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0화. 피 묻은 황좌(皇座) (1)
“…….”
강량이 멀뚱멀뚱한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호정 역시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중에 곡경만은 평상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심각한 얼굴 한편에 의아한 기색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허허, 공기가 어떠한가?”
한옆의 오솔길에서 걸어 올라온 노도인이 허허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스르륵.
곡경의 눈이 뜨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연호정과 강량의 눈도 노도인에게로 향했다.
“공기가 참 맑지? 조금은 답답할 정도로 말일세.”
그들은 무당 본산에 오르지 않았다.
일행을 찾아온 이들은 구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노도인들이었다. 하나같이 초절정고수로서 완숙에 이른 기도를 자랑했지만, 막상 마주하자 무공보다는 그 특유의 뭉실뭉실한 분위기가 더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본산이 아닌 무당산의 이름 모를 봉우리로 세 사람을 초대했다.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초대였다. 막 전투를 벌이고 온 사람들, 하물며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심지어 초면인데도 노도인들은 마치 어제도 봤던 사람들처럼 일행을 대했다.
곡경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며 반대를 했지만, 노도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일행을 볼 뿐.
결국 연호정이 곡경을 설득했고, 그렇게 일행은 노도인들이 안내한 봉우리 정상에 올랐다.
그곳이 바로 지금 이곳이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빽빽한 나무뿐이요, 아래를 내려다보면 자욱한 운무만이 가득하지.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다가도, 가만히 공기에 몸을 맡겨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노도인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자연이란 게 본디 그런 법이야. 무섭고도 편안하지. 어렵사리 온 손님들이니 마음의 평온이나마 얻고 갔으면 하는 마음일세.”
그때, 곡경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군가?”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말투였다.
제아무리 성천에 이름을 올린 강자라지만 상대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도인이었다. 정체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외양이나 기도만 봐도 필시 전대의 인물이 분명했다.
그런 걸 떠나, 단순히 배분만 생각해도 곡경의 어조는 너무 무례했다. 물론 걷는 길이 다른 만큼 배분을 따질 이유는 없었지만.
노도인이 웃으며 말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라 보네만.”
“무당파 소속이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거기에 현역이 아닌 전대의 인물이라는 것 정도가 전부야.”
“허허허.”
“도호를 밝혀라. 그리고 우리를 굳이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유도.”
“참으로 급하구먼. 잠시나마 속세의 탁한 공기를 씻어 내고, 당산(當山)의 풍요로움을 느껴 보는 게 어떤가?”
“풍요로움을 느끼는 것과 당신이 정체를 밝히는 것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나?”
노도인의 눈이 커졌다.
한 방 먹었다는 듯, 크게 뜨인 두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 와중에도 노인답지 않게 흑백이 뚜렷한 두 눈은 무척이나 깊었다.
“어허허허! 자네 말이 맞네. 괜스레 가르치려 들었다가 되레 가르침을 얻어 버렸구먼. 이런 곳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속세의 화법을 잊어버린 모양일세.”
“다시 묻겠다. 정체가 무엇인가.”
노도인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저 나일세. 속세를 잊고 산세에 젖어 살다 보니 어릴 적 속세의 이름도, 도호도 다 잊어버렸네.”
“그런 헛소리를…….”
“나야말로 의문이로군. 내가 무당산의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당대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면서 도호를 알아 무엇 할까?”
“……?”
“허허,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강인한 힘으로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마음은 옹졸하기 그지없네그려.”
옹졸하다니?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무공, 천외천의 강자로 알려진 성천의 귀군에게 쉽게 할 말이 아니었다.
흑도 사파로서의 스스로를 내려놓고 황제의 사람으로서 행동하고 있지만, 곡경의 자존심은 예나 지금이나 보통이 아닌바. 제아무리 전대의 도인이라 해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
놀랍게도 곡경은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노도인의 말도 틀린 게 없었기 때문이다.
도사들은 초대했을 뿐이고, 그에 응한 것은 자신들이었다. 설득당했다고는 하지만, 그 성격에 정말 오르기 싫었다면 끝까지 버텼을 것이다.
결국 이곳에 온 건 노도인의 말마따나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무당파에서 무슨 수작을 벌여도 힘으로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이.
그러나, 그러한 사실과는 별개로 충분히 기분 나빠할 만한 발언이기도 했다. 한데 어인 일인지 평소와 다르게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떨떠름한 기분으로 이 기이한 노도인의 말을 곱씹어 보게 될 뿐이었다.
노도인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그저 초대했을 뿐이네. 초대에 응한 것은 자네들이야. 이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다면 언제든 내려가도 좋네. 누구도 잡지 않고, 술수 따위 부리지도 않아.”
“그 거짓말, 사실인가?”
“허허, 의심이 많은 자로다.”
노도인이 몸을 돌렸다.
“차를 타 올 터이니 산세 구경이나 더 하고 있게. 이대로 내려가도 좋고, 기다려도 괜찮네. 만약 다 가 버리면, 타 온 차는 우리가 마시면 그뿐이라네.”
그 말을 끝으로, 노도인은 다시 오솔길 너머로 사라졌다.
“……흐음.”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상황은 조금도 예상치 못했는데.”
“그러게요.”
강량이 입맛을 쩍 다셨다.
연호정이 강량을 보며 물었다.
“너,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냐?”
“저요? 저는 뭐 별거 없지요. 비왕한테 한 방 맞은 곳 빼고는 멀쩡합니다. 그것도 금방 나을 것 같은데요?”
“그러냐.”
주변을 둘러보던 연호정이 광명신단을 개방했다.
우우우우우웅!!
빛의 진기가 사지백해로 뻗어 나가며 감각을 활성화시켰다.
내상을 치료하던 진기의 일부를 감각의 활성화를 위해 떼어 썼다. 감각이 살아나니 비왕에게 당한 상처들에서 매서운 통증이 올라왔다.
‘된통 당하긴 했지.’
애써 통증을 무시한 연호정이 사방으로 진기를 퍼트렸다.
후욱!
은은하게 끼어 있던 안개들이 부드럽게 출렁이며 흩어졌다.
하지만 보이는 풍경은 여전했다. 시야가 조금 더 넓어졌을 뿐, 느껴지는 것은 이전과 대동소이하였다.
허허로움이 과해서 섬뜩했고, 동시에 안락했다.
말 그대로 신선이 사는 봉우리처럼 느껴졌다. 온 천하에 이 산봉우리 하나만 우뚝 서 있는 것 같은 고고함이 싫지 않은 기분으로 마음을 달래 주었다.
‘묘하군.’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분명 검선(劍仙)의 부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곡경을 설득하여 굳이 본산이 아닌 이곳의 초대에 응한 이유였다.
수많은 죽음과 하늘로 비상했던 절대고수들의 부딪침으로 온 산이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적어도 초절정고수의 감각이라면, 산밑에서 올라오는 충격파의 정체를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검선도 이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보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제법 긴장했던 그였다.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곳에 도착한 연후로 그러한 긴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부자연스러운 힘의 개입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곳이, 이 분위기가, 이 공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이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연호정이 곡경을 보며 물었다.
“선배.”
“뭐냐?”
“따로 느껴지는 건 없소?”
곡경이 콧방귀를 뀌었다.
“설득해서 데리고 온 놈이 그따위 소리를 해?”
“설득한다고 설득된 사람이 지금에 와서 그런 소리는 맙시다.”
“건방진 놈.”
곡경이 고개를 저었다.
“달리 수상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역시 그렇구려.”
“……아니, 아주 수상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겠군.”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무엇을 느꼈소?”
“사기(邪氣)가 일지 않아.”
“……?”
“홀린 듯 와 버렸지만, 과정이 너무 수상했어. 평소의 나라면 그 기분을 따라 알아서 진기가 사방을 훑었을 것이다. 한데 그러질 않는군.”
“선배의 직감도 이곳이 위험하진 않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로군.”
“그럴지도 모르지.”
마음이 편한 건지, 편치 못한 건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으면서도 곡경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있었다.
‘확실히 기묘한 곳이다.’
연호정이 평상에 놓아둔 월도를 매만졌다.
금속성 특유의 차가운 감촉이 일자, 새삼 이곳이 무당산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연호정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나저나.’
마음 편히 있으라고는 했지만, 그는 어디에서나 마음 편히 쉴 입장이 못 되었다.
몸이 편안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순간, 황궁에 계시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괜찮으실까?’
위험하실 것이다.
묵비에게 들은 바로, 아버지 역시 그간 엄청난 발전을 이루셨다고 했다. 직접 뵙지 않으면 그 수준을 몰라볼 정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셨다고 들었다.
하지만 크게 발전하셨을지언정 아직 무극을 열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무극을 열었다면 그 소문이 이미 중원 천하를 휩쓸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위험해.’
당장 황궁에 신화교의 무리가 진을 치고 있는 상황.
개중에 무극을 연 강자가 없을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니, 가능성만 생각하면 분명 굉장한 강자가 있을 것이다. 성천급은 아니더라도 최소 나 정도의 힘을 가진 자가 있을 공산이 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가슴 한편이 답답해졌다.
‘빌어먹을. 차라리 무당에 들르지 말고 기우희를 이용해 이쪽으로 시선을 돌릴 걸 그랬나.’
한번 걱정이 생기니 왠지 모를 안락함을 느꼈던 이 공간도 불편해지는 것 같았다.
가만히 월도를 바라보던 연호정이 곡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선…….”
순간 연호정은 깜짝 놀랐다.
“……선배?”
곡경이 없었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그곳이 있어야 할 사람이 귀신처럼 사라진 것이다.
오싹!
발끝에서부터 올라온 왠지 모를 섬뜩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벌떡 일어난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량아! 조심해라! 뭔지 모르겠…….”
말을 하던 연호정은 순간 괴이한 섬뜩함을 느꼈다.
그가 천천히 강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강량이 없었다.
후욱!
연호정의 몸에서 살벌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광명신단이 활성화되고, 각 장기에 스며들어 함께 내상을 치료하던 사신기가 일제히 불타오르며 사방천지로 그 위엄을 뽐냈다.
순식간에 전투 태세로 돌입하는 육신, 그리고 정신.
사방을 훑는 그의 안광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했다.
‘뭐지?’
곡경과 강량이 의식하지도 못한 새에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는 무극을 열고 천지의 기운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경지에 돌입해 있었다.
곡경이 아니라 신선제왕의 고수들이 기척을 숨긴다 해도 이 거리라면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뭐에 홀리기라도 했나?’
그때였다.
사박.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번쩍!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여 월도를 휘두르는 연호정.
‘……?!’
그의 월도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허어.”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차 한잔 대접하려고 멀고 먼 봉우리에서 굳이 예까지 왔건만, 냅다 칼부터 휘두르는구먼그려.”
그의 월도는 한 노도인의 목 반 치 앞에 멈춰 있었다.
말이 반 치지, 당하는 사람으로선 목이 잘리는 줄 알고 정신을 놔도 이상하지 않은 거리였다. 한데도 도사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당신은……?”
“이놈아, 칼부터 치우거라. 피 냄새가 자욱한 것이 숨쉬기가 답답하다.”
물끄러미 노도인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칼을 거두었다.
노도인이 씨익 웃었다.
“걱정만 많은 놈인 줄 알았더니, 감이 무지하게 좋구먼. 숫제 짐승이 따로 없도다.”
조금 전 일행을 찾아왔던 노도인과 닮은 듯하면서도 너무나 달랐다.
나이가 그렇게 들었는데도 키가 연호정과 별 차이 없을 정도로 컸다. 곳곳이 해진 푸른 도복을 입었지만, 얼굴이나 손톱에 때가 묻은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외에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여기 앉거라. 일행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선배와 강량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그럼 모르겠느냐? 따로 빼낸 것이 나이거늘.”
“……?!”
“걱정하지 말고 앉아라. 그럴 일도 없지만, 해치고 싶어도 이 안에서는 해칠 수가 없어.”
노도인이 키득키득 웃었다.
“하긴, 버릇 고쳐 주려고 주먹을 들었다가는 도리어 호되게 얻어맞을 것 같더구먼. 곡경이라고 했나? 세상에 그렇게 흉악한 놈은 또 오랜만이었어. 귀군이네 뭐네 말은 들었지만, 허! 귀신 군주라는 별호를 흡족해하다니, 그거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으이.”
“두 사람을 어찌…….”
“한데 말이야.”
노도인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순간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노도인의 눈빛이 너무나도 맑고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그 곡경이라는 놈보다 만 배는 더 흉악한 악취를 흘리는 놈이 네놈이야.”
“무슨 말이오?”
“망할 놈아, 내 어여쁜 제자는 잘 지내냐?”
제자라니?
순간 연호정의 입이 떡 벌어졌다.
“……검선 탁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