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화. 깨달음의 보고 (1)
다음날 정오.
“후우우.”
연호정이 깊은숨을 내쉬며 가부좌를 풀었다.
‘괜찮군.’
외상은 아직 낫지 않았다. 아마 완쾌까지는 빨라도 보름 이상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소모되었던 내공은 반절 이상이 찼고, 전신을 휘젓고 다니는 진기는 활발하기 그지없었다.
치이익!
오장육부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하다.
다친 장기들이 대부분 정상화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이 빨라지니, 술을 그렇게 마셨음에도 연호정의 안색은 시시각각 좋아졌다.
끼이익.
문을 열고 나가니, 마침 묵비가 식사를 가져왔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나 이제 괜찮아. 수발 안 들어 줘도 돼.”
“누가 뭐래요? 먹어요, 얼른.”
“그래도 고맙구먼.”
두 사람이 계단에 앉아 식사를 했다.
연호정이 물었다.
“분위기는 좀 어때?”
“뭐가요?”
“본산 분위기 말이야. 아직 침울하긴 하겠지만.”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여전하죠. 당장 나아질 것 같진 않네요.”
“그렇겠지.”
연호정이 고깃국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묵비가 물었다.
“혹시 여광이라고 알아요?”
“종남파 대장로잖아.”
“네. 지나가다가 들었는데, 단전을 폐하고 사지 근맥을 잘랐대요.”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래?”
“네. 장문인이 직접 처벌했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평생 세오…… 뭐라고 하는 곳에서 갇혀 지낼 거라고 하더군요.”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군.”
기어이 처벌을 내린 모양이었다. 사실 그간 여광이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벌써 그를 처벌할 줄은 몰랐다.
“장문인께서 무척 힘드셨겠다.”
묵비가 불퉁한 어조로 말했다.
“왜 그렇게 위하는 거예요?”
“누구? 장문인?”
“네. 이해는 하지만, 사실 화를 낼 대상이 아닌 사람에게 화를 낼 정도로 경우가 없었잖아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어제 다 봤으면서 그런 말이 나오냐. 전쟁이라는 게 다 그런 거야.”
묵비가 수저를 놓았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분명 비극은 비극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잖아요.”
“응?”
“그간 우리가 벌였던 전투들도 넓은 의미에서 전쟁이었어요. 많은 적이 죽었고, 아군에도 사상자가 나왔죠. 하지만 유달리 종남 장문인에게 신경을 쓰는 것 같아요.”
그가 불쌍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묵비는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 이해는 하지만, 제 몸 바쳐 종남을 지켜 준 사람에게 그리 역정을 내고 가 버리다니? 이건 도리가 아니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새삼스럽게라도 감정을 풀어낼 수 있다면 좋은 거지, 뭘. 너무 나쁘게 보지 마라.”
“그래도…….”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고. 어쨌든 끝난 일이야.”
묵비가 한숨을 쉬었다.
연호정의 말이 맞았다. 이미 지나 버린 일, 굳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밥을 다 먹은 연호정이 수저를 놓았다.
“어, 든든하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떻게 하냐니?”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내로 떠날 생각이다. 내가 있다고 더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으니, 장문인과 회포를 푼 연후에 묵룡부로 돌아가야지.”
“묵룡부라…….”
묵비의 눈이 깊어졌다.
“나도 같이 가죠.”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맹으로 돌아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형님 혼자서 의정군을 이끌려면 고생깨나 할 거다.”
“내가 있든 없든 비슷해요.”
“인마, 그래도 네가 의정군 부장인데 허가도 없이 묵룡부로…….”
“허가받았어요.”
“엉? 누구한테?”
“군사님한테요.”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나와 함께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네.”
“갑자기 왜?”
“갑자기가 아니죠. 연 공자는 무림맹 전투 부대의 간부예요. 아무리 맹부 연합이 이뤄졌다 해도 언제 위험이 찾아올지 모르는데, 마음이 편하겠어요?”
“…….”
“의정군 전체를 묵룡부로 파견 보내려는 걸 군사님도 참으신 거라고요.”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은 언제나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좌충우돌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무림맹에서 볼 땐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울 것인가.
연호정의 이름값은 중원 명문 주인들조차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하물며 맹부 연합의 교각이나 다를 바 없으니,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리라.
“그것참.”
머리를 긁적이던 연호정은 문득 느껴지는 기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연 대수.”
“오셨습니까.”
구윤이 포권을 취했다.
“눈치 없이 식사 중에 왔구먼.”
무림맹에서의 위치가 높다지만, 그래도 한 문파의 장로가 이리 공손하게 인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만큼 연호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연호정이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마침 다 먹기도 했고요.”
“그렇구먼.”
구윤이 미소를 지었다.
“몸은 좀 어떠신가?”
연호정이 자신의 팔뚝을 툭 쳤다.
“괜찮습니다. 며칠 내로 거의 회복할 것 같습니다.”
구윤이 혀를 내둘렀다.
“정말 무시무시한 회복력이군. 무극을 개방한 고수들은 다 그런가? 언뜻 보기에도 몇 달을 정양해야 할 상처 같았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지쳤을 뿐, 치명적인 상처는 거의 다 피해 냈지요.”
“그래, 다행이구먼.”
구윤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일단 이것부터 받게나.”
“이게 뭡니까?”
“장문인께서 자네에게 직접 전해 주라 하셨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서신을 받아 펼쳐 읽은 연호정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시간을 비워 놓겠습니다.”
구윤이 한숨을 쉬었다.
“자네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다 들었어. 장문 사형의 슬픔이 지극하여 자네가 괜한 고생을 했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구윤이 미소를 지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그리 마음이 넓으니, 세간에서 말하는 벽산호장의 성격은 확실히 믿을 만한 게 못 되는 것 같네.”
“제 성격이 어떻다고 합니까?”
“똑똑하고 지혜롭지만, 다혈질적이고 용서가 없어서 쉬이 가까워지기 힘든 사람이라고 했네.”
묵비가 혼잣말로 ‘얼추 정확하네.’라고 중얼거렸다.
묵비에게 눈을 부라린 연호정이 구윤을 보며 웃었다.
“저녁에 장문인께 찾아뵙겠습니다.”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푹 쉬게. 먹고 싶은 것이나 불편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 주고.”
“지금도 충분합니다.”
“알겠네. 그럼 쉬게나.”
“알겠습니다.”
구윤이 사라졌다.
묵비가 서신을 바라보았다.
“장문인이 뭐래요?”
“저녁에 밥이나 한 끼 하자고 하시네.”
“……또 무슨 욕을 퍼부으려고요.”
“욕하려고 서신까지 보내는 사람이 어디 있냐? 미안한 마음에 밥이라도 같이 하면서 사과하시려는 모양이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연호정이 서신을 접어 품에 넣었다.
“최대한 몸 상태를 끌어올려 놔야겠다. 아, 그리고 황 단주와 후개 좀 불러 줘.”
“그러죠. 근데 갑자기 왜요?”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장문인께서 만나자고 하셨으니, 예상보다 더 빨리 뜰 때가 된 모양이다.”
그날 밤.
“장문인. 의정군 대수가 왔습니다.”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있던 순우가 입을 열었다.
“드시라 하게.”
끼이익.
문이 열리고, 연호정이 들어왔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장문인.”
“오셨는가.”
순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어제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보인다. 다소 지친 기색이었지만, 흥분과 좌절을 씻어 낸 두 눈에는 멀끔한 정기(正氣)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난 순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는 되셨는가?”
“예?”
“자네는 사흘의 시간을 말했네. 하지만 내 불같은 성격이 그 시간을 기다리기 어렵더군.”
연호정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순우가 검을 뽑았다.
“제아무리 위대한 고수라도 몸이 그 지경이라, 검을 받아 내라 할 수는 없겠군.”
“저는 괜찮습니다만.”
“잘 보게.”
순우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내디딘 순간, 순우의 눈빛이 바뀌었다.
번쩍!
그 자리에서 사라진 순우는 어느새 허공을 노닐고 있었다.
마치 등에 보이지 않는 날개라도 단 것 같았다. 저 멀리 청해, 구대문파의 하나인 곤륜파(崑崙派)가 있어 신선과도 같은 신법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하였다.
순우의 신법은 그 곤륜의 전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저런 무공이 종남에 있었던가.’
연호정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싸움이라 한다면야 순우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당장 몸을 다 회복하지 못한 지금이라도, 속전속결의 싸움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신법은, 그리고 신법과 함께 어우러지는 도도한 검법은 무학적 측면으로 봤을 때 누구라도 감탄을 금치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번쩍! 번쩍!
검광(劍光)이 번뜩이며 매서운 기세를 일으켰다.
마치 쏟아져 나오는 격류 앞에 선 것만 같다. 위력적이고도 연속적이다. 강검(强劍)인 동시에 연환검(連環劍)이었다. 같은 섬서에 있지만, 교검(巧劍)과 쾌검(快劍)으로 유명한 화산의 검학과는 궤를 달리하는 무공이었다.
콰르르릉!
들릴 리 없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산사태처럼 쏟아지는 거센 물살이 종국에는 하늘로 올라가 거대한 별 무리를 만들었다. 셀 수 없는 별빛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휘황찬란한 은색 파도를 일으켰다.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이었다. 종남 최고의 비기이자 화산의 매화검, 무당의 태극검과 함께 구파 검학의 최고봉을 논한다는 천하검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후우우우우웅!
화려한 힘의 발산을 뽐낸 순우의 검이 어느새 잠잠해졌다.
스르륵.
허공을 노닐던 순우 역시 바닥에 내려섰다.
연호정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막강한 검력을 뿜어내면서도 외물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검의 수급이 자유자재다. 맹 내에서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렇듯 작정하고 무공을 펼치는 순우의 힘은 구파의 어떤 장문인에게도 뒤지지 않을 듯싶었다.
순우가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떠했나?”
“굉장했습니다.”
“그래?”
“예. 그것이 종남의 비기 천하검이로군요.”
“잘 보았네. 천하검과 어룡와선보(魚龍渦旋步)일세. 이어룡(以魚龍)이라는 신법과 와선보라는 보법의 장점을 취해 만든 나만의 무공이네.”
“본 적은 없지만, 곤륜의 운룡대팔식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합니다.”
운룡대팔식은 소림의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과 함께 정파이대신법으로 불리는 전설의 무공이었다.
순우가 쓰게 웃었다.
“나는 천하검과 어룡와선을 이대제자들에게까지 가르칠 생각이었네.”
“…….”
“하나 대장로를 필두로, 몇몇 장로들의 반대에 부딪혀 전수하지 못했지. 전반부라도 전수할 생각이었는데, 그마저도 반대하더군.”
“그러셨군요.”
“만약 내가 이 두 무공을 아이들에게 가르쳤다면…… 그랬다면, 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연호정은 말없이 순우를 바라보았다.
흐린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순우가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말이지. 이미 지나 버린 일, 한은 될지언정 후회를 붙잡아 봐야 아무 의미 없겠지.”
“…….”
“일전의 일은 미안했네.”
순우가 고개를 숙였다.
“자네에게 그리 화를 낼 게 아니었어. 알고 있는데도 화를 삭이지 못했네. 일파의 수장답지 않은 처사였어.”
“아닙니다.”
“정말로 미안했네.”
진심 어린 사과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정히 그리 말씀하시니, 장문인의 사과를 마음 깊이 받겠습니다.”
“고맙네.”
연호정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멋진 무공을 보았으니 이제 밥을 먹을까요? 아침만 먹고 굶은 터라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입니다.”
“좋지. 하나 그 전에, 자네에게 줄 것이 하나 더 있네.”
“예?”
순우가 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태을단(太乙丹)이라는 걸세. 받아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