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99화 (699/963)

◈699화. 승패는 없었다 (5)

퍼어억!

화살 한 방에 소맷자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렸다.

화살촉부터 깃대까지, 관통력은 뛰어나지만 그 표적이 되는 범위는 작을 수밖에 없다. 뚫려도 이렇게 큰 구멍이 뚫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형탄(無形彈)!’

소월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무형탄, 화살 없이 진기로 적을 사살하는 절정의 수법이다.

당연히 소월도 구사할 줄 아는 기술이었다. 기실 궁술을 익힌 무림인이라면, 무형탄의 경지까지는 반드시 도달해야만 했다.

궁술은 도검이나 창술, 권법과 판이한 무술이다. 화살 수가 정해져 있는 만큼 공격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무마할 수 있는 기술이 바로 무형탄이었다. 진기 소모가 상당하지만, 무형탄을 자유자재로 날릴 수 있다면 궁사의 전투 능력은 무궁무진하게 늘어난다.

피피피핑!

보이지 않는 화살이 소월의 육신을 쫓아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지가!’

퍼퍼펑! 픽!

세 발의 무형탄은 피했지만, 한 발은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극한까지 갉고 닦은 전장의 육감 덕에 살았다. 본능대로 피하지 않았다면, 좌측 어깨가 그대로 꿰뚫렸을 것이다.

소월 역시 시위를 당겼다.

퍼어어어엉!

파격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화살이 묵비를 향해 날아갔다.

펑!

그 순간 묵비의 무형탄이 쏘아지는 소월의 철극시(鐵極矢)에 닿았다.

무형탄으로도 철극시의 투로는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힘이 분산되고 속도가 느려졌다.

그리고 그 순간 묵비의 몸이 회전했다.

타아아악!

무시무시한 기교다.

무형탄으로 속도를 죽인 철극시를 맨손으로 낚아챈 묵비가 일 조장 화한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타아아아아앙!

소월의 궁술이 단순하고 파괴적이라면, 묵비의 궁술은 탄력적이고 날카롭다.

하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었다. 탄력과 날카로움이 묵비의 궁술을 대변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궁술의 모든 것을 터득한 장인이었다.

그 장인이 쏘아 낸 철극시의 위력이 소월보다 떨어질 리가 없었다.

쩌어어어어어엉!

화한의 몸이 미친 듯이 뒤로 밀려 나갔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거검으로 방어했지만, 그 방어세를 뚫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마주 공격한 것이 아닌데도 내상을 유발하는 공격력인 것이다.

소월의 얼굴이 굳어졌다.

‘빠르다!’

궁술의 위력이나 다채로움 이전에, 상대의 반사 신경은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공격을 포착하는 눈과 대응 능력은 물론, 판단력에 몸놀림까지.

모든 요소가 자신보다 위였다. 실제 궁술에 대한 깨달음 이전에, 경지에서 한발 밀린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군.’

파아아아악!

절벽 끝에 내려선 소월이 묵비를 겨누었다.

묵비 역시 멀리 물러나 소월을 겨누었다.

쩌저저정! 푸화아악!

두 사람 사이, 종남 검사들과 물밀듯 올라오는 혈랑대원들이 사나운 접전을 벌였다.

황석태가 명령을 내리고, 용호진인과 동권이 검진의 빈틈을 메웠다. 일 조장 화한이 혈랑대의 선두에 서서 밀어붙였고, 사 조장 극패가 혈랑대원에게 가해지는 공격들을 하나하나 튕겨 냈다.

한 궁수의 출현에 전투의 형태가 바뀌었다.

종남 측의 희생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반대로 절벽 위로 올라오는 혈랑대원들의 숫자도 많아졌다. 이전처럼 자살 특공을 벌이는 일은 없었지만, 호시탐탐 종남의 빈틈을 노리는 혈랑들의 눈은 진정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황석태는 생각했다.

‘굉장하군.’

이름 모를 궁수의 출현은 너무나도 반가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출현 때문에 혈랑대원들이 청목애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묵비와 소월의 대치 상태가 이어지며 종남 검사들의 죽음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 소월의 저격이 더 이상 검사들을 향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굉장한 도움이다. 이 전쟁은 지키는 전쟁이야. 종남 검사들의 희생이 최소화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다.

‘사나흘째로 접어들면 우리에게 유리하다. 그러나 그전까지는 위험해. 애초에 사나흘까지 버티기도 힘들 거다.’

애매하게 버티느니 속전속결이 최고다.

황석태가 버럭 외쳤다.

“검사들은 본진까지 물러나라!”

동권이 깜짝 놀랐다.

“이보시오!”

“희생을 줄여야 하오!”

“그것도 그렇지만!”

“날 믿으시오!”

묵비가 시위를 놓았다.

터어어어엉!

소월은 무형탄을 피하자마자 시위를 놓았다.

펑!

공격을 피한 묵비가 혈랑단을 향해 홍련궁을 겨누었다.

소월 역시 종남 검사들을 향해 시위를 겨누었다.

사악!

두 궁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겨눈 시위를 서로에게로 바꾸었다.

자세 변환은 묵비가 미세하게 더 빨랐지만, 서로 간의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었다. 궁사의 신법 능력을 생각하면 유효타를 낼 수가 없다. 하물며 아군은 지키고 적군은 죽여야 할 상황, 애초에 두 사람만의 싸움이 아닌 것이다.

궁사들끼리의 지독한 신경전. 서로 상대를 봉쇄하는 족쇄가 되었다.

“물러나라! 조금씩!”

황석태의 외침에 맞춰 화한 역시 거친 목소리를 토해 냈다.

“밀어붙여라! 무리하지 마! 언제든 화전을 발사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그렇게 두 집단은 결국 청목애를 넘어 본산 앞까지 도달했다. 그때까지 두 집단은 미친 듯이 싸우면서도 거의 사상자를 내지 않았다.

‘조만간 공격해 올 거다.’

창을 휘두르면서도 황석태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적도 바보가 아니다. 이만큼이나 물러났다면 뭔가 한 수가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돌격시킬 수는 없으니, 반드시 누군가가 나설 것이다.

‘나선다. 반드시.’

황석태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일차 결전 장소가 청목애였다면, 이차 결전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언제 나설 테냐!’

그때였다.

파아아아아앙!

혈랑대를 이끌던 화한과 극패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황석태의 눈이 번뜩였다.

“동권 장로는 검진에 남으시오! 용호진인! 적의 권법가를 상대하시오!”

파아아아앙!

용호진인이 뛰어오르며 극패와 부딪쳤고, 마찬가지로 뛰어오른 황석태가 화한과 부딪쳤다.

소월이 외쳤다.

“혈랑대 전원 사격과 함께 전진해라!”

퍼퍼퍼퍼펑!

마침내 화전을 발사하며 속도를 내는 혈랑대, 그리고 화전을 튕겨 내며 물러나는 검진.

검진이 물러나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화전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이다.’

화한의 거검을 쳐 낸 황석태가 속으로 울부짖었다.

‘지금!!’

화아아아악!

일순 화려한 기세와 함께 본진 쪽에서 오십여 명의 고수들이 돌진해 왔다.

동권이 소리쳤다.

“매화창수들이구나!”

파아아아악!

삽시간에 검진 사이를 뚫고 지나간 매화창수들이 혈랑대의 전면을 휩쓸기 시작했다.

푸화아악!

* * *

쩌어어엉!

밀려 나간 초숙의 입에서 기어이 피가 뿜어져 나왔다.

평소가 씨익 웃었다.

“이제 좀 죽어라, 늙은이!”

“시끄럽다!”

퍼어어엉!

평소를 떨쳐 낸 초숙이 이를 갈았다. 어느새 그의 옆구리에는 철전 한 발이 박혀 있었다.

불붙은 화전은 아니었다. 하지만 빈틈을 뚫고 들어온 철전은 팽팽하던 두 고수의 싸움을 한쪽으로 확 기울어지게 했다.

평소가 단창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정! 사각!

초숙의 볼에 깊은 상처가 났다.

‘이런!’

팔다리도 아니요, 몸통도 아니다. 얼굴, 머리에 일격을 허용했다.

철저하게 보호되어야 할 머리를 공격당했다는 건, 그만큼 초숙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의미했다. 옆구리에 허용한 철전, 정상이 아닌 몸 상태가 기어이 사달을 낸 것이다.

‘이래선 안 된다!’

초숙의 검결이 변화했다.

강인한 낙뢰구검(落雷九劍)에서 신묘한 방어로 이름 높은 구궁신행검(九宮神行劍)으로, 구궁신행검에서 종남에서 손에 꼽히는 절개 태을무형검(太乙無形劍)으로 변화했다.

평소의 표정이 바뀌었다.

화아아악! 퍼어어엉!

화려한 검기공에 평소의 몸이 밀려 나갔다.

초숙의 눈이 빛났다.

‘됐……!’

퍼어어억!

초숙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어느새 그의 허벅지에 단창 하나가 박혀 있었다. 평소가 낭두쌍창 중 하나를 던져 박아 버린 것이다.

“이익!”

깊다. 다행히 뼈는 비켜 갔지만, 내측 동맥을 끊어 버렸다.

초숙이 비틀거렸다. 서둘러 내공을 운용해 말려 올라가는 동맥을 붙잡아 내렸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이럴 수가.’

중원의 그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무공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력 병기를 던질 줄은 몰랐다. 중원 무림에도 비검술이나 비창술이 있지만, 그것은 개인 병기를 던져 내는 수법 따위가 아니었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평소가 낭두창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엉!

피를 토한 초숙이 삼 장이나 날아가 쓰러졌다. 즉사는 면했지만, 창격을 막은 오른팔이 부러져 버렸다. 제대로 힘을 싣지 못했던 것이다.

“으아압!”

퍼어억!

남은 낭두창이 초숙의 심장에 박혔다.

평소가 숨을 할딱였다.

주르륵.

죽는 그 순간, 초숙의 검이 그의 옆구리에 박혔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정신력이었다.

티잉!

검을 뽑아낸 평소가 살짝 비틀거렸다. 상처를 통해 들어온 태을무형검의 경력이 내장을 온통 뒤흔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투가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초숙의 몸에서 낭두쌍창을 뽑아 든 평소가 버럭 외쳤다.

“적장을 죽였다! 전원 밀어붙여라!”

우우우우우우!!

잔혹한 낭소가 울려 퍼졌다.

검진을 이루는 검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쩌저저저정!

호패의 도검을 쳐 낸 패율의 얼굴에도 심각한 빛이 떠올랐다.

‘정말이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초숙의 엄격한 기도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빌어먹을.’

쾅!

강한 진각과 함께 관일창이 쏟아졌다.

쾅!

호패가 혈랑대원들과 함께 쓰러졌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적재적소에 내친 공격을 멀쩡하게 받아 낼 순 없었던 것이다.

파아아아아앙!

순식간에 전선에서 이탈한 패율이 검진을 향해 돌진했다. 정확히는, 검진 뒤에서 공격을 감행하는 평소를 막기 위해서였다.

평소가 쌍창을 휘둘렀다.

퍼억! 퍼억!

검사 넷이 목숨을 잃었다.

평소를 막기 위해 후방 검진 두 개가 방향을 전환했다.

동시에, 혈랑대원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패율이 외쳤다.

“안 돼!”

늦었다.

쾅! 쾅!

전방 검진 속으로 뛰어든 혈랑대원 십여 명.

그들의 몸이 폭발하며 사도암의 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버렸다. 뒤에서 받치는 검진이 없으니, 단숨에 방진을 뚫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소름이 돋는 전술안이었다. 목숨을 걸고 자폭을 감행하는 놈들의 광기에, 천하의 패율조차도 등줄기가 으스스해질 정도였다.

번쩍!

패율의 몸이 신속(神速)으로 움직였다.

콰앙!

무자비한 발길질에 평소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패율이 소리쳤다.

“너!”

평소가 씨익 웃었다.

“너흰 졌어!”

그때였다.

화아아악!

저 멀리 사도암 후방 쪽에서 활화산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패율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뭐지? 또 적인가?!’

틀렸다.

평소의 표정 역시 패율의 그것처럼 심각했다. 꽤 강력한 기세가 범람하는 물길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푸화아아악!

후방에 있던 혈랑 이십여 명이 창칼로 이뤄진 파도에 휩쓸려 산화했다.

선두에 선 유약한 외양의 청년이, 호리호리한 몸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방천극(方天戟)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섬서 화웅문(火熊門)이라네요! 종남은 걱정 말고 막으세요!”

이 급박한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말투였다.

난생처음 듣는 문파, 그리고 목소리다. 하지만 패율은 그 목소리에 힘이 나는 것을 느꼈다.

패율이 외쳤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뒤를 부탁한다!”

“문주님 올 때까지만 버틸게요!”

“그냥 끝까지 버텨!”

“생각해 보고요!”

별 희한한 놈이 따로 없다.

쩌어어엉!

평소와 창을 맞댄 패율이 소리쳤다.

“여기에 정상인은 나밖에 없는 거냐!!”

말투와 달리 그의 얼굴은 지극히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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