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2화. 죽음과 인연 사이 (2)
콰아아앙!
무시무시한 격돌이었다.
매화창수들과 선두의 혈랑대가 정면으로 부딪치며 소름 끼치는 굉음을 냈다.
창격에 뚫려 죽는 혈랑대, 죽어 가면서도 매화창수들의 몸에 화살과 칼을 박는다.
그에 피를 토하면서도 찌른 창을 더더욱 깊이 쑤셔 넣는 매화창수들의 독기도 엄청났다.
매화창수들의 무위는 매화검수와 동급이다. 그러나 이러한 난전, 특히 돌격의 상황에선 매화검수 이상의 전투력을 낸다.
무림인의 전쟁은 일반 병사들의 전쟁과는 다르다. 전략은 비슷할지라도 전술은 전혀 다르게 짜야 한다. 개인 능력에 따른 편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기의 활용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것이 곧 무공이다. 무공의 특성대로, 매화창수들의 돌진은 순간적이나마 종남 검사들의 검진보다도 막강한 효율을 냈다.
퍼어엉! 퍼어어엉!
매화창수들의 등장으로 종남 검진은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치고받는 전투에서 변수는 언제나 터지는 법.
쩌저정! 쾅!
“컥!”
극패의 주먹이 기어이 용호진인의 가슴에 닿았다.
폭음을 일으키며 날아가는 용호진인, 코와 입에서 뿜어내는 핏물의 양이 굉장했다. 흉골을 넘어 위장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바, 극심한 내상은 물론 끔찍한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주르륵.
극패가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 냈다.
용호진인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그 역시 눈 하나를 잃었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검기가 뇌까지 침범했을 것이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것. 급박한 전황을 한순간 뒤엎는 실전 무술가의 독한 판단력이었다.
퍼버버벅!
순식간에 정면으로 달려들어 매화창수 세 명의 머리통을 부숴 놓은 극패의 무공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황석태가 외쳤다.
“검진!”
번쩍!
후방의 태을무형검진(太乙無形劍陣)에서 거대한 빛무리가 날아왔다.
하나 남은 극패의 눈이 붉어졌다.
콰아앙!
양팔의 철비갑으로 비껴 내듯 쳐 낸다.
아무리 초절정고수라도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살짝 비껴 나간 검기공이 혈랑대원 다섯을 베고 사라졌다.
파아아앙!
순식간에 매화창수들 틈으로 파고든 극패가 팔다리를 휘둘렀다.
퍼버버버벅!
매화창수 십여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한쪽 눈이 없는데도 거리를 정확하게 재고 있었다. 일격에 한 명씩 전투 불능으로 만든다. 빠른 권각으로 급소만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근접전으로는 일 조장 화한조차도 필승을 감당할 수 없는 육탄전의 고수.
순식간에 매화창수의 진형을 무너트린 극패가 동권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권의 눈이 번뜩였다.
“이놈!!”
쩌어어엉!
동권의 태을무형검과 극패의 낭왕권(狼王拳)이 부딪쳤다.
힘의 차이는 분명했다. 극패가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신감을 얻은 동권이 한 발 앞으로 나섰을 때였다.
퍼어어억!
동권의 좌측 팔이 통째로 날아갔다.
소월의 철극시였다. 검진 중앙에서 보호받던 그를 극패가 끌어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소월의 궁술이 동권을 공격한 것이다.
퍼어어억!
철극시를 쏘아 낸 소월이 피를 토했다.
틈을 노려 동권의 팔을 날렸지만, 묵비 역시 소월을 향해 무형탄을 날렸다.
어떻게든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무형탄에 스친 옆구리에서 강렬한 통증이 올라왔다. 갈비뼈가 세 대나 나간 것이다.
쩌저저정!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월은 일격에 동권의 팔을 날렸지만, 묵비는 소월을 밀쳐 냄과 동시에 극패를 몰아붙였다. 무형탄 오연발 중 네 발을 튕겨 냈지만, 마지막 한 발이 극패의 가슴을 강타했다.
퍼어억!
극패가 왈칵 피를 토해 냈다.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안 뚫려?!’
무형탄의 위력은 바위도 뚫는다. 그만한 일격을 맞았는데도 충격에 피를 토한 게 전부라니?
순간 그녀의 눈이 극패의 찢어진 의복 속, 거무튀튀한 무언가를 포착했다.
‘갑옷!’
어떠한 병기도 없이 전선 한가운데에서 권각을 구사하는 극패는 얇은 갑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충격은 크지만, 죽지는 않는다.
‘이런!’
재차 시위를 걸던 묵비는 순간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콰앙!
바닥을 뚫고 들어간 거대한 화살이 부르르 떨렸다. 철극시였다.
묵비가 소월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의 소월,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묵비를 향해 활을 겨누고 있다.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절대 적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제길!’
묵비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이놈들은 다 정상이 아니야!’
그녀 역시 수많은 전투를 치러 본 역전의 용사였다.
그러나 적장들은 또 달랐다. 무공의 격차 이전에, 겪어 온 아수라장의 숫자가 다른 것이다.
팔다리가 날아가도, 뼈가 부러져도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 어떤 의미로는 자폭을 감행하는 혈랑대원들보다도 더 독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양손에 강력한 내공이 실렸다.
‘손해를 입은 이상, 정신력만으로 전황을 바꿀 수는 없어!’
묵비가 시위를 튕겼다.
타타타타탕!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는 무형탄.
소월 역시 무형탄을 날렸다.
콰쾅! 퍼퍼펑!
대치 중이던 두 궁사가 서로를 향해 공격을 시도했다.
초장거리를 한순간에 무(無)로 만들어 버리는 신속의 격전.
그 사이에서 창검과 주먹, 철전과 진법으로 무장한 병력이 생명을 깎아 내며 부딪쳤다.
쩌저저저정! 콰쾅!
혈랑대가 남은 창수들과 검진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동권의 검이 극패의 다리에 상처를 내자, 극패의 주먹이 동권의 가슴을 쳐 그를 쓰러트렸다.
황석태는 화한과 전투를 벌였고, 혈랑대는 검진을 밀어붙였다.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본산과 가까워지는 혈랑대.
퍼퍼퍼퍼펑!
숱한 폭음과 함께 검진이 밀려나는 속도가 빨라졌다.
죽음을 불사하는 혈랑들의 광기.
‘……!’
지금 이 순간 그들은 깨달았다.
그 많은 아군이 패배했음을.
사도암으로 진군했던 혈랑들도, 도동과 학도사들을 처리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병력도 모두 이승을 떠났음을.
듣지 않아도 직감이 그것을 알려 준다. 새외의 온갖 전선을 넘나들며 첨예한 군기를 몸으로 느끼던 그들은, 어느새 모두가 당해 버렸음을 깨달았다.
생사의 격전지 속에서 예리해질 대로 예리해진 감각.
화산처럼 타오르는 광기 속에서, 혈랑대는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실패다.
미지의 고수를 붙들고 있던 명극의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싸움이 끝났다면 진즉 이곳에 도달했어야 했는데, 그들의 수장은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끝이다.
자신들이 모두 죽어도 명극만 살아 있다면 종남에 궤멸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절대고수가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적장에게 죽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후퇴는 없다!”
쩌어어어엉!
강력한 일검으로 황석태를 튕겨 낸 화한이 무서운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에게 후퇴는 없다! 목숨이 붙어 있는 그 순간까지 놈들을 공격해라!”
흔들리던 혈랑들의 사기가 무섭게 불타올랐다.
쩌저정! 퍼억! 퍼억!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수많은 사람이 쓰러졌다.
종남의 검사들도, 혈랑들도 죽는다.
선두에서 적들을 유린하는 극패의 주먹에도 파멸적인 힘이 실렸다. 목숨을 불태우는 결의, 생명력마저 깎아 가며 종남 검사들을 박살 내는 것이다.
쩌어엉!
화한을 밀친 황석태가 버럭 외쳤다.
“미친놈들! 이만 포기해!”
“우리에게 포기는 없다.”
쩌저저저정!
적룡창과 거검은 한 치의 물러남이 없었다.
화한의 눈이 붉어졌다.
“한 놈이라도 더 데리고 갈 것이다!!”
그때였다.
번쩍!
한 줄기 아름다운 섬광이 번뜩인다 싶더니, 어느새 극패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푸화아악!
뿜어져 나오는 선혈 뒤.
한없이 인자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슬픔을 간직한 노도인이 나타났다.
화검자였다.
황석태가 외쳤다.
“노선배!”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해 끝까지 남아 있으려 했으나, 더는 의미가 없을 듯하여 직접 왔네.”
화검자의 눈이 혈랑들을 훑었다.
새로운 고수의 등장에도 혈랑들의 기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광기를 불태우며 전진했다.
화검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만약 선도의 깨달음에 귀의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저들과 같은 일생을 살았을 것이다.
‘이해하라고 말하지 않겠다. 나 역시 이해할 수 없음이니.’
우우우우웅!
그의 장검에 수십 송이의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화검자일 뿐이다.’
화검자가 곧게 검을 내질렀다.
후우우우웅! 퍼버버벅!
십여 명의 혈랑대원의 미간에 꽃잎 모양의 구멍이 뚫렸다.
검로는 느리고 정직했지만, 그 속에 깃든 내공과 검의(劍意)는 화산 무공의 극치를 구현해 내고 있었다.
광기도, 살기도 없는 검. 그러나 그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서너 마리의 늑대들이 확실하게 이승을 떠나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아아아아아!!
본산 뒤에서부터 넘어오는 또 다른 검사들.
사도암을 지키던 검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낭두쌍창을 든 패율이 있었다.
쩌저저저저정!
교체된 검진, 화검자를 넘어 적진으로 돌진한 패율이 두 자루 단창을 화려하게 휘둘렀다.
후욱!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는 혈랑대.
혈기와 광기만으로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의 열세 속에서.
“아오! 저 망할 놈들이 아직도 저만큼이나 있네!”
화웅문주 진양이 혈랑들을 향해 청룡언월도를 겨누었다.
“다 죽여라!”
제각기 중병을 든 화웅문의 병력까지 혈랑들을 몰아붙인다.
극단적인 정신력으로 무장한 혈랑들의 얼굴에 비로소 절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더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가 없다. 힘이 넘치는 화웅문의 병력과 교체된 종남 검사들, 거기에 초절정고수인 화검자와 패율까지 참전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눈 한 번 깜빡하면 동료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화아아아악!
혈랑들을 몰아붙이는 병력 뒤로, 마침내 연호정까지 등장했다.
그의 등장은 치명적이었다. 당장의 전투는 불가능하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아군은 사기를 얻고 혈랑들은 얼마 남지 않은 기력마저 빼앗겼다.
“이제 끝났어!”
쩌저저정!
거룡창의 파괴력 넘치는 살초들이 화한의 거검을 튕겨 냈다.
황석태가 외쳤다.
“무릎을 꿇어라!”
“닥쳐!!”
묵직하기만 했던 화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명이 다할지언정 무릎은 꿇지 않는다!”
쾅!
황석태를 베지 못한 거검이 땅에 꽂혔다.
적룡창의 창대가 탄력적으로 움직였다.
빠각!
화한의 우측 빗장뼈를 깨부수는 창.
휘청거리는 화한의 눈에, 거대한 용의 아가리가 환상처럼 비쳐 들었다.
화한이 눈을 감았다.
“사신(邪神)께 갑…….”
퍼어어억!
머리통이 날아간 화한이 그대로 쓰러졌다.
푸화아악!
진양과 소정광의 도극(刀戟)이 마지막 남은 혈랑의 몸통을 찢어 버렸다.
“이놈들!!”
파아아악!
허공 높이 날아오른 소월의 손에 철극시 세 발이 들렸다.
퍼버버벅!
소월의 몸통에 구멍이 뚫렸다. 묵비의 무형탄 세 발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피이이이이잉!
목숨을 잃기 전 쏘아진 철극시 세 발이 화검자와 패율, 연호정에게로 날아들었다.
쩌어엉!
화검자의 검이 철극시를 튕겨 냈다.
쾅!
패율의 절묘한 회피술에 철극시가 땅에 박혔다.
그리고 무방비 상태이던 연호정.
파아아악!
순식간에 연호정 옆으로 날아든 묵비가 양손으로 철극시를 잡았다. 철극시의 화살촉은 연호정의 미간 세 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철렁했네.”
치이익!
철극시를 쥔 묵비의 양손에서 허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묵비가 한숨을 쉬었다.
“전투 능력 상실한 사람이 전선에 오는 거 아니에요. 죽을 뻔했잖아요.”
“네가 막아 줬잖아.”
“참나.”
연호정이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황석태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석태가 적룡창을 들어 올렸다.
“우리가 이겼다!!”
“우와아아!!”
거대한 함성이 종남산을 뒤흔들었다.
종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