린 표정으로 말했다.
“준비는 다 됐나?”
“기다려 준 건가?”
“그러게 말이다. 내가 왜 기다려 줬을까.”
“헛소리 말아라. 덤벼도 끝장낼 자신이 없으니 기다렸겠지. 겸사겸사 작살난 어깨도 매만지고 말이야.”
“…….”
“여기까지 왔는데, 도망치지는 않겠지?”
“그게 네놈이 할 말이냐? 아군까지 끌고 와서.”
“전쟁이니까.”
“전쟁이니까 도망쳐도 수치는 아니겠지.”
“그래서 널 도발하고 있는 거다. 도망치지 말라고. 하긴, 아까부터 넌 날 무서워했지.”
명극이 피식 웃었다.
코웃음을 쳤지만, 연호정의 도발이 먹혀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자존심을 세우진 않지만, 한번 상한 자존심은 복구해야만 한다. 그것은 임무를 떠난 문제였다.
‘저놈을 박살 내지 않는 한, 살아서 돌아가도 난 여전히 패배자가 될 거다.’
스르륵.
명극이 자세를 낮추었다.
부서진 왼팔은 움직일 수 없었다. 내상도 심각했다.
하지만 그건 연호정도 마찬가지였다. 복부가 뚫리는 중상을 입었고, 내상의 정도는 오히려 명극보다도 심했다.
때가 왔다.
마침내 이 기나긴 무신들의 싸움이 끝날 때가 온 것이다.
명극이 말했다.
“재미있었다. 중간중간 기분은 나빴지만.”
“난 재미없었어, 빌어먹을 자식아. 저승에 가서도 애들은 노리지 마라.”
후우우우웅!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의 의복을 희롱했다.
묵비가 살짝 침을 삼켰다. 두 무신 사이로 흐르는 긴장감이 엄청났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파아악!
명극이 움직였다.
착공비보, 특유의 기묘한 움직임으로 연호정에게 접근하는 그의 오른손에서 황금빛 칼날이 번뜩였다.
연호정이 기합을 질렀다.
“으압!”
쩌저저정!!
명극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화려한 흑색 보병(寶兵), 미쳐 날뛰는 용부(龍斧)의 위력은 통천부와 완전히 달랐다.
“크윽!”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명극.
먼저 공격을 감행했는데도 밀렸다. 그만큼 광룡부의 힘이 강했던 것이다.
주르륵.
연호정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힘은 강했지만, 반탄력을 그대로 받았다. 내상이 심화되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어딜!’
쾅!
빠지는 힘을 진각 한 방으로 돌려놓은 연호정이 그대로 명극에게 돌진했다.
쐐애애애액!
크게 휘둘러지는 광룡부.
크고 시커먼 도끼날에 백색의 돌풍이 휘몰아쳤다. 호왕구벽세, 호조요란의 절초가 명극을 집어삼켰다.
쩌저저저저정!
도화천신인의 칼날은 분명 천하일절이라 할 만했다.
가공할 백호공의 힘을 모조리 튕겨 내고 있다. 압력을 버텨 내는 몸은 축나고 있었지만, 선명한 칼날은 조금도 희미해지지 않았다.
부우우웅! 퍼억!
빈틈을 노린 명극의 각법이 연호정의 복부에 박혔다.
연호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상처에 맞진 않았지만, 복부에 박힌 것만으로도 기껏 닫아 놓은 상처가 입을 벌리려 했다.
퍼어억!
광룡부의 창대가 명극의 좌측 어깨를 후려쳤다.
명극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애써 봉해 두었던 어깨뼈가 다시 산산이 조각나 흩어지고 있었다.
“으아아아!”
촤아악!
사선으로 내리치는 도화천신인. 연호정의 상체에 깊은 자상이 생겼다.
부웅!
연호정의 공격은 집요했다. 기어이 명극의 천신인을 튕겨 내더니, 온몸을 휘둘러 내리찍은 광룡부로 그의 좌측 어깨를 통으로 잘라 버렸다.
퍼어어억!
명극의 눈이 흔들렸다.
어차피 못 쓰게 된 어깨라지만, 이렇게 절단이 나고 보니 엄청난 상실감이 몰려왔다.
“이놈!”
퍼버버벅!
천신권의 권타가 연호정의 상체에 세 방이나 작렬했다.
피를 토하며 물러나는 연호정, 분노한 명극이 재차 착공비보를 운용했다. 단숨에 따라잡아 명을 끊어 놓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
움직임이 어색했다.
평소라면 모를까, 한 줌의 힘밖에 남지 않은 지금 사라진 왼팔로 인해 균형 감각까지 상실했다.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그의 발은 어느새 묵비를 향해 있었다.
명극, 연호정, 묵비.
세 사람의 눈빛이 동시에 돌변했다.
파아아아악!
혼신의 힘을 다해 질주하는 명극.
묵비가 시위를 놓았다.
피유우우웅!
쏘아진 화살을 절묘하게 피한 명극은 어느새 묵비의 일 장 거리 앞에 도달해 있었다.
기가 질리는 속도였다. 묵비가 용비순행을 펼쳤다.
터어어어엉!
신법의 속도만 생각하면 명극이나 묵비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명극에게는 묵비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
묵비는 깜짝 놀랐다. 땅을 박차는 발이 엇박자로 나가며 신법의 속도가 느려진 것이다.
명극의 도화신안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되는 극상의 깨달음이었다.
화아악!
명극의 손이 묵비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대응할 시간도 없었다. 묵비가 최대한 상체를 뒤로 젖히며 발을 휘둘렀다.
그때였다.
촤르르르륵!
“컥!”
엄청난 속도로 날아든 교룡쇄가 명극의 목을 휘감았다.
촤악!
묵비의 목에 생채기가 났다. 명극의 손톱에 피부가 찢어진 것이다.
파아아악!
묵비에 각법에 맞아 교룡쇄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명극이 허공을 날아 땅에 내리꽂혔다.
그 위로, 흑색의 몸체를 지닌 미친 용이 허연 폭풍을 이끌고 내려섰다.
콰르르르릉!!
놀라운 대응이었다.
광룡부로 내공을 전달하는 순간, 교룡쇄의 힘이 약해졌다. 귀신처럼 그 찰나의 순간을 읽은 명극이 기어이 우측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명극은 깨달았다.
자신이 잘못 피했음을.
좌측 어깨가 비었으니 자연히 오른쪽으로 무게가 실린다. 그 본능에 따라 오른쪽으로 회피했다.
그리고 상대는.
과거 암흑의 시대를 지나, 새로운 세상의 무신(武神)으로 돌아온 실전의 화신은 그것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화아아아아악!
수십 줄기의 백색 폭풍을 두른 연호정이 명극을 향해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다.
백호공, 호왕구벽세.
마지막 초식 백왕진천무(百王振天舞).
악신의 비호를 받는 허연 야수의 이빨을 보며, 명극이 눈을 감았다.
퍼버버버버벅!
명극의 몸이 산산이 찢겨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