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05화 (705/963)

◈705화. 죽음과 인연 사이 (5)

“그게 무슨 말이오? 한바탕하다니?”

“잘은 모르겠소. 다만 지나가면서 듣기로, 단순히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소.”

“……?”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뭔가 문제가 있으니 고성이 오갔겠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심하시길 바라겠소.”

순간 표정이 굳어졌던 용호진인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별일이야 있겠소?”

“확신하지 마시오.”

황석태가 고개를 저었다.

“부모가 자식을 팔아먹고 자식이 부모 등에 칼을 찌르는 세상이오. 구파일방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했는지 알고 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제오늘이 다른 법 아니겠소.”

“…….”

“하물며 자파 내 제자들이 많이 죽고 다쳤소. 지원군으로 와 준 이를 해코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종남 장문인의 정신이 정상은 아닐 거요.”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용호진인은 생각했다. 확실히 흑도는 다르다고.

사람 사는 세상, 다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지역마다 지역색이라는 것이 있듯, 흑도와 백도의 색은 너무나도 다르다.

흑도에도 충의를 지키는 이들이 있겠지만, 동시에 그들의 세상엔 백도보다 직관적인 공포가 있다. 대놓고 배신하는 이들도 많고, 오히려 그것을 삶의 지혜로 받아들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부분이 다르구나.’

비슷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다른 부분은 확실하게 다르다.

용호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끝까지 함께해도 모자랄 사이외다. 다 떠나서, 지금에 와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해 봤자 종남에만 나쁜 일이 될 것이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러나 명군이라고 칭송받던 수장들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멸망한 문파나 국가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오.”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용호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말임을 아오. 고맙소. 그러나 나는 그분들께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 믿소이다.”

“…….”

물끄러미 용호진인을 보던 황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허허.”

잠시 후, 매화검수 하나가 차를 내왔다.

두 사람에게 찻잔을 건넨 매화검수가 깊게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섰다.

용호진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오.”

“무슨 말이오?”

“화산의 제자들 말이오. 당신을 아주 좋게 보는 것 같소.”

“…….”

“하긴, 익숙지 않은 병력을 잘 운용하여 이번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한 명장(名將)이니, 흑백을 떠나 존경받아 마땅하외다.”

황석태가 고개를 저었다.

“피해를 최소화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오. 그 외의 결과는 본 적이 없으니까.”

“그도 그렇구먼.”

두 사람이 차로 목을 축였다.

창가에 잔을 놓은 용호진인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바람이 참 좋소이다. 아직도 슬픔이 강물처럼 흐르는데, 종남의 산바람은 이리도 쾌적하게 어둠을 씻어 내 주는군.”

황석태는 말이 없었다.

그는 진중하고 담백한 성정의 사내였다. 때로는 거친 면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용호진인의 말은 여러모로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차 한 모금을 더 마신 황석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마셨소.”

“벌써 일어나시오?”

“둘러볼 곳이 많소.”

“허허,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둔 모양이군.”

황석태가 몸을 돌렸다.

용호진인이 그의 등을 향해 말했다.

“고맙소.”

“등 떠밀려 맡은 일이오. 그나마도 많은 사상자가 났소. 고마워할 일 아니오.”

“그래도 고맙소이다. 묵룡부 최고의 부대, 용아철기단 수장의 능력을 톡톡히 보았소.”

황석태가 피식 웃었다.

“몸 관리나 잘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황석태가 거처를 나섰다.

용호진인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흑도에도 사람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참으로 사귀어 볼 만한 사내가 아닌가.”

크나큰 비극 속에서도 사람은 살아간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이 무수히 많은 껍질에 갇혀 살아왔음을.

너무나도 비극적인 전쟁이었지만, 그 속에서 용호진인은 흑도인들에 대한 막연한 증오와 혐오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무공의 상승보다 몇 배는 더 고귀하고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바람이 정말 좋구나.”

* * *

종남 장문인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묵비는 여전히 연호정의 거처를 지켰다.

애초에 나서서 할 일도, 말도 없었다. 그녀는 무림맹 의정군 소속의 부장일 뿐이었다.

그렇게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음?’

묵비의 눈이 반짝였다.

거처로 다가오는 두 명의 사내가 있었다.

한 명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만한 덩치의 소유자였다. 거의 칠 척에 달하는 키에 기골이 엄청나게 장대하여, 두 발로 선 곰을 보는 듯했다.

반면 그 옆에 있는 청년은 유약해 보일 정도로 왜소했다. 피부도 하얗고 눈빛도 맑아서, 제 나이보다 훨씬 더 어려 보이는 듯했다.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 모두 보란 듯이 중병을 들고 있었다. 덩치 큰 청년은 청룡언월도를, 유약해 보이는 청년은 방천극을 들었다.

묵비는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 뻔했다.

곰 같은 청년은 몸뚱이만으로도 감탄이 나왔다. 그 덩치에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으니, 말 그대로 고대의 신화를 만든 장수가 떠올랐다.

왜소한 청년 역시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체격과 어울리지 않는 방천극을 들어서 오히려 더 튀는 인상이었다.

‘진양, 그리고 소정광이라고 했지.’

마지막 전장, 두 사람이 활약하는 것을 톡톡히 본 그녀였다.

그리고 연호정 역시 깨어 있을 때 두 사람에 대한 말을 했었다.

‘놀랐어. 정말 인연이라는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야. 둘 다 오대신장의 한 자리씩을 맡았던 걸물들이거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하늘의 뜻이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는 건.’

점점 가까워지는 두 사람.

묵비의 눈이 깊어졌다.

‘나와 저들이 동료였다는 뜻인데.’

잠시 후, 두 사람이 그녀의 이 장 앞에서 멈춰 섰다.

묵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양이 헛기침을 했다.

소정광이 진양을 힐끔거리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꼭 이런 건 나한테 떠넘기고 그래…….”

“인마, 부하잖아.”

“그러니까요. 그냥 불알친구로 남을 걸 뭣 하러 부하로 들어왔을까요. 한스럽기 그지없네요.”

“콱!”

재차 헛기침을 한 진양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시작해.”

“알았다고요.”

한 발 앞으로 나온 소정광이 포권을 취했다.

“화웅문의 부문주 겸 군사 소정광이라고 하네요.”

묵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림맹 의정군 부장 묵비입니다.”

왠지 모르게 말투에서 어색함이 묻어 나왔다. 아예 듣지 않았으면 또 모르겠는데, 막상 동료였다는 말을 들으니 어찌 대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소정광이 웃으며 말했다.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무림맹 최고의 유군 부대, 그 안에 신들린 궁술로 적도들을 격파하는 신궁(神弓)이 있다고 하더군요.”

순간 묵비는 움찔했다.

신궁. 그것이 흑암제 시절 자신의 별호라고 하였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오직 연호정만이 알고 있던 과거의 전우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귀궁신녀 묵비, 묵 부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예.”

꽤나 단답이었다.

진양은 대번에 표정이 불퉁해져서 입을 내밀었지만, 뜻밖에도 소정광의 눈에는 은근한 흥미가 일었다.

‘신기한 분이네.’

호검쌍위(虎劍雙位) 중 호장(虎將) 연호정의 곁에는 그 못지않은 희대의 천재, 귀궁신녀가 함께한다고 하였다.

그 정도 명성이라면 천하 어디에 가서라도 으스댈 법했다. 출신은 알 수 없지만, 당장 함께하는 연호정이 육대세가의 일익인 강동 벽산연가의 장자가 아니던가. 충분히 오만해질 만했다.

그런데도 묵비에게서 오만한 성격은 엿보이지 않았다.

눈빛은 맑고 깊었으며, 대응은 다소 무뚝뚝해도 태도에서 예의가 묻어 나왔다.

‘대단한걸.’

화웅문의 군사로 임하면서, 백도 무림인들의 태도를 엄청나게 많이 봐 왔던 그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하기는커녕 지역 사람들도 잘 모르는 백도 문파 출신들도 세상 으스대면서 다녔더랬다. 한데 묵비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진짜 성격이야 알 길이 없지만…… 뭐 초면에 이 정도만 해도…….’

그때, 소정광은 묵비의 얼굴에 드리워진 의아함을 보았다.

그가 아차 싶어 재빨리 말했다.

“아, 소문으로만 듣던 귀궁신녀의 존안을 뵈어서 놀랐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잠시 헛기침을 한 소정광이 더욱더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저희 문주님을 비롯한 화웅문 병력은 슬슬 돌아갈까 해서요.”

“네?”

묵비는 깜짝 놀랐다.

진양은 모른 척 뒷짐을 지더니 먼 산을 바라보았다. ‘어허이.’ 하는 기묘한 헛기침을 몇 번이나 남발하는 그의 모습에서 멋쩍음이 묻어 나왔다.

소정광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저희 화웅문이 백도 정파는 아니랍니다.”

“어허잇!”

유독 강한 어조로 토해 낸 헛기침에 불편함이 묻어 나온다.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느냔 뜻이리라.

소정광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희 문주님께서 낯을 좀 가리십니다. 이해해 주세요.”

“어헛!”

“어쨌든 간에, 저희가 더 도와드릴 일도 없는 것 같고요. 시간도 꽤 지났고, 하물며 종남 장문인까지 오신 마당에 더 있어 봤자 눈치만 보여서요.”

진양도 이 말에는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종남파의 주인인데, 당연히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예에. 원래는 인사도 안 드리고 슬쩍 내빼려고 했는데…….”

소정광이 진양을 힐끔거렸다.

어느새 몸을 돌린 진양은 양팔을 쫙쫙 찢고 있었다. 먼 산을 보며 체조라도 하는 듯했다. 당연히 이쪽 대화는 다 듣고 있으리라.

“막판에 연 대협, 아니 연호정 대수님과 손발 맞춰서 싸운 인연도 있고 해서요. 그래도 인사는 드리고 가는 게 좋을 듯싶어 왔습니다.”

말은 좋았다.

기실, 진양은 진즉 종남산을 떠나려 하였다. 하지만 왠지 연호정이 걸려서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굉장히 찝찝했고, 그렇다고 우린 이만 가 보겠다며 만나러 오기에도 영 불편했다.

어젯밤엔 정말로 떠나 버릴 생각도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야 말았다. 나중에 연호정이 직접 찾아와서 머리채를 잡아 뜯을 것 같은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답지 않게 굳이 소정광을 대동하여 제 입으로 써먹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묵비는 잠시 고민했다.

‘어쩌지.’

연호정은 이들을 어떻게 하겠다고 분명하게 말해 둔 바가 없었다. 그저 그들이 누구인지,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들인지 말해 줬을 뿐이었다.

‘연 공자가 그렇게 신기해하고 기뻐했던 적은 오랜만인데.’

묵비가 소정광과 진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게 막을 명분은 없어.’

그때였다.

“기다려.”

놀란 묵비가 뒤를 바라보았다. 소정광도 마찬가지였고, 체조를 하던 진양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드르륵.

언제 일어난 것일까.

다소 창백한 안색. 쌀쌀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펑퍼짐한 백포만 걸친 연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 공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니까 계속 호위를 서고 있었네.”

묵비가 투덜거렸다.

“여기 친한 사람 하나도 없어요.”

“후개는?”

“바쁘죠.”

“뭐, 그도 그렇겠군. 나 때문에 고생했네.”

“됐네요.”

소정광을 대할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연호정이 소정광을 바라보았다.

소정광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가만히 소정광을 보던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잠시 기다려 주게. 날 보러 오는 사람이 있어서.”

“……에?”

연호정이 천천히 계단에 앉았다.

묵비는 그 옆에 섰고, 머리를 긁적이던 소정광은 헛기침을 하며 몇 걸음 떨어져서 팔짱을 꼈다. 진양의 체조는 다소 소극적으로 변했다.

잠시지간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훅!

묵비, 진양, 그리고 소정광의 눈빛이 차례대로 바뀌었다.

강렬하기 그지없는 기세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불같은 분노가 느껴지는 기도, 청정한 도가신공을 근본에 두고 있는 초고수였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자.

바로 종남 장문인 순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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