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19화 (719/963)

◈719화. 깨달음의 보고 (9)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부주님께서 직접 가신다고요?”

“왜? 그럼 안 되나?”

“…….”

가만히 양천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빈 잔을 내밀었다.

양천이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였다.

이전의 두 사람은 이렇지 않았다. 얼마나 오랜만에 만났든, 두 사람 사이에는 그 나름의 관계라는 것이 있었다. 순수하진 않아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관계.

하지만 지금 두 사람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 이유는 전적으로 연호정 때문이었다.

연호정의 성장이, 기도가, 존재감이 양천에게 너무나도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혹시나 했지.’

양천의 눈이 연호정의 몸을 훑었다.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무극을 열어 버릴 줄은 몰랐다.’

무극, 무한.

누구도, 심지어는 성천의 강자 본인들조차도 이 경지를 정의할 수 없어서 혼돈의 극치 무극, 끝이 없는 무한이라고 부른다.

자고로 인간은 온갖 물질들은 물론이요, 형이상학적인 개념에도 이름을 붙여 왔다. 그런데도 마땅히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 경지의 난해함이 입증된다고 할 수 있다.

연호정은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른 것이다.

무림사 최전성기인 삼백 년 전보다도 많은 고수가 나고 자랐다 평가받는 당금에도 중원에서 고작 열세 명밖에 오르지 못한 꿈과 같은 경지에 발을 들인 것이다.

‘삼교 놈들이 얼마나 많은 무극을 보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원과 같은 수라고 잡는다 한들 온 천하에 스물여섯이야.’

양천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중원과 새외 모든 고수를 통틀어 삼십 위권 안에 진입했다…….’

소름이 돋았다. 이건 재능의 차이라고 말할 수준조차 넘어섰다.

‘대체 이놈의 머리 위에는 어떤 하늘이 굽어보고 있는 것인가.’

인간으로 태어나 손에 넣을 수 있는 극한의 재능.

인간의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극단적인 노력.

천부의 재능과 상상도 못 할 노력에 더해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천운까지 함께했다.

그와 같은 여러 요소가 지금의 연호정을, 이 괴물을 탄생시킨 것이리라.

‘게다가.’

연호정의 눈을 보는 양천의 얼굴에 보이지 않는 당혹감이 어렸다.

‘뭔가…… 다르다.’

그가 아는 성천의 고수들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분명 달랐다.

하지만 그 다름이 반쪽짜리 무극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이놈은 분명 무극을 열었고, 그 안에 숨 쉬고 있었다.

그것도 뻔뻔하리만치 자연스럽게, 무서울 정도로 익숙하게.

“이제 그런 건 그만 내려둘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뭔 소린가?”

“오랜만에 봤다고 사람 시험하는 못된 버릇 말입니다.”

“못된 버릇이라니? 그거 섭섭한 말이군.”

“부주님은 알고 있습니다. 연호정이라는 놈은 권력에 미련이 없다는 것을.”

“…….”

“알고 있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돌아갈지는 누구도 모르는 법.”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부주인 내가 사라지면 연호정 그 발칙한 놈이 반란을 일으켜 묵룡부를 점거할지도 모른다…….”

“…….”

“부주님께서는 그 만에 하나의 가정을 절대 버릴 수 없을 겁니다.”

양천은 말없이 잔을 비웠다.

연호정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는 건…… 떠볼 생각은 아닌 것 같고, 단순히 제 반응을 보고 싶으셨던 겁니까?”

“그거 아나?”

잔을 내려놓은 양천이 날카로운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자네는 참 무서운 사람이야.”

“그렇습니까.”

“지금처럼 말 한마디 던진 게 전부인데도 상대의 속내를 속속들이 알아채 버리지.”

“워낙 부주님답지 않으셔서 그렇지요.”

“나답지 않은 모습이라도 이렇듯 순식간에 의도를 파악해 내기란 참 힘든 일일세. 이건 지능의 문제가 아니야. 내 휘하에도 자네처럼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그중 누구도 내 본심을 자네만큼 속속들이 파악하진 못하거든.”

“…….”

“자네는 참 통찰력이 좋군.”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칭찬 한번 어렵게 하십니다.”

“이건 단순한 칭찬이 아닐세.”

양천의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어렸다.

“경고이기도 하네.”

“…….”

“자네가 크게 성장할 줄은 알았어. 하지만 다 건너뛰고 무극을 열어 버릴 줄은 몰랐네.”

“거짓말은 그만하시지요.”

“거짓말이라?”

“하셨을 겁니다, 그런 예상은. 다만 확률을 낮게 보셨겠지요.”

“그 말이 그 말이지. 중요한 건 자네가 정말로 무극을 열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네.”

연호정이 잔을 비웠다.

양천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이제 예전처럼 자네를 대할 수 없어.”

“그렇습니까.”

“농담 따먹기가 허용되는 한계를 넘었어. 자네는 너무 빨리 성장해 버렸네.”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이번엔 연호정이 양천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저는 단 한 번도 부주님을 다르게 대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

양천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저를 어떻게 대하시든 상관 안 합니다. 하지만 묵룡부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하실 텐데, 거기에 아무 도움도 안 될 고민은 저버리시길 권고드립니다.”

“도움이 안 된다고?”

“전쟁이 끝나면.”

연호정이 양천을 똑바로 직시했다.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끝나게 되면, 그때는 저도 지금처럼 살갑게는 못 대해 드립니다. 부주님께서 정파 백도와의 힘 싸움에 들어갈 걸 알기 때문이지요.”

“…….”

“하지만 그전까지, 저에게 있어 부주님은 그저 부주님입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부주님이 우리와의 동맹을 깨고 저쪽 편으로 붙을 바보가 아니라는 걸 확신하거든요.”

“……만약 내가 저쪽에 붙는다면, 그때는 배신이 되는 것이로군?”

“그렇지요.”

“그때 후회할 생각인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안 그러실 거 압니다.”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지.”

“사음교주에게 한 방 먹은 치욕을 감수할 만큼 비굴하게 사시려고요?”

양천의 얼굴이 구겨졌다.

“자네는 참 사람 속을 잘 긁어.”

“안 그러실 거잖습니까? 애초에 그런 분도 아니고.”

“…….”

“배신의 기미는 흘러가는 상황으로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내려놓으십시오. 보다가 배신할 것 같으면, 그때 부주님의 수족부터 자르고 들어가겠습니다.”

결국 양천은 두 손을 들어 버렸다.

“말솜씨는 어디 안 가는군.”

“괜히 저한테 신경 쓰다가 정작 중요한 걸 놓치면 안 됩니다. 그건 부주님은 물론 우리에게도 손해입니다.”

“허허.”

“그냥 인정하십시오. 세상에는 별종도 있다는 걸.”

“스스로가 괴물이라는 걸 알긴 아는구먼?”

“몰랐고 인정도 안 했지만,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솔직히 기분 나쁜 말도 아니잖아요?”

양천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높은 평가, 잘 받았습니다.”

양천이 잔을 들었다.

“한잔하지.”

“좋지요.”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이 그대로 술을 넘겼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놈을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지.”

“후계자 안 건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귀신 같은 놈.”

“그 귀신 같은 눈치를 항상 적에게 겨누고 있겠습니다.”

“아, 됐어! 그만해! 이전처럼 대할 테니까 그만 위로하라고!”

연호정이 낄낄거렸다.

“놀리는 재미가 있으십니다.”

“하여튼 건방진 놈이야. 당대 천하에 있어 누가 감히 나를 놀리겠나. 능력 좋아서 산 줄 알아, 이놈아.”

“술이나 따라 주십시오.”

“싸가지 없기는.”

재차 연호정의 잔을 채워 주는 양천의 얼굴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런 얘기는 됐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

“비왕 말입니까?”

“그래.”

“직접 가신다면서요.”

“아직 안 끝났나?”

“하하.”

양천이 손을 탈탈 털며 말했다.

“사실 비왕이 어디서 모습을 드러냈든, 크게 보면 신경 쓸 일은 아니야. 호북성 균현에 나타났든 하남 숭산에 나타났든, 명성 높은 고수 한 명이 출현했을 뿐이잖나. 호들갑 떨 일은 아니지.”

“문제는 그가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는 고수라는 것이지요.”

“맞아. 어쩌면 그냥 나들이나 하고 싶어서 기웃대고 있는 건지도 몰라. 하지만 진심이 어쨌든, 우리는 그를 무시할 수 없어.”

“맞습니다.”

“전에 얘기했지? 음제와 비왕부터 시작하자고.”

“그랬지요.”

“음제는 떠나가 버렸으니 창왕 전에 비왕인데…….”

양천이 인상을 찡그렸다.

“딱히 이유는 없지만, 어째 가능할 것 같지가 않구먼.”

연호정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혹시 들으셨습니까?”

“뭘?”

“황궁의 상황 말입니다.”

“황궁?”

“못 들으셨군요.”

연호정은 후개에게 들은 얘기를 상세하게 전했다.

양천의 얼굴 위로 불쾌감이 떠올랐다.

“그런 정보가 있었으면 동맹인 우리한테도 지급으로 알려야 하는 거 아닌가?”

“묵룡부에서도 정보를 독점한 게 없진 않잖습니까.”

“이건 수준이 다르잖나. 숨길 게 따로 있고 안 숨길 게 따로 있지.”

“제가 속해 있는 동네라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닌데, 숨긴 게 아니라 미처 생각을 못 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이름뿐인 동맹이 되겠군.”

“그래서 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중간 다리로 말이지요.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 주는 역할로 박아 둔 게 접니다.”

연호정이 잔을 비웠다.

“조만간 연락이 올 겁니다. 저쪽도 정신이 없었을 테지요.”

“뭐, 그건 됐다고 치고.”

양천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어렸다.

“황궁 쪽 상황은 잘 모르지만, 이거 하나는 알고 있네. 우헌이라는 환관이 당금 황제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것. 어쩌면 역대 황제와 환관 사이 중에 가장 친밀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들어 봤네.”

“그래서 문제입니다.”

“고관 몇과 외척이라…… 대대로 환관과 외척은 권력을 양분했지. 덕분에 많은 황제가 허수아비로 지냈지만.”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자네 부친을 보냈으니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겠군.”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 시국에 출현한 비왕의 존재입니다. 만약 그가 황궁 쪽, 특히 우헌 태감과 함께하고 있다면 이번 출현 자체가 전투의 징조입니다.”

양천이 머리를 긁적였다.

“가능성이 있을까?”

“있다고 봅니다.”

“무림맹이 황궁 측 사정을 안 시점에 하필이면 비왕이 출현했다? 우연치고는 너무 허술하지 않은가? 난 오히려 둘 사이에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연호정이 잔을 들었다.

양천이 또다시 그 잔을 채워 주었다.

“조금 전 제가 드렸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음?”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본다고 했지요.”

“……음.”

“비왕이 황궁의 우헌 태감과 관계가 있다면, 굳이 이 상황에 나타난 게 우연일 리 없습니다.”

“그걸 입증할 방법이 없잖나.”

“물론 유추일 뿐입니다.”

양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자네 부친도 위험해. 우헌 태감이 이쪽 상황을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만약 우헌 태감과 비왕이 한통속이고 이쪽 상황을 다 알고 있다면, 굳이 비왕을 무당산에 출현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일단 제 아버지와 일행부터 잡고 시작하겠지요.”

“……음.”

“우헌 태감과 비왕이 한편이라는 전제하에, 비왕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다른 쪽에 있을 겁니다.”

“다른 쪽이라면?”

“외척.”

“……?!”

연호정의 눈이 서늘해졌다.

“무림을 믿지 않는 황궁. 그것은 외척도 마찬가지이니, 우헌 태감 쪽에 거짓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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