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5화. 피 묻은 황좌(皇座) (6)
“자네들이로군.”
대장군부의 두 수장 중 하나. 궁내대장군(宮內大將軍)으로 불리는 문석은 황후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불혹을 넘긴 나이지만 무척이나 고귀해 보이는 외모였다. 사내답게 잘생겼지만, 또 달리 보면 섬세함이 돋보였다.
황후의 오라비, 당대 제국 군부의 최고 수장 중 하나로 꼽히는 사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귀족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연위와 팽무강, 제갈아연이 고개를 숙였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사사로운 예의는 접는다. 그저 그 인사가 전부였다.
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 천장에게 말은 다 들었을 걸세. 지금 바로 천인장의 의복으로 갈아입고 날 따르게.”
세 사람은 곧장 군복으로 갈아입고 갑주와 투구를 찼다.
제갈아연이 문제일 수 있었지만, 키가 컸기에 두툼한 갑주를 입고 투구까지 쓰자 제법 봐 줄 만했다.
애초에 궁내대장군 휘하 장수들은 전선에서 날뛰지 않는지라 우락부락한 사람이 적었다. 그 특성을 생각하면 세 사람의 변장은 더더욱 그럴듯했다.
“서두르지.”
대장군부에서 황제의 어전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문석과 세 사람, 그리고 오십여 명의 병사들은 꽤 빠르게 움직였다. 뛰지는 않았지만 걸음 자체가 빨랐다. 문석이 얼마나 마음이 급한지 알 수 있었다.
보조를 맞춰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던 팽무강이 연위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상하군.]
연위가 눈을 빛냈다.
그는 팽무강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욱 선명했다.
연위의 내공 경지가 팽무강보다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하루하루 연마한 내공과 감각은 이미 육대세가 정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귀신이 등 뒤에서 따라붙기라도 한 것 같소.]
[그렇소. 물론 귀신 따위는 아니겠지만.]
[어떻게 하시겠소? 멈춰야 할 것 같은데. 이 기묘한 시선, 누가 어디서 보는진 모르겠으나 무척이나 불길하오.]
고개를 끄덕인 연위가 입을 열려다 이내 꾹 닫았다.
팽무강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오?]
연위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한층 날카로워진 눈으로 주변을 훑어볼 뿐이었다.
팽무강의 눈이 깊어졌다.
‘뭔가 있는가.’
그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연위의 무공이 자신보다 한 차원 높다는 것을.
지금 역시 자신이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포착한 것이 분명했다.
팽무강은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북팽가는 전통 있는 무림의 명가였다. 역사만 따지자면 연가보다 훨씬 더 깊었다.
도(刀)의 조종이라고까지 불리는 명가의 주인이라면 천하 어디에서도 통할 이름이요, 무력인바. 그런 자신조차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대체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우헌 태감, 아니 신화교의 주구는 얼마나 기괴한 고수들을 이곳에 포진시킨 것일까.
팽무강은 제갈아연에게 조심하라는 전음을 날린 후 왼손을 도집에 올려 두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척!
선두에 선 문석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상하군.”
문석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왜 이리 사람이 적은 게지?”
어전까지는 몇 개의 궁문을 넘어야만 했다. 그리고 일행은 벌써 세 개의 궁문을 넘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궁을 호위하는 무사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적어졌다.
비록 전장에서 날뛴 적은 없지만, 문석 역시 무예에 출중했다. 나아가, 피비린내 가득한 궁내 정치에 이골이 날 대로 난 사람이기도 했다.
문석이 저 멀리 궁문 앞을 지키고 있는 무사에게 외쳤다.
“대장군부 소속 궁내대장군 본인이다. 제삼 궁문 수문위는 이리로 오라.”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궁내대장군이자 황후의 오라비 되는 사람이다. 수문위가 아니라 어지간한 고관이라도 헐레벌떡 뛰어와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수문위는 미동도 없었다. 투구를 꾹 눌러쓴 채 정면을 응시하는 자세 그대로, 한 자루 창을 쥔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문석의 눈이 깊어졌다.
“들리지 않느냐! 나는 대장군부의 궁내대장군 문석 본인이다! 당장 이리로 오너라!”
그때, 연위가 문석에게 전음을 날렸다.
[대장군. 연가의 가주입니다.]
문석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연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육 궁문부터 제사 궁문까지, 근처에 호위를 서고 있던 금군(禁軍)과 수문위들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우두둑.
문석의 주먹에서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신이 통과해 온 궁문을 지키던 금군들이 자리를 비웠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헌!!’
문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 녀석들은?”
굳이 전음을 쓰지 않는다.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는 대장군이었다.
연위 역시 더 이상의 전음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죽었습니다.”
“……죽었다고?!”
말없이 서 있던 팽무강이 가볍게 지풍을 날렸다.
팅!
무형의 지풍이 수문위의 투구를 스치고 지나갔다.
털썩!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수문위가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문석의 눈이 흔들렸다.
제갈아연이 말했다.
“이곳이네요.”
연위와 팽무강이 제갈아연을 바라보았다.
제갈아연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제삼 궁문과 제사 궁문 사이. 자연스레 올라온 궁벽들과 점점 좁아지는 지형.”
“……!”
“습격에 용이한 지형이에요.”
워낙 넓은 지대였기에, 궁문을 직접 통과한 연위와 팽무강도 지형이 좁아지고 있는 줄은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진법을 공부하며 연마된 제갈아연의 공간감은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문제는 너무 늦게 알아챘다는 것이다.
“뚫고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군기(軍氣)가 접근하고 있다.”
훅!
아무 소리도 없이, 생각보다 훨씬 은밀한 기세가 제삼 궁문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나쳐 온 궁문 후방에서도 점차 군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건?!”
문석은 당황했다.
팽무강이 빠르게 말했다.
“병사들은 모두 대장군을 둘러싸시오!”
병사들은 당황하여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
문석이 팽무강을 바라보았다.
팽무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석이 입을 열었다.
“너희는 나를 보호해라.”
사사사삭!
병사 오십이 문석을 둘러쌌고, 연위와 제갈아연이 제삼 궁문 쪽에, 팽무강이 후방 제사 궁문 쪽에 자리를 잡았다.
문석이 한층 어두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금군(禁軍)인가?”
제갈아연이 말했다.
“금군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군기가 이토록 정연하고 은밀한 이동이 가능한 군인들이라면…….”
“금군이 맞군.”
문석이 눈을 감았다.
“늦어 버렸는가.”
이런 지형, 이런 시간에 금군이 앞뒤로 에워싸기 시작했다.
누가 이들을 움직였는지는 분명했다. 황후라면 더 빨리 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지, 금군을 동원하여 막으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우헌 태감이다.
태감이 궁내대장군 문석의 어전행을 막아 버린 것이다.
‘아니, 막는 것에서 끝날 리가 없어.’
제갈아연의 총기 넘치는 눈에 긴장감이 차올랐다.
‘대장군은 소수나마 병력을 이끌고 어전으로 향하고 있다. 황제 폐하의 호출이 없는데도 움직였어. 이것은 그 자체로 반역이 될 수 있다.’
확실한 반역이 아니라 반역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은, 그만큼 황실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실의 힘이 약해졌다 한들 법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사실상 문석의 행동 자체가 적에게 구실을 만들어 주는 행위였으니, 지금의 이 상황은 예견된 불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알고 있었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설마 그럴까 싶으면서도,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행이 문석을 말리지 않은 것은,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
“가주님.”
“그래.”
“아무래도 일을 좀 거칠게 진행해야 할 것 같아요.”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참 뒤에 떨어져 선 팽무강이 특유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할 일을 하시오. 며칠이고 막아 줄 테니까.”
문석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기색이 어렸다.
이게 무슨 말인가?
연위가 말했다.
“대장군.”
“말씀하시게.”
“대장군께서 지니고 계신 신패 중 하나를 내어 주십시오. 대장군을 증명할 수 있는.”
의중을 알 수 없었지만, 문석은 연위의 말대로 했다. 뭐라도 방법이 있다면 써야 하는 판국이었다.
연위가 문석에게서 옥패 하나를 받았다. 공식적으로 대장군을 증명하는 패는 아니었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 정도로 문석이 아끼는 물건이었다.
품에 옥패를 넣은 연위가 투구를 벗었다.
“……?!”
연위를 보던 문석은 순간 말 못 할 섬뜩함을 느꼈다.
시린 달빛 아래 드러난 연위의 얼굴.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은 강단 넘치는 성품과 강철처럼 단단한 주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그 눈이었다.
새파랗게 빛나는 두 눈에서 수천 자루의 검이 튀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형형하여 위엄 이상의 위압감을 풍긴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제압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연위를 보며 깨닫는 문석이었다.
연위가 제갈아연에게 말했다.
“팽가주님과 함께 이곳을 지키거라.”
“가주님.”
“……?”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말라.”
스르릉.
허리춤에서 검을 뽑은 연위의 몸에서 일순 무지막지한 박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제부터 연위가 아닌 연가의 가주다.”
터어어엉!
땅을 박찬 연위가 순식간에 제삼 궁문 앞까지 도달했다.
문석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무, 무슨 짓인가!”
“연가주 말대로입니다.”
제갈아연이 무거운 얼굴로 허리춤에서 두 자루 비수를 뽑아 들었다.
“이제부터는 무림인들의 시간입니다, 대장군.”
* * *
‘……?’
무릎을 꿇고 앉은 우헌의 눈이 번뜩였다.
‘제때 움직였군.’
유독 붉은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금군을 움직인 것은 당연히 그였다.
황실의 금군은 단순히 뛰어난 무장들로 이뤄진 집단이 아니었다.
그간 놀라운 무공으로 황실의 성벽을 넘나든 무림인들이 꽤 많았다. 물론 그들 모두가 잡혀 극형에 처해졌지만, 중요한 것은 애초에 그런 놈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현재 금군의 병사들 모두가 황실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고, 그들 전부가 은밀하게 기동하는 법과 집단전, 소수 병력으로 붙는 전투 등에 능했다.
‘물론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신화교의 호교무공을 익힌 그의 눈에, 금군이 배운 무공은 한참이나 수준이 낮은 것이었다.
하지만 금군의 숫자와 전투 방식만큼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것. 무극을 연 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고작 몇 명의 고수로는 금군 병력의 일 할도 감당키 힘들 것이다.
“그래서.”
용상에서 흘러나오는 나른한 목소리.
사라지지 않는 위엄, 그러나 위엄보다는 귀찮음과 몽롱함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이 시간에 짐을 여기에 앉힌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우헌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워 도통 인세의 사람 같지 않은, 그러나 굳을 대로 굳어 버린 황후가 있었다.
“황후께서는 어찌 이곳에 오셨소?”
황후가 입을 열기 전.
우헌이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반역도당에 대해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