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95화 (695/963)

◈695화. 승패는 없었다 (1)

“쿠웨에엑!!”

토혈하는 연호정의 상세가 심상치 않았다.

“연 공자!”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다가온 묵비가 연호정을 부축했다.

연호정의 눈이 흐릿해졌다.

‘묵비인가.’

등을 만지는 건지, 어깨를 잡는 건지 모르겠다.

온몸이 뜨거웠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전신을 뒤덮는 고통은 선명했다. 덕분에 기절하진 않았지만, 그게 좋은 일인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역시 무리였다.’

마지막으로 쏟아부은 백왕진천무의 초식은 지금 몸으로 발해서는 안 될 공격이었다.

그것은 백호공만이 아닌 주작공, 현무공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청룡공의 경우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펼칠 수 있지만, 나머지 삼신공(三神功)의 마지막 초식들은 근골에 극심한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하물며 팔십 근이 넘는 광룡부를 휘두른다면 더더욱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무극에 오르기 전에는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무극에 올랐기에 진정한 위력을 발하는 것. 그래서 더더욱 몸에 무리가 가는 거다.’

애써 무공을 분석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고통을 잊으려 했다.

독하기로는 누구 못지않은 연호정조차 외면하고 싶을 만큼 극심한 통증. 어지간한 독종이라도 고통 때문에 목숨이 끊어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손톱만큼도 남지 않은 광명신단의 기운을 어떻게든 끌어 올려 주천을 시도했다.

‘쏟아붓지 않았다면 죽이지 못했을 거야.’

광룡부라는 희대의 병기 덕에 놈의 육장검과 맞설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패배했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광룡부는 그 위력이 뛰어난 대신 몸에 걸리는 부담이 컸다. 평소의 몸이라면 부담될 일이 전혀 없지만, 목숨이 간당간당한 지금은 광룡부의 무게부터가 큰 부담이었다.

즉, 마지막 싸움은 연호정에게도 모험이었다는 것이다. 체력과 내공을 갉아먹지만 확실한 위력을 발휘하는 광룡부를 써서 상대를 잡아내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천만다행히도 그 도박은 성공했다.

스르륵.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던 연호정은 일순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벌어졌군.’

명극의 도화천신인에 찔린 복부의 상처가 조금씩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연호정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일 났구먼.’

내공으로 봉쇄하는 것도 한계가 왔다. 지금 광명신단의 힘으로는 상처를 묶어 두기는커녕 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망할, 어쩌지?’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웅!

명문혈에서부터 흘러 들어오는 진기가 연호정의 몸에 조금씩 활기를 불어넣었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이 기운은?’

익숙한 진기였다.

기의 성질은 미묘하게 달랐지만, 색은 똑같다. 과거 흑암제 시절 사신공의 바탕으로 익힌 홍천기의 기운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묵비였다. 묵비가 자신의 몸에 진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이다.

‘미친! 뭐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행위다.

물론, 내공력이 극에 이르면 타류의 내공심법을 익혀도 진기를 도인할 수 있는 법이다.

묵비 역시 비슷했다. 그녀의 진기는 순정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순수함에 있어서만큼은 누구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무극의 고수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연호정의 내공은 묵비의 내공보다 몇 배는 더 짙은 농도를 지녔다.

당연히 몸도 진기에 맞춰 발달했으니, 절정고수의 내공을 다 쏟아붓는다 한들 일 푼도 회복하기 어렵다.

‘그만해! 잘못하면 잡아먹힌다!’

우우우우우웅!

의지로는 막을 수 없다.

호흡으로 들어오는 기가 충분치 않은 상황, 연호정의 몸은 명문혈을 통해 들어오는 기를 환영하며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연호정의 몸에서 희뿌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런!’

천천히, 아주 천천히 회복되고 있다.

하지만 그 회복 속도가 묵비의 내공 소모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십을 주면 못해도 육, 칠은 회복해야 할 텐데 십분지 일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묵비의 내공이 고갈될 것이다. 내공이 강제로 고갈되면, 그녀의 생명이 위험해진다.

‘그만!!’

소리 없는 외침.

그때였다.

“괜찮아요.”

묵비의 음성이 연호정의 귓가를 울렸다.

“내공력은 당신을 따라갈 수 없어도, 양만큼은 비빌 수 있을 거예요.”

실제로 관일곡에서 막 나왔을 당시, 그녀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내공이 잠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심신이 지쳤으니 이성적인 판단이 되질 않겠죠. 나도 도가 지나치는 모험은 하지 않아요. 적절한 때에 끊어 낼 수 있으니, 일단 복부의 상처부터 막아요.”

순간 연호정은 정신이 번뜩 드는 걸 느꼈다.

그렇다. 걱정한다고 그만둘 묵비도 아니고, 애초에 그녀는 만용을 부리는 성격도 아니었다.

‘잊고 있었구나.’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묵비 말마따나 심신이 정상이 아니어서일까.

묵비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어 줄 만한 사람이지만, 이런 일로 허무하게 목숨을 버릴 만큼 바보도 아니다.

게다가 그녀의 경지는 못 본 사이에 더더욱 깊어져 있었다.

‘믿자.’

묵비를 믿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 나타나 자신을 도와준 아군을,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궁사를.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번쩍!

느릿하게 혈도를 주천하던 광명신단의 기운이 명문혈로 몰렸다.

훅!

묵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일순간 빼앗아 가는 내공량이 굉장했다. 의지가 이는 순간, 개울가 물줄기처럼 흐르던 내공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다.’

이 정도로 방대한 내공을 가져가는데도 빠르게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

그만큼 연호정의 육신이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큰 힘을 품은 만큼, 온전한 상태로 만들기가 힘든 것이었다.

‘괜찮아. 절대의 내공에, 축기 한정으로는 최고라는 홍천기까지 있어. 너끈히 버틸 수 있다.’

묵비가 내공 침투에 박차를 가했다.

츠츠츠츠츠.

조금씩 벌어지려 하던 연호정의 상처가 다시 붙기 시작했다.

고통을 없애는 것보다 상처를 막는 것을 우선시했다. 초인적인 정신력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한숨 돌렸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단단하게 봉한 상처는 더 이상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우웅.

명문혈로 쏟아지는 진기를 거부하니, 묵비의 진기가 온몸을 돌다가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가능할까 싶었더니, 정말로 회수하는군.’

연호정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초인(超人)의 육체에 진기를 쏟아부은 것도 모자라 다시 회수하기까지 한다. 극한의 흡입력을 지닌 광명신단의 인력(引力)에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묵비의 깨달음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후우!”

한 차례 숨을 몰아쉰 묵비가 땀을 닦으며 일어났다.

연호정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 시벌.”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상처를 막고 광명신단의 힘을 더했다. 광명신단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움직이며 전신 세맥으로 진기를 보냈다.

고통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몸이 노곤해졌다.

연호정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매번 죽을 고비로구먼…… 지랄 났네, 진짜…….”

“그러게나 말이에요.”

묵비가 피식 웃으며 쪼그려 앉았다.

연호정이 묵비를 바라보았다.

“피부가 좀 탔네?”

묵비가 투덜거렸다.

“광동성에서 너무 오래 지냈어요. 해가 사납더라고요.”

“그렇구만.”

“연 공자는 여전하네요.”

“그래?”

“네. 다시 만날 때마다 피투성이가 되는 것도 똑같고요.”

“인생이 꼬여서 그래.”

“그러게요. 언제쯤 좀 편안해질까 싶네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묵비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단약 하나 먹어요. 무림맹에서 가져온 거예요. 혹시 몰라서 두 개 남겨 놨네요.”

“내상약?”

“네.”

“잘 듣기나 하려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연호정은 냉큼 단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운기 더 할래요?”

“아니, 그럴 순 없지.”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운은 나지 않았지만, 광명신단이 본래의 활력을 되찾았다. 그것만으로도 전투는 가능했다. 물론 무극의 힘을 발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연호정이 명극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시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살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백왕진천무에 직격당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적의 수장을 죽였다. 남은 건…….”

연호정의 눈이 종남 본산으로 향했다.

불타오르는 산, 이 먼 거리에서도 적군과 아군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하다.

“일단은 본산으로…… 헉!”

“왜요?!”

“빌어먹을! 잊고 있었어!”

“뭐, 뭘요?”

“아이들! 이놈들이 도동들과 학도사들을 노리고 있다 했어! 만약 황 단주가 그걸 모르고 있다면……!”

“아, 거기를 말하는 거군요.”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거기?”

“오면서 지나쳤어요. 잠깐 참전해서 얼추 균형만 맞춰 놓고 바로 여기로 왔어요.”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설명해 봐.”

묵비는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

연호정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모양이야.”

“몰랐어요?”

“어. 이 미친놈들이 애들까지 잡아 죽일 생각을 했을 줄은 몰랐거든.”

묵비의 눈이 묘해졌다.

‘몰랐다고? 연 공자가?’

연호정이 광룡부를 들었다.

“개방이 왔어도 불안하다. 일단 다시 그곳으로 가야겠어.”

“좋아요. 나는…….”

“너는 본산으로 가서 종남을 도와. 지금쯤 힘든 싸움을 하고 있을 거야.”

“그래도 되겠어요?”

“물론이지.”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주변 정리가 끝나면, 그때 본산으로 갈 거다. 그때까지 잘 버텨 줘.”

파악!

먼저 몸을 날리는 연호정.

그런 연호정의 등을 보는 묵비의 얼굴이 아련해졌다.

‘똑같네. 똑같으면서도…….’

달라졌어.

묵비는 연호정의 한결같음과 미묘한 변화 모두가 보기 좋았다.

그녀가 양손으로 자신의 볼을 때렸다.

“회포는 나중에 풀면 돼. 일단 달려 볼까.”

파아아앙!

순식간에 연호정을 따라잡은 묵비가 종남 본산으로 길을 틀었다.

* * *

쩌어어어어엉!!

매서운 공명음과 함께 가득상이 튕겨 나갔다.

쉬이이이익!

재차 만도를 휘두르려던 하복은 하단에서부터 호선을 그리며 올라오는 언월도에 이를 악물었다.

쩌엉!

상단에서 하단으로 내리찍는 도격.

투로를 밟는 칼의 위치와 내공력을 생각하면 당연히 하복이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물러난 것은 하복이었다. 두 걸음이나 비틀거리며 자세를 바로잡는데, 정작 하단에서 상단으로 칼을 휘두른 진양은 물러섬이 없었다.

하복으로선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어디서 이런 놈이?!”

“입 다물어, 새끼야!”

부우우웅!

회전하며 목을 노려 오는 청룡언월도.

묵직한 중병의 칼날이다. 병기 자체가 풍기는 위압감과는 별개로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양의 청룡도는 막강한 완력과 무게감은 물론, 그 힘을 증폭시키는 속도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하복이 강하게 땅을 박찼다.

쩌어엉!

진양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이번 일격은 실로 거셌다. 아무렇게나 만도를 휘둘러 쳐 내는데, 일도에 만근의 공력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시팔, 진짜!”

천생신력을 타고났지만, 극상의 공력을 담아 내친 일격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진양이 외쳤다.

“야! 새끼 거지!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저 새끼 자꾸 반격하잖냐! 좀 제대로 해봐!”

가득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새끼 거지라니? 호칭 한번 무엄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저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우면서도 입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완전 꾼이구만, 저거?’

가득상이 외쳤다.

“좌측 다리를 노려! 약점이다!”

“그걸 누가 몰라, 이 병신아! 대가리에 소면 사리만 들었어?! 노린다고 노려지겠냐고!!”

기어이 가득상의 입에서도 쌍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 이 개새끼! 한 번만 더 욕하면 니 대가리부터 깬다!”

“이 새끼가 미쳤…… 헉!”

콰앙!

혈랑사도의 도압에 진양과 가득상이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진양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진짜 괴물은 괴물이네.”

“나한테 빚진 거다. 앞에서 안 막았으면 너 뒈졌어.”

“어쩔 거야? 후개라며? 똑똑한 대가리로 얼른 타개책이나 뽑아 봐.”

“아, 그만 찡찡거려!”

화아아아악!

두 사람의 입이 저절로 오므라졌다.

“모자란 놈들한테 이렇게까지 몰리다니, 참으로 수치가 아닐 수 없도다.”

치이이이이익!

하복의 만도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기운이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이루었다.

전신의 내공을 모조리 뽑아내는 일격이었다. 차원이 다른 무공이 날아오는 것이다.

하복이 차갑게 말했다.

“애새끼들은 됐어. 너희 두 놈을 육젓으로 만든 후에 천천히 잡으러 가련다.”

가득상의 얼굴에 진한 긴장이 떠올랐다.

그때, 진양이 속삭이듯 말했다.

“육젓으로 만든다는데? 정말일까?”

가득상이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앞이 막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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