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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706화 (706/963)

◈706화. 죽음과 인연 사이 (6)

연호정, 묵비, 연위 등등.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무림인에게, 사람들은 별호(別號)라는 것을 붙여 준다.

당연히 그 별호에는 그 인물의 특성이 묻어 나오게 마련이다.

연위의 별호, 판관검에는 공무와 협을 행함에 있어 지혜롭고 칼 같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애초에 판관(判官)이라는 뜻을 생각하면 강호 제현이 연위를 얼마나 대단하게 보는지 알 수 있었다.

묵비의 별호, 귀궁신녀는 보다 명확한 뜻을 지닌다. 귀궁, 그리고 신녀. 귀신 붙은 활을 다루는 신녀라는 뜻으로, 그녀의 궁술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연호정.

벽산호장(碧山虎將)이란 곧 강동 벽산연가에서 난 호장, 호랑이처럼 용맹하고 강한 장수라는 뜻이었다.

무림인에게 장수라는 칭호가 붙었다. 일대일 생사결에 있어서도 뛰어나지만, 집단전은 물론 용인술(用人術), 전략과 전술, 대국을 바라보는 안목 모두가 뛰어나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듯 무림인의 별호는 그 사람이 지닌 특성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문인(文人)들의 호(號)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남 장문인 순우의 별호는 무엇인가?

놀랍게도 순우에게는 많은 별호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별호가 바로 화도신검(火道神劍)이었다.

의미는 간단했다. 불붙은 도를 추구하는 신검, 혹은 불처럼 뜨겁고 사나운 도사가 쥔 신검이라는 뜻이다.

그 별호야말로 순우라는 인물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무력은 섬서에서 알아주는 고수지만, 한번 화가 나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다만, 그의 분노와 열의가 항상 악(惡)과 불합리를 향하고 있기에 세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실제로 자파 내에서나 민초들에게 그는 든든하고도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분노 가득한 기색으로 이곳을 찾아왔다. 평범한 상황일 리가 없었다.

“연 대수.”

“예, 장문인.”

연호정의 태도는 몹시 깍듯했다.

대 종남파의 장문인이기도 하지만 같은 무림맹 소속이기도 했다.

순우는 봉공이 아닌 장로원 소속의 장로였다. 실질적인 실권은 없다시피 했으나, 그들이 지닌 위상은 전투 부대의 수장 이상이다.

나아가 그의 명성이, 그의 청명한 기도가 연호정의 예의를 강제했다.

순우가 노기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맹 내에서도 사적인 얘기를 나눠 본 적 없는 사이이니 내 말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말씀하십시오.”

“나는 언제나 자네를 응원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민초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인들을 향한 무자비한 징벌. 맹의 수뇌부 중 일부는 자네가 거느린 부대의 사나움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했네. 연 대수야말로 당대 단호한 협의 상징이라고.”

“과찬이십니다.”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해. 나는 자네를 높이 평가하네. 어떤 의미로는 본문의 어떤 도인보다도 더.”

이미 불이 붙은 순우가 바로 본론을 말하지 않고 연호정의 됨됨이를 칭찬하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힘이 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자네에게 그 용맹하고 성실한 성품 이상으로 뛰어난 능력이 있음을 아네.”

“…….”

“왜 연락하지 않았나.”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연락 말씀이십니까?”

“그래, 연락.”

순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의 눈에 깃든 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 안에 깃든 것은 원망과 슬픔, 자괴와 한(恨)이었다.

“왜 미리 연락하지 않았지? 놈들이 섬서를 노리고 있다고.”

섬서.

종남이 아닌 섬서다.

종남파야말로 섬서라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적들이 섬서로 들어온 순간부터 종남이든 화산이든, 그 외에 어떤 문파든 위험하다.

연호정은 그것을 알았다. 알면서도 무림맹에 직통으로 연락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무림맹에 곧바로 이 사실을 알렸다면?

그랬다면, 과연 무림맹에서 따로 병력을 파견했을까?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맹에는 맹 나름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고, 지금쯤 제갈문호는 각파의 대응 방법이나 전력 분산 정도를 계산해 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 이상이었다 해도, 섣불리 종남에 병력을 파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연호정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순우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다.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종남의 주인, 순우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종남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이곳에서 어떤 활약을 하든, 설령 그 자신이 죽는다 해도 수장으로서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저는…….”

“자네가 빨리 연락했다 한들, 내가 도착했을 때쯤에는 전쟁이 다 끝나 있었을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

“실제로 그랬다 해도 왜 맹에 연락하지 않았지? 결과가 바뀌지 않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었나?”

가만히 순우를 바라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화아악!

순우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파가 퍼져 나왔다.

그 자신이 지닌 실력 이상의 기파다. 묵비와 진양, 소정광 모두가 놀라서 한 걸음 물러설 만큼 뜨겁게 이글거리는 기운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순우의 입에서 기어이 폭발할 것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호정!”

“오히려 장문인께서 안 계시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뭐라고?”

“장문인의 무력을 떠나, 장문인의 존재 자체가 이 싸움에 해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종남 전투를 지휘한 자는 묵룡부 용아철기단의 수장입니다.”

순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연호정이 단조로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장문인께서 말씀하셨지요. 저와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그렇습니다. 저 역시 장문인에 대한 소문이나 몇 번 지나쳤을 때 느낀 기도로 성품을 유추해 봤을 뿐, 전쟁 중에 어떤 모습을 보이실지는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군의 정신을 분산시킬 위험이 있는 사람은 천고의 무력을 지니고 있어도 전투에서 배제합니다. 아군에게 불리한 변수가 생길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맹에 연락지 아니하였다?!”

“그렇습니다.”

“이 내가! 종남의 수장이라는 존재가 정작 종남산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만에 하나 장문인께서 전쟁 전에 종남에 도착하셨다면, 저는 철기단주에게 종남의 병력을 맡길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장문인의 위엄을 깎아내리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뭐, 뭐라?!”

“일파의 수장이란 솔선수범하여 문도들을 지켜야 하는 자. 그러나, 이와 같은 전쟁에서 수장이 지닌 위치는 각별합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장문인께서 멀쩡하신 모습, 지금 제 앞에 두 발로 서 계신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안도하고 있습니다.”

“뚫린 입이라고 어디서 그따위 요언을 내뱉느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순우의 목소리는 열풍과도 같았다.

묵비는 긴장했다. 순우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반면 연호정은 담담했다.

“사흘입니다.”

“……?!”

“사흘이 지나면, 그럭저럭 몸을 추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 이 몸으로 장문인의 분노를 감당해 냈다간 자칫 목숨이 위험할 테지요.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놈……!”

“사흘만 주시면, 그때는 장문인의 분노를 받겠습니다.”

순우의 눈이 잔뜩 충혈되었다.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분노한 자신과 달리, 연호정은 냉정하고 침착했다.

그 모습에 더더욱 열이 올랐고, 나아가 비참함을 느꼈다.

한참 동안 연호정을 노려보던 순우는 이내 나직이 탄식하고야 말았다.

스르륵.

당장이라도 일대를 날려 버릴 듯 들끓던 기파가 서서히 잠잠해졌다.

“…….”

연호정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기세를 잃은 순우의 얼굴은 삽시간에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분노와 한으로 가득하던 눈은 총기를 잃었고, 나아가 생기마저 상실해 가고 있었다.

스륵.

순우가 말없이 몸을 돌렸다.

터덜터덜 산길을 걸어 내려가는 순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잠시 후, 순우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후우.”

연호정이 천천히 계단에 앉았다.

묵비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나야 괜찮지. 장문인께서 하루라도 빨리 기력을 되찾으시길 바랄 뿐이야.”

한숨을 내쉰 연호정이 좌측 샛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만 나오시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소.”

샛길 너머에서 가득상이 나타났다.

연호정을 바라보는 가득상의 눈빛은 복잡했다.

“왜 그랬소?”

“뭐가 말이오?”

“왜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았소?”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맹에 연락을 취할 시간 따위, 연 대수에게는 없지 않았소? 음제를 찾는 과정에서 여광 대장로와 부딪쳤고, 애초에 사음의 병력이 종남을 치려 한다는 것도 직전에 알았잖소.”

“…….”

“연 대수가 장문인을 일부러 배제했을 리 없소.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정신이 없었을 텐데.”

연호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득상이 재차 물었다.

“한데 왜 그랬소? 왜 장문인을 그리 자극했소?”

“장문인께서 왜 내게 찾아왔다고 생각하시오?”

“……?”

“모르긴 몰라도, 장문인께선 화검자 노선배나 화산 측 인물들에게도 화를 냈을 거요.”

가득상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알고 있었소?”

“짐작했을 뿐이오.”

“어떻게 그것을 짐작하오?”

“살아남은 수장이기 때문이오. 싸워 보지도 못한 문주이기 때문이오.”

“……!”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은 추웠지만, 하늘은 맑았다. 흩어진 구름 몇 조각이 연호정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상상해 보시오. 문주인 자신이 없는 와중에, 자신이 책임져야 할 문파에서 전쟁이 벌어졌소.”

“…….”

“기분이 어떨 것 같소?”

“형용할 수 없겠지.”

“그렇소. 말로도, 글로도, 그 어떤 표현으로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오.”

“…….”

“그리고 나와 화산은 이번 종남 전쟁을 이끈 사람들이오. 말하자면, 문주가 할 역할을 대신했다고도 할 수 있소.”

연호정이 고소를 지었다.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 그 한을 풀어낼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는 뜻이오.”

가득상이 탄식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소?”

“거짓말 아니오.”

“뭐?”

“당시에 경황이 없어 무림맹에 연락할 생각은 못 했지만, 막상 전쟁을 준비할 때는 장문인의 부재를 다행이라 생각했소. 그건 진심이오.”

“…….”

“나란 놈은 그런 놈이외다.”

가득상이 눈을 감았다.

“연 대수.”

“…….”

“종남 장문인의 분노는 오히려 내가 받았어야 했소. 제때 무림맹에 알리지 못한 것은 결국 우리 책임 아니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건 말이 안 되오. 평소라면 모를까, 전쟁 중에 정보력의 가치는 황금보다도 높소. 정보를 다루는 개방에게 분노의 화살이 돌아가면, 앞으로 장문인은 개방의 정보를 불신할 가능성이 있소.”

“…….”

“내가 낫소. 젊기도 하고, 워낙 재수 없기로 유명하기도 하잖소.”

“그래도…….”

가득상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연 대수가 장문인의 한의 표적이 될 필요는 없었소.”

“틀렸소. 그럴 필요가 있소.”

“왜 그렇소?”

“전쟁이기 때문이오.”

“……?!”

“내 사람을 잃은 슬픔, 책임지지 못한 자의 자책감, 동료를 잃었음에도 적 앞에서 미소 지어야 하는 현실.”

“…….”

“장문인께서 저러시는 것,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오. 전쟁이란 수양 깊은 도사나 공력 높은 승려들이라도 미치게 만들지.”

연호정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한(恨)과 분노의 대상이라도 될 수 있는 것. 차라리 기껍소. 내 감정을 쏟아 낼 대상조차 없을 때, 사람은 망가지게 마련이오.”

“…….”

“장문인께선 곧 괜찮아지실 것이오.”

가득상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그럼 당신은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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