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13화 (713/963)

◈713화. 깨달음의 보고 (3)

“흐음.”

양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세상사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게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설마하니 음제가 홀로 튀어 나가 버릴 줄이야.”

백서가 고개를 조아렸다.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보내온 서신에 상세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연 부관의 보고는 언제나 사실이 명확하게 적시되어 있지. 한데 이유를 적지 않았다는 것은, 서신으로도 설명하기 애매하다는 뜻이야.”

“그런 듯합니다.”

양천이 한숨을 쉬었다.

“어떤 이유든, 참 바보 같은 여편네로군. 대체 어떤 사정이 있기에 그 흉한 곳으로 직접 찾아간단 말인가. 어딘지 알기나 할는지…….”

그의 한숨에는 묘한 안타까움이 어려 있었다.

아군이 될 절대고수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록 양천은 묵룡부의 수장으로서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흑도의 제왕이지만, 실제로 그의 인생과 함께해 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성천십삼좌. 양천은 그들 중 만나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 시대의 정점에 오른 이들로서 나름의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어찌 될지 모를 미래에 스스로를 던져 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으니 또 얼마나 컸을지 기대가 되는군.”

“예?”

양천이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서신에 적혀 있지 않은가. 음제 하은교와 짧은 갈등이 있었다고. 제아무리 녀석이 천재라도 그 격차를 메우기는 불가능에 가까웠을 터.”

“…….”

“얼마만큼 성장했을지 모르겠군.”

백서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부주님께선 연 부관이 성천의 고수들과 손속을 나눌 정도로 성장했다고 보십니까?”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야 없지. 이 짧은 시간 그렇게나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희대의 괴물이라도 불가능해. 다만…….”

“…….”

“보고서 두 번째 장에 적힌 내용. 제자를 미끼로 쓰면서까지 음제를 불러냈다…… 이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군.”

백서의 눈이 흔들렸다.

그 역시 그 부분을 읽고는 속으로 기함을 터트렸다. 나름의 방법을 생각하기야 했겠지만, 분노한 음제의 무력을 정면으로 받아 낼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야 말도 안 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양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떤 귀계를 생각해 냈다 한들, 성천의 강자들은 그 모든 걸 격파해 낼 만큼의 절대적 실력을 지니고 있어. 연 부관도 그것을 모르진 않아. 그렇다면 둘 중 하나겠지.”

“…….”

“성천의 무력을 받아 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거나, 아니면…… 가능성은 없지만 그 절대의 무력을 상쇄시킬 대비책이 있었거나.”

백서는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연 부관이라도 벌써 그만한 실력을 쌓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성천과 비벼 볼 만한 무력은 아니더라도, 그 무력을 받아 낼 만한 실력을 기르는 것은 불가능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예?!”

“녀석의 무공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어. 누군가 바늘로 톡 찌르기만 하면 그 무한한 가능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 말일세.”

양천이 피식 웃었다.

“정말 기대되는군. 이번 사천행, 그리고 섬서행을 통해 녀석이 얼마나 성장했을까.”

양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서가 고개를 조아렸다.

“석찬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되었네.”

“예?”

“제자 녀석에게 가야겠어. 지금도 홀로 머리를 싸매고 있을 텐데, 연 부관 생각을 하니 몸뚱이에 강제로라도 깨달음을 박아 주고 싶군.”

양천이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제자 녀석의 재능도 충분히 대단하다 할 만하거늘…… 다음 세대를 그런 괴물과 살아야 한다니, 참 힘들기도 하겠어.”

부선이 떠올랐다.

부족한 재능을 노력으로 메꿔 가며 기어이 자신의 후계자로 올라왔다.

그것만으로도 제자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하지만 그 가능성, 가치만으로는 이 거칠기 그지없는 흑도를 다스리기 힘들다.

‘연 부관을 뛰어넘을 수 있겠느냐?’

양천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정히 그를 따라잡기 힘들다면, 먼 훗날 내가 갈 때 네 앞의 장애물은 치우고 가 주겠다.’

그는 연호정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둘 사이의 관계가 나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부선이 하루라도 빨리 무극에 도달하기를 바랐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면서도.

* * *

“형님!”

한창 밥을 먹던 연호정 앞으로 강량이 찾아왔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잘 있었냐?”

“저야 잘 있었죠. 그나저나…….”

연호정의 몸을 살핀 강량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직 불안정하기는 해도 이 정도면 꽤 괜찮네요.”

“그러게.”

“생각보다 박살은 안 나신 모양입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 말이 장난이라는 것을 안다. 강량은 전쟁을 모르는 이가 아니다. 재회의 기쁨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누님.”

“오랜만이네.”

묵비를 본 강량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깃들었다.

“엄청 오랜만이네요. 잘 계셨지요?”

“물론이지.”

“역시 무지막지하십니다. 느껴지는 기도가 그때와는 또 달라요. 안 본 사이에 더 멀리 달려가셨습니다.”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너의 변화가 훨씬 더 큰 것 같다. 떠났을 때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어. 무종을 돌파한 것도 놀라운데, 거기서 훨씬 더 나아갔구나.”

연호정을 제하고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상대도 드물 것이다. 강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형님, 누님들에 비하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대단해. 나는 네 나이에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도 못했어.”

“하하, 오랜만에 만났다고 얼굴에 금칠까지 해 주시네요.”

회포를 푼 강량은 문득 한옆에 서 있는 청년을 보았다.

무사보다는 학자가 더 어울리는 외양이었다. 연호정 역시 달리 보면 뻣뻣한 선비 같을 때가 있지만, 이 청년은 이모저모 따져 봐도 도통 무사라고 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는 방천극을 들고 있었다. 이렇게나 무기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강량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이분은……?”

“소정광.”

연호정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화웅문이라는 문파의 부문주이자 군사다.”

“아, 예.”

소정광이 포권을 취했다.

“귀검의 후예를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엇? 나를 아시오?”

“정보를 빨리빨리 입수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문파라서요. 얼굴과 특유의 기도만 봐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합니다.”

“대, 대단하신데요?”

진심이었다. 아무리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한들, 외양과 분위기만으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은 보통 눈썰미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강량이 은근슬쩍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되는 겁니까? 새로운 일행입니까?”

“당분간은.”

“……그건 또 무슨 말이래요?”

연호정이 소정광을 바라보았다.

소정광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희 문주님도 오실 것 같습니다. 당분간인지 오래인지는 그때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지. 다만, 올 거라면 빨리 오는 게 좋을 거야. 우리는 묵룡부로 가야 하니까.”

소정광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묵룡부라…….”

“예상하고 있지 않았나?”

“어느 정도는요.”

“너희에게는 무림맹보다 묵룡부가 더 편할 텐데.”

“그런가요…….”

소정광이 한숨을 쉬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틀어 지소현을 바라보았다.

지소현의 얼굴은 꽤 어두웠다. 살기에 노출되어 입은 내상은 전부 나았지만, 아무래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강량과 여기까지 함께 오셨다는 건, 소저 역시 우리와 함께할 거란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지소현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음제께서는 중원을 벗어나셨소.”

“……!”

“본인의 일을 마치기 전까진 다시 돌아오지 못하실 거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그런 모양이었다.

지소현은 음제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 원망을 너무나 쉽게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스승이 보고 싶었다.

지소현이 탄식했다.

“모르겠어요. 제가 강 검사와 함께 온 건, 정말로 스승님께서 멀리 떠나셨는지 연 대수님께 확인을 받기 위함이었어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지소현이 눈을 감았다.

스승이 홀로 떠나 버린 이 상황. 제자로서 스승이 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목적 없이 인형처럼 살아가는 것도 도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경치 좋지 않소?”

“네?”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종남산의 경치 말이오. 꽤 좋지 않으냐, 이 말이오.”

“아, 네.”

지소현은 얼떨떨했다. 갑자기 종남산의 경치를 입에 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만약 음제께서 돌아오신다면 마지막에 머물렀던 이 부근으로 돌아오실 확률이 높지 않겠소?”

“……네?”

“장문인께 말씀드릴 테니, 그동안 종남산에서 지내시는 것은 어떻소?”

지소현은 깜짝 놀랐다.

“제, 제가 종남산에서요?”

“제자가 되진 않더라도,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오. 내가 봤을 때 종남인들은 하나같이 의(義)를 알고 정이 깊은 이들이오. 비록 외인이지만 음제의 제자라면 잘 품어 줄 수 있을 게요.”

“저, 저는…….”

“혼자 살아가기 막막하다면 함께할 수 있는 이들에게 의지하는 것도 좋지. 껄끄러운 게 아니라면, 종남과 연을 맺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보오.”

지소현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스승님의 무공을 배웠지만, 그뿐이에요. 저는 아직 모자란 게 많아요.”

“알고 있소.”

“함께한다고 해도 연 대수님께 폐만 끼치게 되겠지요. 만약 종남의 어른들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 될 거예요.”

솔직한 말이었다. 괜한 겸양으로 시간을 끄는 짓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장문인께 말씀드리리다.”

“다만.”

지소현이 고개를 숙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저라도 종남 장문인께 그런 부탁을 드리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열심히 스스로를 갈고 닦을 테니, 훗날 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어디라도 찾아가겠습니다.”

“솔직해서 좋소이다. 그럴 일이 있겠느냐마는, 정말 그런 일이 생기면 주저 없이 연락하겠소.”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묵비, 황석태, 패율, 강량, 소정광의 얼굴을 차례대로 본 그가 웃으며 일어났다.

“종남의 일은 이제 그들이 알아서 하겠지. 지 소저의 거취 문제도 해결할 겸, 함께 장문인께 갑시다.”

소정광이 물었다.

“곧바로 떠나시는 건가요?”

“여기서 더 할 일도 없는데 죽치고 있어 봤자 눈칫밥만 얻어먹을 거 아닌가. 갈 사람은 가야지.”

“……음냐.”

“묵룡부로 가는 길 중간중간 해야 할 일도 있으니, 개방을 통해서 연락을 보내면 될 거야. 진양이 바보가 아니라면 묵룡부로 들어가기 전에 찾아올 수 있겠지.”

연호정이 손뼉을 쳤다.

“자, 다시 움직입시다.”

묵룡부를 떠나 세상에 나온 지 수개월.

마침내 다시 흑도의 성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추운 겨울 날씨가 배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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