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3화. 가면 쓴 용 (3)
“이놈들! 뭣들 하고 있는 것이야!”
황보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 이 역적들을 잡아라! 여의치 않으면 죽여도 좋다!”
“어허이.”
팽무강이 장도로 황보적의 얼굴을 툭툭 쳤다.
그야말로 치욕스럽기 그지없는 행위였다. 당하는 황보적이나 그걸 보는 금군의 병사들이나, 하나같이 분노로 치를 떨 정도였다.
“잘들 생각해. 간신배의 농락에 다 죽을 생각인가? 명예도 좋고 원칙도 좋지만, 아무 데나 목숨을 거는 건 지나치게 억울한 일이야.”
“당장 이놈들을 죽여라! 내 목숨은 상관하지 마!”
황보적은 진심이었다.
그것은 금군이나 팽무강, 나아가 제갈아연과 문석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번쩍!
금군의 눈빛이 변했다.
팽무강은 내심 긴장했다.
‘진짜 부딪치면 좋지 않은데.’
작정하고 생사결을 논한다면 족히 백은 죽이고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곳에 죽어서는 안 될 아군이 있다는 것이다. 제갈아연도 있고, 어전으로 향한 연위도 있다. 하물며 문석이나 문석이 데리고 온 병사들 역시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자신들과 대치하고 있는 금군들 역시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 현재 연위가 황제에게 도달했다 하더라도, 저쪽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면 모르되 그전까지 섣부른 부딪침은 지양해야 할 터였다.
“흐음,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팽무강이 씨익 웃었다.
“좋아! 그럼 제안 하나 하지.”
“닥쳐라! 금군은 역적과 거래 따위는 하지 않는다!”
“자네나 좀 닥치게. 입 냄새 나네.”
황보적의 눈이 퉁방울처럼 튀어나왔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 저따위 농담이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안 그래도 창백하던 황보적의 안색이 그야말로 새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팽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나라도 자네들을 다치지 않게 제압할 수는 없어. 그렇다고 싹 죽이고 달아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지.”
“……무슨 개소리를!”
“일각.”
“……?”
“일각 동안만 기다리자고. 혹시 아나? 어전에서 우리를 물러나게 할 황명이 내려올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아니, 말 되는 소리야. 우리는 황궁을 바로잡기 위해서 왔거든.”
“뭐, 뭐라고?”
“폐하께서 간신배를 내칠 각오를 하셨다면, 그때부터 우리와 자네들은 한배를 탄 것과 같아.”
팽무강이 금군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네들 모두 뼈가 끊어지고 살점이 떨어지는 고행을 겪으며 금군에 들어온 역전의 용사들이 아니던가. 금군은 황제 폐하와 황궁을 지키는 영광된 군대이니, 간신배 무리를 잡아내는 것 역시 그대들의 일 중 하나야.”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했다.
금군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황보적의 말대로 철저한 상명하복으로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간신배를 앞에 두어도, 그들을 잡으라는 칙명이 내려져야만 칼을 뽑아 든다. 자율적인 판단은 절대 금물인 조직인 것이다.
“자네들 중에 폐하를 농락하고 국력을 소모한 간신배와 손을 잡은 일당이 있다면 우리를 공격해도 좋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조금만 참게. 일각 정도면 자네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시간은 아닐 거야.”
황보적이 소리쳤다.
“괴이한 논리로 금군의 충심을 흔들지 말라! 뭣들 하고 있는 것이야! 어서 빨리 역적들을 죽여라!”
“이보게들.”
훅!
팽무강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파가 솟구쳤다.
어딘지 모르게 유들유들하고 빈틈이 있어 보이던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
그 압도적인 기파가 순식간에 금군을 휩쓸고 지나갔다. 창칼을 고쳐 쥐었던 병사들의 얼굴이 일순 창백해졌다.
그것은 황보적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거리가 너무 가깝고 내공까지 봉쇄된 판국이라, 그가 받는 압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굳이 그렇게 피를 봐야겠나?”
“…….”
“우리는 황제 폐하의 금군인 자네들과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야. 진짜 역적을 잡으러 온 것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들이 우리를 잡으려 든다면…….”
사아아아악!
천지를 메우는 건곤미허신공(乾坤彌虛神功)의 패력에 위엄 가득한 살기까지 실렸다.
“그 즉시 나와 내 일행은 대장군 일행을 놔두고 어전으로 날아갈 것이다.”
“……!!”
지극히 황당하고, 황당함만큼이나 위협적인 협박이었다.
그들은 팽무강의 무력을 보았고, 순식간에 어전 방향으로 사라진 연위의 무공 또한 보았다.
금군의 움직임으로는 쉽게 막을 수가 없는 속도였다.
물론 움직이겠다고 대놓고 말한 이상, 조금이라도 낌새가 보이면 금군도 즉시 화약을 꺼내 들 것이다. 세상 어떤 고수라도 새로이 개발된 화약 병기를 쓴다면 목숨이 성치 못하리라.
그 병기를 연위에게 쓰지 못한 것은 금군이 의식하기도 전에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쪽에는 그 못지않은 초절정고수까지 있으니, 손쉽게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들이 ‘그것’을 꺼내 든다면, 제아무리 팽가의 가주라 해도 어전까지 뚫고 들어갈 확률은 높지 않을 것이다.
문제가 거기에 있었다.
확신할 수 없다는 것.
살기까지 피워 올리며 진심을 드러내는 팽무강이, 정말 황보적의 목을 날림과 동시에 벼락처럼 움직인다면?
새로운 화약 병기로도 그를 막지 못한다면, 어전이 어떻게 되겠는가?
“말도 안 되는 협박이라는 거 아네. 알지만 우리로서도 방법이 없군.”
팽무강의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이제는 숫제 적병을 눈앞에 둔 장수의 형상이었다. 당장이라도 공격에 들어갈 듯 날이 선 기도에 병사들이 움찔거렸다.
“명령은 명령이라지만, 이것 하나만 이해해 줬으면 하네. 만약 정말 우리가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면, 나 역시 이 자리에 없었네. 연가주를 따라 함께 어전으로 갔겠지.”
“……!”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그때였다.
“모두 병장기를 내려라.”
치리리링.
선두에 선 천인장의 명령에 금군 병사들이 절도 있게 병기를 내렸다.
황보적이 소리쳤다.
“인 무장! 무슨 짓인가!”
“일각이오.”
천인장이 팽무강을 노려보며 말했다.
“일찍이 이토록 금군을 무시한 이도, 금군에게 훈계를 내린 이도 없었소. 우리는 황명을 따라 움직이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오.”
“그렇겠지.”
“이번 한 번만 당해 주겠소.”
천인장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삼군은 당장 어전으로 향해라! 어전 주변을 철통같이 호위하고, 만에 하나 황제 폐하의 안위에 이상이 생길 것 같으면 그 즉시 역적들을 주살하라!”
그 말이 끝나는 즉시 헤아리기 어려운 금군 병사들이 우회하여 제삼 궁문으로 향했다.
“남은 사군은 소화총(小火銃)을 꺼내라!”
철컥!
품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쇳덩이를 꺼낸 병사들이 팽무강과 문석, 그리고 휘하 병사들 모두를 겨누었다.
남은 병사 전원이 쇳덩이를 꺼내 든 것은 아니었다. 대략 이백 명 정도일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화력이 나올 것이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이들을 사살(射殺)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숫자였다.
“일각이오. 일각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면.”
천인장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때는 그대들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팽무강이 툴툴거렸다.
“거 살벌하기도 해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팽무강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천인장이 말한 소화총이 엄청나게 무서운 물건이라는 걸. 저 무수히 많은 소화총에 잘못 걸리면, 천하의 고수라도 칼 한 번 못 휘둘러 보고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걸.
‘상황을 너무 살벌하게 만들었나.’
하지만 천인장의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저 정도 강수를 꺼내 들지 않고서는, 모든 일이 잘 처리된 이후에 처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 일각 후에는 자네들이 우리와 함께하든, 우리가 자네들에게 잡히든 둘 중 하나의 결과는 나올 테니까.”
팽무강이 어전 방향을 힐끔거렸다.
당당한 표정과 달리, 그의 눈에는 미약한 초조함이 감돌고 있었다.
‘설득이 덜 되었는가.’
이제는 진심으로 칼을 휘두를 작정을 해야겠다.
* * *
우우우우우웅!
우헌의 얼굴은 이제 붉다 못해 시퍼렇게 보일 정도였다.
연위의 무형지기는 대단한 힘을 자랑했다. 무극에 이른 고수들에 비할 수는 없지만, 검극사기 하나로 무의 한계를 뚫어 이룬 경지를 극한까지 살려 낸 그의 삼단전(三丹田)은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호응을 보여 주었다.
하단전의 충만한 기운만큼이나 중단전은 철벽의 위세를 자랑하고, 금성철벽처럼 단단한 중단전만큼이나 상단전 역시 광대한 위용을 뽐내고 있다.
연위의 눈이 스산해졌다.
“신화교의 주구.”
“……!”
“본디 내시라 함은 양물을 잘라 사내구실을 못 하게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네놈은 그러지 않았다. 단순히 신화교의 열양공을 익혔기 때문이라기에는 지닌바 원초적인 기운이 너무 생생해.”
황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우헌은 남자치고 목소리가 꽤 높은 축에 속했다. 게다가 수염도 나지 않았고, 피부도 하얗기만 했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내시라고 할 수 있었다.
한데 내시가 아니었단 말인가?
“인간 본연이 갖고 태어난 장기 중 하나를 떼어 내면 선천의 양기(陽氣)가 멀쩡할 리 없을 터. 그런 몸으로 무공을 익혀 봤자 희대의 천재라 한들 무학의 벽을 뚫지는 못한다. 그것이 환관의 한계라면 한계일 것이다.”
“이익!”
“한데 네놈의 몸에는, 한계를 뚫어 본 자가 아니라면 보유할 수 없는 압도적인 내공이 도사리고 있다.”
“이, 이놈!”
번쩍!
연위의 동공이 새파랗게 빛났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파랗다. 잡티 하나 없는 진한 청색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괴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내 눈에는 봉인된 화기(火氣)가 보인다.”
스르륵.
연위가 검을 쳐들었다.
주르르륵.
우헌의 몸이 조금씩 조금씩 연위를 향해 다가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한이 강제로 그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대단한 내공 조예, 압도적인 기공술이었다.
“죽고 싶다면 계속 반항하라.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일 것이다.”
지이이이잉!
연위의 철검도 그 눈빛처럼 푸른 광영으로 물들었다.
“폐, 폐하!”
우헌이 용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용상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특유의 음영에 가려진 황제의 얼굴 또한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황후 폐하!”
우헌이 황후를 바라보았다.
“비록 우리가 정적이었다고는 하나, 황후 폐하 역시 황실의 일원이자 어른이십니다. 한데 이런 무도한 사태를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실 겁니까!”
당연하게도 황후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평소와는 너무나도 달라진 황제,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연위의 등장으로 인해 일각 동안 수없이 생사를 오간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이와 같은 흐름은 그야말로 최상이라 할 수 있었다. 황후의 얼굴에 미약한 통쾌함이, 그리고 두 눈에 은은한 멸시의 빛이 감돌았다.
절망 어린 눈으로 황제와 황후를 보던 우헌.
연위가 주먹을 쥐었다.
꾸욱!
우헌의 몸이 완전히 결박된 듯 꼿꼿해졌다.
“잘 가라.”
연위가 검을 휘두르기 직전.
절망으로 얼룩졌던 우헌의 눈빛이 일순간 돌변했다.
“참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이군.”
번쩍!
번개와도 같은 쾌검기(快劍氣)가 단숨에 우헌의 몸을 사선으로 갈랐다.
쩌어어어어엉!
귀청을 떨어 울리는 굉음.
츠츠츠츠츠.
연위가 내친 진심 어린 참격에도 우헌의 몸은 갈라지지 않았다.
화아아아아.
우헌의 몸에서 짙은 수증기가 일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는구나.”
신화교의 군사 조직 화운비각(火雲祕閣)의 이인자.
우헌, 아니 기우헌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