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17화 (717/963)

◈717화. 깨달음의 보고 (7)

여쭙고 싶은 것.

어딘지 모르게 빈틈이 있고 어리게만 느껴지던 말투와 달리, 윗사람을 향한 형식과 힘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게감이 살아 있는 질문이다.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문주, 아니 이제부터는 진양이라 하지요. 대수께서 진양에게 호통을 칠 때부터 줄곧 의아함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아마 지금의 진양도 마찬가지겠지요.”

“이해한다.”

“대수께서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를 아는 기색이었습니다. 이름 몇 번 들어 본 수준이 아니라 마치 오랜 시간 삶을 함께했던, 굳이 말하자면 전우를 대하는 듯했지요.”

역시나 날카롭다.

소정광은 오대신장 중 가장 지혜롭고 눈치가 빠른 자였다.

때때로 그들끼리 움직일 때는 군사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연호정이 대국을 보고 흐름을 읽는다면, 소정광은 놓치기 쉬운 것들을 하나하나 해석하고 판단하는 섬세함을 보여 주었다.

방향이 다를 뿐, 전략에 있어서는 연호정에 필적할 만한 귀재가 그였다. 그런 만큼 겉으로는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 왔을지언정 지금껏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 중 하나라면 모를까, 저와 진양 둘 다 대수를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대수께서는 우리를 친우 대하듯 하셨습니다.”

“그래.”

“설명해 주십시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설명이 필요한가?”

“진양은 문파를 해체하고 오고 있습니다.”

소정광의 눈이 번뜩였다.

유약하고 부드러운 인상 위로, 무서운 섬뜩함이 감돈다. 진지해진 소정광의 눈빛은 상대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강하고 날카로웠다.

“천품이니 열망이니 하는 것들을 다 떠나서, 그간 이뤄 놓은 기반을 완전히 해체하고 오는 길이란 말입니다. 그 자신이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아 보겠다고 의지를 천명했습니다만, 달리 말하자면 녀석은 그만큼 진지해요.”

“…….”

“얼렁뚱땅 넘어갈 일이 아니지요. 한 남자가 그간 살아온 인생을 다 버리도록 만든 사람이 당신입니다. 함께하기를 바란다면, 진심을 보임으로써 나름의 책임을 지셔야지요.”

“책임이라.”

“그렇습니다. 그 책임이란 돈을 챙겨 주거나 저 같은 놈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는 것 따위가 아닙니다.”

소정광의 목소리가 한층 더 깊어졌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를 어찌 아는지, 왜 그렇게 우리를…… 반갑고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는지에 대한 설명.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당신의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단호하고도 올바른 단어들의 나열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설명한다 한들 믿지 못할 것이다.”

“믿지 못할 얘기라고 설명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당신과 함께하겠습니까?”

“어지간히 믿기지 않는 속사정이라도, 진심을 보일 때의 나는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이 일은 그 범주를 넘어섰어.”

“그 범주를 넘어선 얘기가, 책임을 종용하는 우리의 의지를 짓누를 정도로 괴상한 겁니까?”

“…….”

“말씀해 주십시오. 그게 아니면 당신에게 무공을 배우지도, 당신과 함께하지도 않겠습니다.”

가만히 소정광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은 추웠지만, 달빛은 고왔고 별빛은 은은했다.

‘…….’

왜일까?

문득 연호정은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설명이라.’

흑암제 시절, 그들은 설명이라는 것이 필요치 않은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 함께 싸웠던 옛 전우는 자신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묵비나 강량과는 경우가 다르니까.

부하이자 형제이기도 했던, 친구이자 전우이기도 했던 사람의 끈질긴 종용.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네 말이 옳다.”

“…….”

“나의 출신, 나의 위상, 나의 지위만으로 따르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사람과 사람이 연을 맺는 데 그따위 잡스러운 것들은 필요치 않아. 네 말마따나 그간의 인생을 접고 오는데, 제아무리 황당무계한 속사정이라도 진심을 담아 말해 주는 것이 최소한의 책임이겠지.”

소정광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연호정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진한 감정. 서른도 안 된, 자신보다도 몇 살 어린 청년의 목소리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노익장의 한스러운 세월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흑제성.”

“……?”

“나는 흑제성의 주인이자 최초로 흑도를 통합한 왕이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 능력이 좋아서가 아니었어. 사람답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나를, 그러나 별다른 목적도 없이 살아온 나를 도와준 너희 덕에 흑도의 주인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소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흑제성이라니요? 흑도의 주인이라니요?”

“그렇다.”

“묵룡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묵룡부는…….”

“묵룡부는 이 시대 흑도의 정점. 그러나 흑제성은 사라진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의 단체이자, 투명해져 버린 미래에 존재했던 거대한 무력 집단이다.”

“도통 이해가…….”

“나는 한 번 죽었다. 그리고 과거로 되돌아왔다.”

“……?!”

“그리고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

“……예?”

연호정은 지난날을 담담하게 술회하였다.

구주명가의 침공으로 멸문한 연가. 유일한 생존자인 자신을 거두어 준 은사. 하산 후 흑도로 들어가 좌충우돌의 인생을 보냈던 지난날.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인연을 쌓아 가며 훗날 흑제성을 만들었던 역사. 삼교와의 전쟁.

연호정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잠긴 상태 그대로,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변화가 없음에도 거대한 감정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

소정광의 얼굴이 멍해졌다.

모든 얘기를 마친 연호정은 투명한 눈으로 소정광을 바라보았다.

잠시의 침묵 후.

“거짓말…….”

“…….”

“……같지는 않습니다. 표정이나 목소리만 봐서는요.”

연호정은 대답이 없었다.

소정광의 볼이 살짝 떨렸다.

“믿을 수 없을 거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까?”

“그렇다.”

연호정은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이런 얘기를 굳이 소정광에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언변이 좋은 사람이었고, 어떻게든 능구렁이처럼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정광의 당당한 요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아가, 그는 감수하기로 했다. 소정광이 자신을 미친 사람으로 알고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분위기에 묻어 나오는 강렬한 진심과 체념은 소정광에게도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죽어서 과거로 돌아왔다? 흑암제? 오대신장?’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말도 안 돼!’

진지하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연호정의 모습이 너무나도 진지하기 때문이었다.

소정광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연호정이 지금 진심을 드러냈다는 것을.

무력을 추측할 수는 없어도, 진심인지 거짓인지 정도는 구별할 수 있다. 그런 눈치도 없었다면 화웅문의 살림을 그렇게 불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소정광.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진심을 요구한 것은 너였다. 믿지 못할 거라고 말한 것은 나였어.”

“……!”

“나는 진심을 보여 주었다. 누구에게도 하기 힘든 얘기지. 믿을지 안 믿을지는 네 자유지만, 내 진심이 거짓으로 포장되었다고 여기지는 말아라.”

“…….”

소정광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의 말은 명백했다. 믿음은 자유이되 네가 바라는 책임은 졌다.

그리고 진심 어린 책임을 졌다는 것은 곧 이것이 진짜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더하여 이것을 믿는다면 함께할 것이요, 불신한다면 끝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였군.’

소정광은 깨달았다.

‘이 관계를 극단적으로 만든 것은 결국 나였어.’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들어야 할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침묵이 어렸다.

이번 침묵은 일각이 넘을 정도로 길었다.

그동안에도 연호정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소정광의 표정만 시시각각 변했다.

그리고 다시 일각 후.

“고생하셨습니다.”

“음?”

“하기 싫은 얘기였다면서요? 그걸 굳이 그렇게 꺼내 놓으셨으니 고생하신 거죠.”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믿나?”

“믿어야지 별수 있습니까. 그리고…….”

소정광이 쓰게 웃었다.

“대수께서는 달리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지금 저에게 있어서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지?”

“대수의 능력이 확실하니까요.”

“뭐?”

“분명 믿기 힘든 얘기지만, 저는 대수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거짓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

“진실이라면 요구를 들어준 것이고, 그게 거짓이라면…….”

소정광이 머리를 긁적였다.

“눈치 하나로 먹고산 저를 속일 정도의 걸물이란 뜻이니, 큰맘 먹고 인생 한번 걸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연호정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사람 인생 자기가 책임지는 거죠. 하지만 뭐…… 이번 한 번만큼은 댁한테 걸어 볼까요?’

기억 한편에 잠자고 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도 소정광은 그러했다. 진지하게 자신을 몰아세웠고, 자신의 대답을 듣고 나서는 인생을 걸어 보겠다고 하였다.

이후, 소정광은 자신의 명령이나 부탁 앞에 단 한 번도 의문을 표하지 않고 행동했다.

“다만, 관계를 어떻게 할지는 진양 그 친구가 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좋다.”

“그럼 얘기도 다 들었으니, 어디 그 잘난 무공부터 배워 보자고요.”

소정광이 개구쟁이처럼 물었다.

“흑제성의 오대신장, 난도혈귀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로 흑도를 주름잡았던 저는 어떤 무공을 익히고 있었답니까?”

“모른다.”

“……뭣이라고요?”

“모른다.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어.”

“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죠?”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내가 너에게 무공을 가르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너는 네 나름대로 무공을 개조하여 새로운 신공을 만들었어. 딱히 이름조차 짓지 않아서 다들 무명공(無名功)이라고만 했지.”

소정광이 휘파람을 불었다.

“저도 꽤 했나 보네요? 무공을 개조할 생각까지 하고.”

“천재니까.”

“……어험!”

“다만, 그 기반이 되었던 무공을 알려 주겠다. 당시에도 나는 이 무공을 알려 줬지. 발전은 네 몫이다.”

“좋습니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네게 알려 줄 것은 본가의 벽라진결(碧羅眞訣)이라는 무공과 비천혈응검(飛天血鷹劍)이다.”

“……?!”

소정광의 눈빛이 무섭게 흔들렸다.

“벽라진결은 연가의 오대신공 중 하나요, 비천혈응검은 본가의 비밀 세력인 비천검사들이 완성한 연가의 비기다.”

“여, 연가의 무공을 알려 주신다고요?”

“너의 근골과 혈도는 본가 무공을 익히기에 거의 완벽에 가깝다. 다만 풀어 내는 방법이 다소 사납고 잔혹했지만, 그 위력만큼은 어떤 고수라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연호정이 눈을 떴다.

소정광은 정신을 못 차리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무공을 알려 준다더니 육대세가의 비전을 알려 주겠단다. 누구라도 기겁할 것이다.

“이곳에서 이틀을 지낼 것이다. 단전을 유지한 채로 네 몸에 깃든 모든 진기를 불사르겠다. 그리고 그 육신에 새로운 힘을 담아내라.”

“이틀…… 어, 어떻게든 해 보죠.”

그때, 연호정이 품에서 태을단을 꺼내 소정광에게 던졌다.

소정광이 얼떨결에 태을단이 든 금낭을 받았다.

“새 무공이 네 몸에 안착하는 것을 도울 영단이다.”

“……!”

“투자가 아니다. 옛 전우이자 새로운 힘이 될 동료를 돕는 것이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그렇기 때문에, 너 역시 내게 실망을 안겨 줘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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