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4화. 반응 (5)
대전을 나선 다섯 사람.
“여전하군요.”
강량이 한숨을 쉬었다.
“여전할 텐데, 갑자기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입니다. 괴물인 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패율이 콧방귀를 뀌었다.
“경우는 없어도 그 무력은 진짜다. 성천의 이름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제각기 특성은 달라도 하나같이 한 분야의 한계를 돌파한 이들이니, 괴물 소리 듣기에 부족함이 없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패율이 강량을 바라보았다.
강량의 얼굴은 심란함 그 자체였다. 딱히 투지가 꺾인 것은 아니었지만, 안개로 뒤덮여 보이지 않던 산의 정상이 얼마나 높은 곳까지 솟아 있는지를 확인했으니 답답할 만도 했다.
패율이 거세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따라와라.”
“예?”
“술이나 한잔하자.”
“……위로입니까?”
“벌써 세상 살기 싫어졌어? 목에 구멍 하나 뚫어 줄까? 술을 두 배로 마실 수 있을 텐데.”
“쳇. 뭔 말을 못 하겠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면서 자리를 떴다.
스륵.
묵비 역시 거처로 돌아가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진양과 소정광의 얼굴이 여전히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진양이 소정광을 보며 말했다.
“정광.”
“왜.”
“문파 정리한 거, 잘한 짓일까 싶다.”
“이제 와서 그따위 말 같지도 않은 대사를 치냐고 외쳐 주고 싶지만…… 솔직히 나도 그래.”
진양이 고개를 저었다.
“연호정 그 양반이랑은 또 다르더군.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거야 비슷하지만…… 뭔가가 달라. 그런 느낌을 받았다.”
“동감이야.”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천하 정점에 오른 싸움의 제왕이라……. 저런 사람들이 대국(大局)을 논하는 세상에 휙 들어와 버렸단 말이지……?”
진양이 헛웃음을 흘렸다.
소정광이 머리를 긁적였다.
“뭐, 우리야 연 대수님한테 몸을 의탁한 신세니까. 다만 여기도 연 대수님의 영역은 아니니까 괜히 설치지 말자.”
“그래야 할 것 같다, 시벌.”
그때, 묵비가 입을 열었다.
“혹시 시간 있나요?”
두 사람이 동시에 묵비를 바라보았다.
괜스레 주춤한 묵비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우리도 술이나 한잔할까요?”
묵비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좋죠.”
소정광이 희희낙락하며 묵비 옆으로 다가왔다.
“제가 저 친구를 무공으로는 못 이겨도, 주량으로는 여러 번 박살 냈거든요. 기대하세요. 묵 부장님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 제가 시험 한번 해 보겠습니다.”
어색하게 웃던 묵비가 진양을 바라보았다.
떨떠름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던 진양이 슬그머니 팔을 풀었다.
‘……음냐.’
진양은 괜스레 묵비가 어려웠다. 차라리 연호정이 더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소정광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곰탱이는 묵 부장님이 어려운 모양이네요. 저희끼리 가죠.”
“그럴까요?”
두 사람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잠시 고민하던 진양이 큰 소리로 외쳤다.
“같이 가! 나도 목이 칼칼하다고!”
* * *
양천의 표정이 대번에 진지해졌다.
“비왕의 반응을 보시겠다?”
“그렇습니다.”
“……흐음.”
물끄러미 연호정을 바라보던 양천이 태사의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옆에 마련해 둔 탁자로 걸어갔다.
“술이나 마시면서 얘기하지.”
“또 술입니까? 그러다 정말 탈 나십니다.”
“어째 순수하게 들리지 않는구만. 전쟁에 요긴하게 쓸 패를 걱정하는 국수(國手)의 안타까움처럼 느껴지는데, 내 착각인가?”
“뭘 더 바라십니까?”
“……자네는 참 싸가지가 없어. 당가주가 그렇게 자네를 못마땅해한다며? 왠지 이해가 가는군.”
잠시 후, 두 사람이 잔을 놓고 마주 앉았다.
양천은 연거푸 세 잔을 마셨지만, 연호정은 술을 받기만 했을 뿐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양천은 그런 연호정에게 굳이 마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비왕은…….”
“그 전에.”
“예?”
잔을 내려놓은 양천이 방만한 자세로 물었다.
“음제가 왜 홀연히 사라졌는지부터 설명해 주게나.”
“아, 그걸 말씀 안 드렸군요.”
연호정은 하은교에 관한 얘기를 세세하게 풀어놓았다.
양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생사도 불확실한 자식 때문에 사음교의 본진으로 찾아간 건가? 사음교의 본진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그렇습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양천의 눈이 차가워졌다.
“인정(人情)이 많은 거야 탓할 일이 아니지만, 그 인정을 적재적소에 발휘할 지혜는 갖추지 못한 모양이야. 사음교에 찾아간다고 해도 자식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늘. 아니, 애초에 사음교가 자식을 데리고 있을 리도 없잖나?”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만, 그 일말의 가능성을 무시하기에는…….”
“알아. 그 양반도 속이 말이 아니겠지.”
뜻밖의 대답이었다.
“사람은, 심지어 무극을 연 우리라도 하나에 미치면 주위를 못 보게 되는 법이야. 음제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녀의 행동은 어떤 의미로는 한풀이에 가까울 터, 쌓이고 쌓인 한이 터져 버렸으니 그런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릴 수도 있지.”
“…….”
“그저 세상을 조금만 더 대국적으로 봤다면 좋았을 것을.”
양천의 목소리에는 같은 시대, 비슷한 영역에 오른 대가의 서글픈 선택을 향한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물끄러미 양천을 보던 연호정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 바보 같고 안타깝지만, 그녀가 그런 선택을 내렸다는데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겠지.”
“맞습니다.”
“다만…….”
순간 양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만에 하나 그녀가 사음교의 괴뢰(傀儡)가 되어 이쪽을 친다면, 그때는 구제할 수 없는 바보가 되는 거야.”
“그 또한 그렇지요.”
양천이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안 좋군.”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쓰이십니까?”
“당연하지. 그 사람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정도로 가치 없는 이가 아니야. 그만한 고수가 불행할 것이 분명한 미래에 몸을 던졌는데,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나.”
양천에게서 뜻밖의 일면을 본 연호정이었다.
양천의 안타까움은 진짜였다. 강렬한 욕망을 품고 천하를 제패하겠다며 날뛰던 패왕에게도 이런 인간적인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잔을 비운 양천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음제에 관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지. 더 말해 봤자 돌아올 것도 아니니.”
“좋지요.”
“비왕의 반응을 보겠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어떻게?”
“기 의원을 쓸 생각입니다.”
양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역신녀라…… 그 허연 애송이가 신화교 측 사람이었다는 건 잘 알고 있지.”
“예.”
“전에 자네가 말해 줬지. 뭐, 성녀(聖女)인지 신녀(神女)인지 모르겠지만 그쪽에서 꽤 대단한 위치라고?”
“정확히는 반쪽짜리입니다. 교주의 사생아니까요. 다만 반쪽이라도 신의 피를 이었으니, 휘하 교인 중 꽤 많은 수가 기 의원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합니다.”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해서, 이중 세작으로 활동하는 그녀를 지금 움직여도 되겠나? 잘 묵히고 있는 건 신화교뿐이 아니라 자네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황궁이 놈들의 손에 넘어가면 이번 싸움에서 무척 불리해집니다.”
“……음.”
“저는 황궁에 대해서는 남들도 아는 수준만큼만 압니다. 그래서 더욱 무림의 일을 철저하게 전담했지요. 하나 지금 당장 여유가 생겼고, 하물며 비왕이 그쪽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확인된 바에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연호정이 양천의 잔을 다시 채워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긴 쉽지 않겠지만…… 만약 이번 황궁의 권력 다툼에서 이쪽이 우위를 잡으면, 향후 수년 동안 놈들은 우리를 도발하지 못할 겁니다.”
“수년이라…….”
양천의 얼굴이 재차 진지해졌다.
“말하자면, 이번 황궁 사태를 유리하게 끌면 끌수록 우리의 준비 기간도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로군.”
“물론 삼교도 놀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중원에 퍼진 세작들도 활동을 멈출 테니, 따로 잡아내기도 힘들어지겠지요.”
“소강상태라?”
“그렇습니다.”
양천의 눈이 반짝였다.
말이 소강상태지, 몇 년의 시간은 삼교보다 중원에 더 큰 이득이 된다.
삼교는 지난 수십 년간 상처 없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공작을 펼쳐 왔다.
그리고 근 몇 년 동안 연호정을 위시한 무림맹의 힘에 수십 년의 공작 중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다.
감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삼교도 더는 참기가 힘들 것이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바에야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전면전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이성적으로 접근하면 전면전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수십 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테니까.
일대일 결투처럼, 전쟁 역시 결과를 장담하기 힘든 것이다. 하물며 크나큰 밑그림을 그리고 있던 삼교라면, 결코 무리하게 중원을 정벌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확률의 문제지.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 그 많은 귀계가 하나하나 박살 나는 와중에도 진짜 수뇌부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미친 척하고 칼을 뽑을 수도 있어.’
잔을 내려다보는 양천의 눈이 바쁘게 움찔거렸다. 생각이 많아진 것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네는 괜찮나?”
“예?”
“아직 몸도 덜 회복되지 않았나. 기우희를 써먹으려면 자네가 옆에서 함께 움직여야 할 텐데, 괜찮냐는 말일세.”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최상의 상태로 싸우는 무림인이 어디 있답니까?”
양천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연호정과 싸우기 전 자신이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시작한다면, 언제부터 하는 게 좋겠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겁니다.”
“빠를수록 좋다…….”
팔짱을 낀 양천이 빈 잔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빌어먹을.”
머리를 마구 긁적이는 양천의 얼굴에 짜증이 한 바가지나 묻어 나왔다.
“뭣 좀 해 보려고 하면 일이 터지고, 좀 쉴 수 있으려나 싶으면 옆 동네에서 불이 나고.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구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없네.”
양천이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묵룡대주.”
스르륵.
양천의 등 뒤로, 한 명의 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먼 무복을 입은 사내는 묵룡대의 대주로, 묵룡부주 양천을 수호하는 암중 호위 세력의 수장이었다.
“묵룡대 예비 대원들 얼마나 남았나?”
묵룡대주가 읍하며 말했다.
“백오십 명입니다.”
“그중 오십만 떼게. 특수 임무로 딸려 보내야겠네.”
“명을 받듭니다.”
스르륵.
묵룡대주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기가 막힌 은신술이었다.
양천이 연호정을 보며 말했다.
“기우희에게 묵룡대의 예비 단원들을 붙여 주지.”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그래도 됩니까?”
“안 되면 묵룡대주를 왜 불렀겠나? 만에 하나 기우희가 적에게 당하면 이번 작전의 근본이 무너져 버리는 거 아닌가?”
“그거야 맞습니다만…….”
“예비대라고는 해도 그 실력은 현역 묵룡대와 차이가 없어. 어떤 순간에라도 기우희만큼은 지켜 낼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천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좀생이 같은 무림맹 놈들보다 내가 훨씬 낫지? 팍팍 지원도 해 주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우리는 출신 안 따져. 동생한테 가문 물려주고 여기로 오게.”
“아직도 포기 안 하셨습니까?”
“그러게? 어째 포기가 안 되는구먼.”
연호정이 웃으며 일어났다.
“준비하겠습니다.”
“이보게, 호정.”
“예?”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나는 진심일세.”
“…….”
“진심이야.”
가만히 양천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출발 전에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연호정이 대전을 떠났다.
홀로 남아 대전의 천장을 올려다보는 양천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
“망할 놈. 차라리 죽어 버리지, 왜 자꾸 앞에서 아른거리누. 사람 심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