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27화 (727/963)

◈727화. 보이지 않는 눈 (2)

파아아앙!

땀 흘리며 권법 수련에 매진하는 부선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는 양천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괜찮군.’

예전, 단 한 번 보여 주었던 일권(一拳)의 형(形).

동작만 따라 한다고 똑같이 구현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부선 역시 그것을 알았고, 그 일격을 따라잡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았음인가.

아직 흉내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지만, 부선의 무공은 전반적으로 상승되어 있었다.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실력이야. 당장 문파 하나를 세워도 장(長)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겠어.’

특히 부선에게는 무공 외에 장점이 또 있었다. 바로 권모술수의 재능이다.

‘힘만 강해서는 조직을 경영할 수 없지. 힘을 뒷받침할 머리가 있어야 해.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부선은 충분히 대단한 인재라고 할 수 있다.’

보타암을 몰락시킬 때, 부선은 그곳에서 삼 년 동안 인내하며 활동했다.

보타암이 무너진 것은 전적으로 부선의 공이었다. 아닌 말로, 양천 자신이라 해도 그 시간 동안 인내할 자신이 없었다.

나아가, 급격하게 전개된 후계 싸움에서 상대의 약점을 정확하게 노려 물어뜯는 눈치까지.

‘좋다. 나쁘지 않아. 하지만…….’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권모술수와 경영의 머리는 또 다른 법이지.’

조직 하나를 무너트리기 위해, 혹은 상대의 약점을 물어뜯기 위해 인내하며 칼날을 세우는 치밀함.

조직 경영에 있어 그러한 수단 역시 꼭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나쁘게 말하면, 그런 잔머리에 가까운 지혜는 경영에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이 거친 흑도에서 여성 지도자를 보는 눈은 결코 곱지 않았다. 천하의 양천 제자라 한들, 자신의 그림자가 사라지면 곳곳에서 이빨을 드러내거나 이용해 먹으려고 눈에 불을 켤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지.’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다. 냉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달리 생각하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흑도는 원래 그런 세상이니까.

약자는 잡아먹히고, 강자는 약자의 시체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간다.

자신도 그랬고, 부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중압감을 이겨 내는 것은 오롯이 부선의 역할일 것이다.

‘…….’

말없이 부선을 보던 양천이 몸을 돌렸다.

‘그래도.’

그래도 스승인지라.

자식은 두지 않았지만, 이제 하나 남은 후계자인지라 자꾸만 눈에 밟힌다. 아마 부선이 이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안고 태어났어도 똑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양천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빨리 크도록 해라. 모든 걸 이룬 후, 완성된 세상을 물려줄 것이다.”

피식 웃던 양천은 문득 누군가를 떠올렸다.

‘연호정이라…… 연위.’

양천이 머리를 긁적였다.

“연가주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려나?”

* * *

연위가 검에 묻은 핏물을 닦아 냈다.

팽무강 역시 마찬가지. 완만하게 휘어진 곡도(曲刀)를 닦아 내는 손길에 여유가 묻어 나왔다.

연위가 물었다.

“본래 그런 칼을 쓰셨소?”

“그럴 리가 있겠소.”

칼집에 칼을 넣은 팽무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습격자들의 시체가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누구 하나랄 것 없이 복면을 썼는데, 그 수가 무려 오십이 넘었다.

“황후 폐하를 뵈러 가는 길인데, 그 흉악한 물건을 들고 올 수는 없지 않겠소.”

“그래도 대단하시오. 병기가 바뀌었는데도 실력에 편차가 없구려.”

“익숙한 정도의 차이일 뿐, 결국 다 같은 칼이외다. 연가주도 아실 텐데.”

“허허허.”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을 보는 도번은 아무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강하다.’

강호 육대세가의 좌장.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림 문파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무가(武家)의 주인들이다.

화려한 무명의 주인공들이지만, 기실 도번은 그들의 실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지금껏 그가 봐 왔던 무림인들은 무도하고 난폭한 놈들이 대다수였고, 실력이 괜찮더라도 전장에서 통할 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코앞에서 본 육가 가주들의 무력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북천장 도번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구나. 강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도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정번(洗政幡)의 짐승들을 이리 쉽게 제거해 버리다니.’

세정번은 역대 황제들이 암중에 키운 전문 암살자들이었다.

암살자라고는 하지만 중원의 살수들처럼 극단적인 은신술을 쓰거나 인파에 섞여 독침을 쓰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숨어들어서 단칼에 적을 해치운다. 그들은 암살자인 동시에 무사였고 군인이었다.

황제 폐하 수중에 있는 조직이니 그 실력은 말할 것도 없이 대단하다. 당장 세정번의 암살자 셋만 와도 도번은 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한데 두 사람은 반 각도 되지 않아 오십의 암살자를 제거해 버린 것이다.

도번은 혀를 내둘렀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우리는 무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어. 잡배들이 아닌 진짜 강자들의 무공은 황궁의 어떤 고수들도 대적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니, 대적 자체가 불가능하다.

당장 저 정도 실력자가 열 명만 붙어도, 내성까지는 무리겠지만 외성까지는 그대로 뚫릴 것 같았다.

‘이런 불합리한……!’

무공이라는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이런 강함은 반칙이다.

‘과거 종남파 문도들이 황궁의 고수들을 가르쳤다고 했거늘…… 그때의 고수들은 지금과 전혀 달랐단 말인가.’

그때, 연위가 말했다.

“이들의 정체를 아시오?”

“……?”

“둘러보시는 눈빛이 익숙하신 듯하여.”

도번의 눈이 깊어졌다.

“세정번 소속 암살자들이오.”

“세정번?”

“역대 상황께서 휘하에 둔 암중 조직이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문 암살 기관이지.”

팽무강의 눈빛이 바뀌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셨단 말이오?”

“……그것은 알 수 없소.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오.”

어쩐지 둘러대는 기색이 강하다.

“습격자들이 왔으니 속도를 내야겠소. 어서 마차에 타시오.”

“그럽시다.”

그렇게 일행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도번은 직접 말을 몰았다.

마차 안에 있던 제갈아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역시 시험이군요.”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팽무강이 한숨을 쉬었다.

“참으로 복잡하군. 연가주의 말씀을 듣고 설마설마했거늘…….”

“그만큼 황후 폐하 측에서도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말이 아니야. 세정번이 황제 폐하 휘하의 암살 기관이라면, 그들은 철저히 황령(皇令)에 의해서만 움직여야 옳다. 한데 황후 폐하께서 그들을 움직였다는 것은…….”

연위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지니고 계신 힘 중 일부가 황후 폐하에게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소.”

제갈아연의 눈이 깊어졌다.

“우헌 태감의 세력이 들불처럼 거세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황제 폐하의 힘을 흡수한 황후 폐하의 힘이 이 정도라면…….”

“필시, 황제 폐하께서 위태롭다는 것이지.”

팽무강이 눈을 감았다.

집중하여 기감을 확장하니, 마차를 끄는 말의 움직임과 고삐를 쥐고 흔드는 도번의 손놀림까지 느껴졌다.

“……그대로 가기로 한 모양이오.”

“음?”

“저들은 사전에 말했소. 북경으로 가는 샛길들을 안다면 안내해 줄 수 있겠느냐고.”

“……!”

“말들의 속도도 그렇고, 고삐를 쥐고 흔드는 손놀림에 거침이 없구려.”

“더 이상의 시험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인가.”

“그렇게 볼 수밖에 없소.”

팽무강이 인상을 찡그렸다.

“참으로 마음에 안 드는군.”

시험을 받아서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다.

아무 갈등도 없는 세정번의 암살자들을 죽여서도 아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칼을 휘둘렀고, 그러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맹공을 펼쳤으니까.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저쪽이 이쪽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를 지니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였다.

“처음에는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구나, 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토록 상황이 좋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손을 내밀 생각조차 하지 못하셨을 거요.”

“동감하오.”

“말하자면 현재 황후 폐하께서는 힘의 열세를 느끼고 계실지언정, 최악의 상황에 처하신 건 아니라는 뜻이오. 판을 뒤엎어 단숨에 승부를 본다는 느낌이 강하지.”

“…….”

“한데도 우리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수준이오. 직접 보고 듣지 못하는 이상 실감치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이렇게까지 어설픈 대처 능력이라면…….”

제갈아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면, 황궁의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더 좋지 못할 수도 있겠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연위가 의자에 등을 묻었다.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쉽시다. 황궁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소만.”

“한나절도 안 걸릴 게요.”

“충분히 쉽시다. 지금 걱정해 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소.”

“연가주 말씀이 맞소.”

그렇게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마차를 이끄는 말들의 체력은 놀라웠다. 가끔 속도가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황궁을 향해 달리는데도 발걸음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군.”

연위와 팽무강, 제갈아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마차가 멈추고, 밖에서 도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황궁의 비밀 성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수문위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였다.

쿵!

이내 그리 크지 않은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렸다.

재차 움직이는 마차는 이전과 같은 속도를 내진 못했지만, 이번에도 쉼 없이 달렸다.

“어떤 제지도 없이 그대로 가는군.”

“황궁은 그 어떤 곳보다도 크고 넓소. 비밀스러운 길이야 얼마든지 있을 거요.”

“수문위의 무력이 굉장했소. 북천장보다도 날 서 있었지.”

“그 주변에 은신한 고수들도 삼백이 넘었소.”

“통과하면 곧장 들어갈 수 있지만, 통과하지 못하면 이후 절대 넘볼 수 없다…… 위험하군.”

마차 안에도 점차 긴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상황이 어떻든, 힘이 강하든 약하든 대대로 대륙을 다스려 온 제국의 안주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제갈아연은 물론 연위와 팽무강 역시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한 시진.

중간에 외성을 통과하고도 반 시진을 더 달린 끝에, 마침내 마차가 멈추었다.

“내리시오.”

마차에서 내린 세 사람의 눈에 크나큰 궁전 하나가 보였다.

팽무강의 눈이 흔들렸다. 하북의 패자로 이름을 날리는 그였지만, 황궁에는 단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이곳이 황후 폐하의……?”

“지금부터 입을 닫으시오. 폐하의 명이 있기 전까지는 일체의 발언을 금하며, 섣부른 행동 역시 금물이오.”

“…….”

“무장을 해제하시오.”

세 사람은 순순히 도검과 비도를 무사들에게 맡겼다.

“이곳은 황후 폐하의 별궁(別宮) 중 하나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수많은 진법이 펼쳐져 있소. 그 진법이 어떤 종류인지는 아무도 모르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지만, 사실상 세 사람은 진법 따위보다도 이 궁전이 별궁이라는 사실에 더 놀랐다.

확실히 황궁은 다르구나. 세 사람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감탄이 일었다.

“이제 입궁하겠소.”

쿠구궁!

별궁의 궁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고개를 조아린 채 안으로 들어갔다.

두 개의 문을 더 통과한 그들의 앞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소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번이 읍하며 말했다.

“황후 폐하. 강호의 협사들이 폐하의…….”

그때였다.

“들이시게.”

순간 제갈아연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나른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담긴 염기(艶氣)가 엄청났던 것이다.

끼이이익.

소궁의 문이 열렸다.

도번이 고개를 숙였다.

“드시오.”

무수히 많은 절차가 생략된 황궁 진입.

세 사람이 자세를 낮추고 소궁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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