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32화 (732/963)

732화. 보이지 않는 눈 (7)

‘음.’

차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강량의 얼굴은 꽤 무심했다.

하지만 표정과 달리, 그의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뭔가 일이 터진 것 같기는 한데.’

헤어지기 전, 연호정의 얼굴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물론 돌아가는 시국이 워낙 살벌하다 보니, 목표 하나 잡고 나올 때마다 심각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또 달랐다. 비왕이라는 희대의 고수를 보러 가는 길, 거기에 기우희를 이용해 신화교의 반응까지 끌어내야만 한다.

그중 하나만 집중해도 머리가 아플 일인데,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람이 죽어 나가는 사건들이 줄줄이 터졌다.

심지어 감각 좋은 연호정조차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정도로 모호한 사건.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문득 강량은 연호정의 눈을 떠올렸다.

진지함으로 가득한 그 눈은, 민초를 향한 진한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많이 달라지셨어.’

처음 만났을 때도 연호정은 무림과 관계없는 이가 받는 피해를 두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연호정은 지금보다 훨씬 더 목적 지향적이었다. 최소한의 주변만 신경 쓸 뿐, 당장 내가 목표로 하는 일 이외의 사태는 대부분 무시하며 살았다.

지금의 연호정은 또 달랐다. 어떤 급한 일이 있어도, 올바르지 못한 일이 터지면 그것부터 바로잡고자 했다.

강량은 그런 연호정이 걱정스러우면서도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비왕이 이 근처에 있다면, 미지의 사태에 개입되었을 확률은 분명히 존재해.’

강량이 한숨을 쉬었다.

‘비왕이라…….’

그때였다.

“차 한 잔 더 드릴까요?”

점주가 웃으며 강량 앞으로 다가왔다.

강량이 말했다.

“추천할 만한 차가 있소?”

“우리 가게의 차는 하나같이 향이 좋지요. 다만, 무사님께서 원하신다면 추천을 해 드릴까 합니다만.”

“좋소.”

“취향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향은 무겁고 뒷맛은 깨끗한 게 좋소.”

“온도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향이 날아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뜨겁게.”

점주의 눈이 반짝였다.

“올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그가 아무도 모르게 탁자 위에 접힌 종이를 놓았다.

점주가 돌아서자, 강량이 은밀하게 종이를 펼쳐 보았다.

강량의 눈이 번뜩였다.

잠시 후, 찻집에서 나온 강량이 인적이 드문 산길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강량 앞에 한 명의 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지보다는 약초꾼에 가까운 외양이었다. 변장한 개방도였다.

강량이 물었다.

“현재 이곳 상황이 궁금하오. 비왕의 소재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비왕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워낙 신출귀몰하여, 발견했다 싶으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가 아직 이 인근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렇구려.”

“다만 의문의 무리가 싸우고 있습니다.”

“의문의 무리?”

“하나같이 엄청난 신법을 보유한 고수들입니다. 그 속도가 초절정고수 수준으로 보입니다. 실제 전력은 파악이 불가능하나, 정체를 알기 힘든 암기를 쓴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비왕이 제자들을 기른 것이오?”

“확인된 바 없습니다. 다만, 그처럼 뚜렷한 특성을 보이는 고수들끼리 서로를 죽이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서로?!”

“그렇습니다.”

강량이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개방도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목소리.

“말씀하시오.”

“정확하지는 않은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확인하기 어려운 사실이고, 알아보려 해도 접근이 불가능하지만…….”

“……?”

“삼군의 일인, 광혼귀군이 이곳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강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귀군이?!”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사흘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들의 격전지에서 사기(邪氣)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대부분의 흔적이 지워져 있었으나, 본방의 장로님 한 분께서 미세한 사기를 읽으셨습니다.”

“……!”

“격전이 벌어진 지 오래되었는데도 등골을 서늘케 할 만큼 사기의 농도가 높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금 무림에 그 정도로 고차원적인 사공을 연성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강량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개방도가 고개를 숙였다.

“이상이 현재 방현 인근의 상황입니다. 천만다행히도 민간인의 피해는 없습니다.”

“고맙…… 뭐?!”

“예?”

“민간인의 피해가 없다고?”

“그, 그렇습니다.”

“……이런!”

연호정은 만에 하나 민간인이 살해당했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고 직접 나섰다.

하지만 민간인의 피해는 보고된 적이 없고, 비왕에 광혼귀군까지 존재한다면.

목적을 알 수 없는 초고수들 사이에, 연호정이 끼게 된다면?

“호정 형님의 뒤를 따를 것이오! 형님에게서 연락이 오면 곧장 나를 찾아 주시오!”

파아앙!

강량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 * *

곡경이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월도를 견봉에 걸친 연호정이 무뚝뚝한 얼굴로 따라오고 있었다.

‘제대로군.’

무극을 개방한 고수들은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무공의 경지가 비상(飛上)한다.

하지만 고수마다 특성은 제각각이고, 무극을 열면 그 특성이 전보다 더욱 또렷해지게 된다.

당장 비왕만 해도 성천의 어떤 고수보다도 빠른 신법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속도의 한계라는 것을 돌파해 버린, 말 그대로 바람과도 같은 고수가 그였다.

연호정은 달랐다.

‘모든 면에서 탄탄하군.’

사군(死軍)들을 죽였던 그 무공.

달인의 경지에 오른 도법으로 순식간에 적들을 처리한 그 무공은, 후배지만 감탄이 나올 정도로 깔끔한 것이었다.

한데 제 뒤로 따라붙는 신법 역시 도법 못지않게 대단했다. 어지간한 경공술의 대가들은 흉내도 내지 못할 안정감이 인상적이었다.

무극을 열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경신술 자체가 뛰어났다는 뜻.

‘이놈도 우리와 비슷해.’

곡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영락없는 천재다.’

연성한 무공에 따라, 무극을 열면 신체의 나이가 확 줄어드는 이들도 많다.

그걸 감안해도 마흔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연배에 이와 같은 경지라면, 가히 천재 중의 천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 것이오?”

“동쪽이다. 너 때문에 시간이 지체됐어.”

“시간?”

“만날 사람이 있다.”

잠시 침묵하던 연호정이 재차 입을 열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딱히 서두르는 기색은 아닌 것 같소.”

곡경이 콧방귀를 뀌었다.

“알아서 움직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이도 안 좋고.”

“…….”

“우리가 아니면 섣불리 칼을 뽑지 않아. 유일무이한 장점이지. 그놈의 신중함이.”

목소리에서 불쾌함이 묻어 나왔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 안 맞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스르륵!

연호정이 곡경의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가는 동안 대화 좀 합시다.”

곡경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세상 참 많이 변했군. 십 년 전만 해도 흑도의 선후배 관계가 제법 깍듯했는데 말이야. 투왕의 제자라 이거냐?”

십 년 전이라?

“애초에 나는 그런 거 잘 몰랐소.”

“그래 뵌다, 이 싸가지 없는 자식아.”

“한데 십 년 전이라면, 선배가 십 년 전부터 흑도에서 활동하지 않았다는 뜻이오?”

뻣뻣한 듯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선배라고 불러 준다.

그에 곡경이 피식 웃었다. 딱딱하기는 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알량한 능력으로 상대를 경시하다가 목이 달아나는 후배 놈들을 수도 없이 봐 온 그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 무극을 열고도 자만하지 않는 연호정의 모습은 그런대로 신선한 것이었다.

“그런 셈이지.”

연호정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삼군만이 아니라 신선제왕의 고수들도 소재지가 명확한 사람은 많지 않소. 선배의 경우에도 소속이 따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

“남의 밑으로 들어갈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소.”

곡경이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 얼굴에 금칠이냐?”

“들었던 걸 말했을 뿐이오. 흑도 사상 최고의 고수에게 패하고도 그 밑으로 들어가진 않았잖소?”

스승이라는 말을 교묘하게 피해 가는 그였다.

곡경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걸 네놈에게 말했더냐?”

“선배에게 허락받을 필요는 없는 것 같소.”

“빌어먹을 노친네.”

“많이 아쉬워하셨소.”

“아쉬워하기는 개뿔. 제자 놈에게 전적 자랑이나 하면서 껄껄껄 잘도 웃어 댔겠지.”

어지간히 부끄러운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기실, 상대가 투왕 양천임을 생각하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무인으로서 곡경의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도 들을 건 들어야겠소.”

“뭘.”

“선배는 내게 목적을 물었고 내 소속이 어디인지도 알고 있지만, 나는 선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소.”

“알아서 좋을 것 없다. 뭐, 가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거고.”

가만히 곡경을 보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황궁 소속이오?”

파바바바박!

강하게 땅을 박차며 속도를 줄이는 곡경.

연호정 역시 곡경을 따라 속도를 줄였다.

“…….”

침묵이 흘렀다.

연호정을 노려보는 곡경의 눈빛이 무척이나 살벌했다.

“왜 황궁이라고 생각하느냐?”

맞군.

연호정이 말했다.

“무림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천하의 귀군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소. 그것도 부하처럼 보이는 이들까지 대동하고서.”

“…….”

“무림이 아니라면 관부겠지만, 귀군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단순히 관부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소.”

“…….”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이 아니고서야, 자존심 강하신 귀군께서 함께하겠소?”

곡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추측이다?”

“그렇소. 하지만 선배의 반응을 보니 사실인 모양이오.”

우두둑.

곡경의 양손에서 살벌한 소리가 울렸다. 열 개의 손가락이 저마다 꿈틀거리며 기이한 살의를 품었다.

연호정은 그것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걸 그저 유추했다고? 거짓말하지 마라.”

“…….”

“누구에게 들었느냐?”

“들은 적 없소.”

“마지막으로 묻는다. 누구에게…….”

“스스로 그것을 숨기고 싶었다면 부하들에게 화승총 비슷한 물건은 꺼내게 하지 말았어야지.”

“……!”

곡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화약 제조가 불법이라지만, 무림의 여러 문파에서 암암리에 손을 대고 있소. 그중 제일은 단연 당가겠지. 하나, 당가에서도 그처럼 섬세하고 위협적인 화약 병기는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알고 있소. 애초에 그러기도 힘든 상황이고.”

“…….”

“현재 화약의 주원료를 가장 많이 보유한 조직은 황궁이오. 소형화된 화승총을 만든다고 하면, 황궁일 가능성이 크지 않겠소?”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곡경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너, 제법 똑똑하구나.”

“칭찬 감사하오.”

“과연 칭찬으로 끝날지가 문제겠지.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수도 있는데.”

“난 아니라고 생각하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묵룡부와 무림맹은 손을 잡았소. 그리고 우리는 황궁에도 제법 신경을 쓰고 있소. 공동의 적을 처리하기 위해서.”

위험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만에 하나 곡경이 삼교 중 하나와 연관되어 있다면, 이 발언만으로도 연호정은 곡경의 살의 넘치는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곡경이 삼교에 속해 있지 않다는 걸.

오히려 삼교에 대항했으면 했지, 절대 그들과 한배를 타지 않을 인물이라는 걸 꿰뚫어 본 것이다.

“그리고 느닷없이 비왕이 출현했소. 우리는 그가 황궁에 암약하고 있는 모종의 집단에 소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오.”

“…….”

“와중에 선배는 우리가 비왕을 죽이고 싶어 할 거라고 말씀하지 않았소? 도대체 무얼 보고 그런 생각을 하신 거요?”

“…….”

“다 알고 있잖소. 부와 맹이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왜 동맹을 맺었는지도.”

스르륵.

곡경의 손에서 살의가 사라졌다.

연호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황후 폐하의 사람이시오?”

“같잖은 소리.”

곡경이 턱을 치켜들었다.

“이 대륙 천하에, 내가 따를 만한 사람은 천하의 주인 말고는 아무도 없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천하의 주인.

실질적인 영향력을 떠나, 수백 년 전부터 천하의 주인으로 내정되었던 단 한 명의 권력자.

“……황제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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