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42화 (742/963)

742화. 피 묻은 황좌(皇座) (3)

훅!

연호정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찰나지간 솟구치는 기운의 날카로움이 실로 신검보도(神劍寶刀)와도 같았다. 그 기운이 주변을 감싸고 있던 구름 같은 선기를 일순간 제쳐 버렸다.

화아아악!

연호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뜻하지 않게 흩어진 선기, 덕분에 모호한 기분은 사라졌고 오감은 분명해졌다.

‘보인다.’

이제야 연호정은 탁무자의 외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다 보였지만, 굳이 뜯어보고 인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그때와는 달리 평소대로 돌아온 것이다.

‘놀랍군.’

탁무자의 얼굴을 재차 확인한 연호정은 내심 깜짝 놀랐다.

전대에서도 최고 배분인 탁무자는 못해도 여든은 넘은 나이일 것이다.

그런데도 얼굴만 보면 사십 대 중년이라 해도 믿을 판국이었다. 머리카락은 하얗지만, 눈썹과 수염, 피부만 보면 아버지인 연위보다도 어려 보였다.

그럼에도 막연히 노도인이라고 인식한 것은 머리카락과 행동거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현기(玄機) 때문이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하면, 현역에서 활동하는 무당의 검사라 해도 믿겠다.

“대단하구먼.”

탁무자의 얼굴에선 생생한 놀라움이 묻어 나왔다. 그 많은 나이를 먹고도 표정이 어린애처럼 직관적이었다.

“그 질문이 자네에게 있어서 크나큰 역린이라도 되는 모양일세. 선기마저도 놀라 흩어질 기운이라, 무당 역사에 이 선기를 걷어 내고 오롯한 스스로를 드러낸 자는 열을 넘지 않거늘.”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탁무자가 멋쩍은 듯 웃었다.

“너무 기분 상해하지는 말게. 가끔은 우리도 멍해. 이 선기는 평생 도가의 무공을 익힌 말코들도 익숙해지기 어렵거든. 자네들만 모호함을 느끼는 게 아니야.”

“그런 건 아무래도 되었습니다.”

“그런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오십 년……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꽤 날이 선 반응이었다. 하지만 탁무자는 순순히 대답했다.

“외모와 무공, 성품과 지식은 속일 수 있다네. 그러나 이건 속일 수 없어.”

탁무자가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상단전.”

“그렇다네. 나이가 들어도 스스로를 가꾼 자들은 하나같이 상단전에 생기가 넘친다네. 상단의 신기만 보고는 그 사람의 나이를 유추하기 힘들지. 하나…….”

“…….”

“신기를 넘어 그릇에 새겨진 역사의 흐름까지 읽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연배를 추측하는 것도 썩 어려운 일은 아니지.”

말은 쉽다.

그러나, 당연히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무림에는 상단전의 개념조차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당장 연호정만 해도 상단전이라는 그릇, 그 그릇에 새겨진 역사의 흐름이니 뭐니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야. 설명이 어렵구먼. 여하간, 내 눈에는 그런 게 보인다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으면 좋겠군.”

“……그렇군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탁무자의 눈이 반짝였다. 호기심으로 물든 그의 눈빛 역시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았다.

“대답은 안 해 주나?”

“질문에 꼭 대답을 해야 합니까?”

“……오호?”

탁무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끼고 아끼는 제자 녀석이 세상 흉한 짐승 놈 품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가르쳤던 도검(道劍)을 버리고 흉검(凶劍)을 쥐기 시작했다기에, 내 그놈 상판대기를 보면 냅다 머리통을 두들겨 주겠다고 다짐했었지.”

“…….”

“한데 막상 보니 도통 두들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군. 흉한 걸 넘어 악랄하기 그지없는데도, 그 눈과 목소리에 나름의 도(道)가 느껴지지 않는가 말이야.”

연호정이 얼굴을 찌푸렸다.

“뜬구름 잡는 대화는 사절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도통 모르겠어요.”

“허허허.”

“옥청의 변화를 마뜩잖아하시는 거라면 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놈아, 옥청은 천하에 다시 나기 힘든 도기(道器)였느니라. 다소 비틀리긴 했지만 무재(武才) 역시 나 이상이었어. 얌전히 배우던 거 계속 배웠으면 지금쯤 단숨에 날아올랐을 터인데, 너 때문에 십년적공(十年積功)이 무산되어 버리지 않았더냐.”

“그럼 애초에 제자 관리를 제대로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뭐라?”

“저는 제 휘하에서 생존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스승으로서의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지만, 제 잘못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탁무자가 피식 웃었다.

“생존하는 법? 죽기 전에 죽여라, 이거냐?”

“정확합니다.”

“죽기 전에 한 놈, 두 놈 죽이기 시작하면 훗날 백, 천, 만의 생령을 불살라 버릴 터인데? 그건 숫제 살인마가 아니더냐?”

“살인마가 될지 안 될지는 그 자신의 역량에 따른 것. 젓가락질부터 가르쳐 준 건 노선배이니, 그저 제자를 믿으십시오.”

“으하하하하!!”

탁무자가 돌연 박장대소를 했다.

“세상에 이런 뻔뻔한 놈을 보게! 결국 네 잘못은 하나도 없다, 이거냐?”

“그렇습니다.”

“예끼, 이놈! 세상에는 불도 있고 물도 있는 법이다. 바람도 있고 흙도 있지. 너처럼 성난 불을 품은 녀석이라면 물처럼 도도한 옥청을 쫓아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기어이 같은 불로 만들어 버렸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뜬구름 잡는 대화에 소질이 없습니다.”

“허허허!”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탁무자의 웃음은 호탕하기 그지없었다.

한참을 웃던 탁무자가 웃음을 멈추고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웃음은 멈추었지만, 맑은 미소는 그대로였다.

“네 녀석 말이 옳다.”

“……?”

“사실 잡지 않은 건 나였다. 잡을 수 있었음에도, 가둘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느니라.”

“그러셨군요.”

“도기(道器)로서 키우고 싶었지만, 그건 내 욕심에 불과했느니라. 물론 완성만 된다면야 무당 무공의 총화(總和)이자 삼풍조사(三豊祖師)에 못지않은 신선이 될 수 있을 거라 자부했지만…….”

탁무자의 미소가 살짝 바뀌었다.

쓴웃음에 가까운 그 미소는 밝기만 했던 탁무자의 인상을 다소 어둡게 만들어 주었다.

“녀석의 마음속엔 언제나 속세를 향한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지. 고민이 많았지만, 나는 내 열성을 다해 녀석을 가르쳤다. 속세의 암울하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생활에 젖더라도, 언제든 중심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괜스레 저만 욕을 먹었군요.”

“이놈아, 믿는 것과 아까운 건 다른 것이다. 그만한 인재를 망쳐 버린 놈이니, 가르친 스승의 투덜거림 정도는 받아 줄 수 있잖아?”

“그래서,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뭐라? 푸하하하하!”

탁무자의 입에서 재차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강동의 연씨가문은 대대로 천하가 인정하는 협사를 길러 내기로 유명했지. 그런 정의로운 가문에서 어찌 너 같은 별종이 태어났는지 참 묘하기도 하다.”

묘하게 느끼는 것은 연호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그가 봐 왔던 무극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비범하기 그지없었다.

그 비범함은 타인이 쉽사리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만드는 위압감에 가까웠다. 적인 명극은 물론 음제 하은교나 암왕 당형, 심지어 투왕 양천까지도 그러했다.

제각기 전혀 다른 기도를 지닌 절대자들이지만, 누구도 그들 앞에서 정신을 멀쩡히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탁무자는 달랐다.

너무나 뜬금없으면서도 자연스레 이어진 만남.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통 전설로 칭송받는 고수 같지가 않다.

그저 어느 마을에나 있는 성격 좋고 지혜로운 노인을 보는 듯한 느낌.

탁무자 말마따나 검선이라는 칭호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재미있어. 이래서 세상은 재미있는 게지. 마음에 들진 않지만 검선이라는 이름 앞에서도 고개 뻣뻣이 들고 할 말 다 하는 놈은 또 오랜만이야.”

“노선배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이럽니다, 저는.”

“그럴 것 같다. 상판대기를 보아하니 누구 눈치 볼 성격이 아니야. 외려 상대를 제 울타리로 쑤셔 넣어 멋대로 가지고 놀 놈이지.”

“그 정도는…….”

“하지만 황제 앞에서는 그러면 안 될 게다.”

“……?!”

순간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물 흐르듯 이어져 온 대화 속 갑작스레 언급되는 황제의 존재는 연호정을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탁무자가 보란 듯이 턱을 괴었다. 역시나 도인처럼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황궁에 볼일이 있지 않느냐?”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뭘 어떻게 알아? 곡경이라는 흉악한 놈과 대화하는 걸 다 들었으니 알지.”

“……!”

그 먼 거리에서 나눈 대화를 다 들었단 말인가?

‘그게 가능한가?’

모르겠다. 절대로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왠지 이 탁무자라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기묘한 술수를 부릴 수도 있을 듯했다.

탁무자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걸 들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네 녀석의 그 굽힐 줄 모르는 성격으로 황궁에 들어가 봤자 너는 물론 네 일족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탁무자는 일족이라고 했다.

연호정의 일족이라면 곧 연가를 말함이었다. 그의 존재 하나로 강호 육대세가 중 하나인 벽산연가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저는 아직 황궁으로 들어갈…….”

“아직 확신은 내리지 못했겠지.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면, 기어이 황궁에 들어가겠지.”

“…….”

“무슨 일로 황궁을 그리 걱정스레 보는지 몰랐는데, 대화를 나눠 보니 알겠군. 너처럼 흉악한 놈이 남 걱정이나 하고 있었겠느냐? 걱정할 사람은 가족뿐이겠지.”

연호정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탁무자를 바라보았다.

탁무자의 미소가 진해졌다.

“좋은 눈이구나.”

“예?”

“흉중에 삼두육비의 괴물을 키우고 있지만, 그래도 제 가족은 아낄 줄 아는 놈이야.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완전히 어둠으로 빠지지 않는 것이지.”

왜일까?

탁무자의 그와 같은 발언을 들으니, 어쩐지 다급했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가만히 탁무자를 바라보던 연호정이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랬지.”

“옥청 때문도, 무당산 앞에서 벌어진 전투 때문도, 곡경 선배 때문도, 나아가 제 나이 때문만도 아니로군요.”

“물론 그렇다.”

“저와 독대하시는 이유, 곡 선배와 량이를 제쳐 두고 저와만 대화를 나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잡아 주려고.”

연호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앞일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바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지금 황궁으로 가면 자네는 살아남기 힘들 걸세.”

“왜 그렇습니까?”

“기준이 없거든. 해묵을 대로 해묵어서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했거든. 그래서 황궁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천만에 하나로 황제를 만나면 그 앞에선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거든.”

“대체…….”

“그것 때문에 내 제자도, 나아가 훗날 무당도 해를 입을 수 있겠다 싶었지.”

탁무자가 손가락으로 연호정을 가리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 때문에 말이야.”

연호정은 당혹스러웠다.

“저는…….”

“괴물처럼 흉한 놈이지만, 자네에게는 이제 막 협의의 불씨가 붙기 시작했어. 그런 걸 떠나서라도 자네는 자네가 품에 안은 사람들이 잘못되는 꼴을 절대 보지 못해.”

“…….”

“언젠가 선택을 내리게 될 거다. 네가 아끼는 사람들, 그리고 조금 덜 아끼는 사람들을.”

“예?”

“사천에서도 그러지 않았더냐? 개방의 용두방주를 중독시켰다고?”

“……?!”

“제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 한들, 어찌 그런 짓을 저질렀더냐? 정말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느냐?”

순간 연호정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탁무자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긴말 않겠다. 이 말 이외에는 딱히 할 말도 없어.”

“……?”

“흑도로 넘어가라.”

“뭐, 뭐라…….”

“고민하지 말고, 흑도로 가서 다 잡아먹으라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