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7화. 천도(天道)의 변화 (2)
‘이럴 수가!’
멀리서 어전 방향을 보는 홍룡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움직일 수가 없지?’
홍룡에 이름을 올린 이들의 무력은 천차만별이었다.
무공을 분해하거나 재해석 후 창조해 내는 작업은 단순히 경지가 높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천성적으로 그런 능력을 타고난 이들이 있다. 그래서 강한 홍룡도 있었고, 생각보다 약한 홍룡도 있었다.
그중 홍룡궁이라 하면 홍룡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맞는 환경만 주어지면 홍룡검도 홍룡궁을 당해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움찔!
한 발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저절로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등허리에 식은땀이 어렸다. 목덜미는 진즉에 축축해졌다. 안색은 창백했고, 자꾸만 마른침을 삼키게 되었다.
오금이 저린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오금이 저려서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싶은 기분이었다.
‘왜! 왜 움직이질 못하는 거냐!’
이를 악문 홍룡궁은 억지로 강한 의지를 불살랐다.
파아악!
눈을 질끈 감은 채 신법을 펼치는 그녀.
‘……!’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발을 놀려 뒤로 물러났다. 본래 서 있던 자리보다도 일 장이나 더 뒤로.
홍룡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쿠구구궁!
그녀의 앞에 거대한 아수라상이 나타났다.
명백한 환상이다. 천하에 신비로운 요물이 많고 듣도 보도 못한 영물도 많다지만, 신장이 십 장을 넘는 삼면육비의 아수라상이 살아 움직인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이성은 그것을 인정하고 확신했다.
하지만 마음은 이성이 내린 확신을 거짓이라 매도하고 있었다.
‘죽는다.’
저 영역으로 들어가면 죽는다.
그것도 그냥 죽는 게 아니었다. 악귀보다도 사나워 보이는 눈과 맹수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이는 세 개의 얼굴, 머리 위에 불길을 피우는 여섯 팔의 거인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을 것이다.
‘진짜 죽는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숱한 생사결과 신앙의 힘으로 죽음의 공포를 초월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더 기가 막혔다. 그녀는 임무를 위해서라면 제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다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독종이었다.
‘왜 이러지? 대체 왜!’
툭!
홍룡궁이 깜짝 놀라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스르륵!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활을 놓쳤다. 그 활이 지붕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잡아! 무인이 병기를 놓치다니, 수치스러운 줄 알아!’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점점 멀어지는 활을 향해 손을 뻗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몸을 낮춰 활을 쥐려 하면, 엎어진 자세 그대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초절정고수 홍룡궁, 그 무력은 대문파의 수장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는 종사급이다.
그 정도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강력한 내공과 단련된 육체 이상이 필요하다. 바로 굳건한 정신이다.
한데 죽음의 공포조차 초월한 초고수가 갈기갈기 찢겨 죽을 것 같아서 움직이질 못하고 있다. 이것은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왜 이러는 것인가?
도대체 연위가 무슨 수를 썼기에 전투 불능이 되어버린 것인가?
‘술법인가?’
술법이 아니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수법이다. 사람의 정신을, 그것도 초절정고수의 마음을 꺾고 정신을 붕괴시킬 정도의 엄청난 무언가가 그녀를 망가트린 것이다.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무극에 이른 자들을 제외하면, 아니 무극에 이른 자들 중에서도 극한의 깨달음을 얻은 이가 아니면 문조차 두들겨 보지 못한 경지가 바로 ‘그 경지’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성이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의 마음과 육체는 그것을 인정했다.
극문, 무극의 문을 열지 못했음에도 지닌바 깨달음이 너무나도 고고해 모든 것을 건너뛰어 버린 괴물의 경지.
검을 쥔 자라면, 아니 무공을 익힌 자라면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도달하고 싶어 하는 무(武)의 이상향.
“……심검(心劍)?”
* * *
어전의 문이 갈라졌고, 그 뒤에는 황제와 황후가 있다.
팽무강과 제갈아연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 한들, 고개를 돌려 그들의 존재를 확인해야만 했다. 다급하게라도 예의를 차린 후 주변을 경계해야만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러지 못했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 연위와 기우헌의 싸움에 압도당했기 때문이었다.
“……허!”
팽무강은 헛웃음 비슷한 신음을 흘렸다. 제갈아연은 아예 말조차 잇지 못했다.
콰르릉!
연위가 검을 휘두르자 어전으로 이어지는 궁문과 궁벽 일부가 산산이 부서져 날아갔다.
연위답지 않은 무척이나 파괴적인 검격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소검은 그 길이가 두 자가 채 되지 않았지만, 마치 일 장이 넘는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놀라운 건 아니었다. 분명 강력한 무공이었지만, 그 정도는 팽무강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격이었다.
진짜 놀라운 것은 연위가 드러내는 기세 그 자체였다.
쩌저저저정!
한 줄기 벼락처럼 움직이는 소검이 화염의 권격과 부딪치며 무시무시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힘이 모자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우헌은 물러났다. 그것도 한두 걸음이 아니라, 연위의 전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십 보를 넘게 물러나고 말았다.
파아아악!
기다렸다는 듯 천종운행비를 펼친 연위가 순식간에 기우헌의 우측에서 나타났다.
기우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퍼퍼퍼펑!
무자비하게 베고 찌르는 검격을 상대로 염왕권이 펼쳐졌다.
연위의 몸이 흔들렸다. 기우헌 역시 검력을 이기지 못해 서너 걸음을 더 뒤로 물러났다.
‘이럴 수가!’
번쩍!
좌수 반룡장으로 전방의 화기를 걷어 내고는 단 두 걸음으로 거리를 좁힌 연위가 기우헌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무자비하기 이를 데 없는 살초였다. 적의 방패를 걷어 내고 드러난 틈을 향해 검을 꽂아 넣는다. 일격필살, 말 그대로 일검에 죽일 기세였다.
삭!
연위의 검이 기우헌의 옆구리에 생채기를 냈다. 기겁한 기우헌이 몸을 틀어 검을 피해 낸 것이다.
터어엉!
또다시 거리를 벌린 기우헌이 숨을 몰아쉬었다.
끝까지 연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그였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속도, 힘 모든 면에서 자신이 한 수 위다.
더하여 전신에서 방출되는 화기는 적에게 상시 타격을 준다. 언제나 주변에 기공의 막을 치기 때문에 적의 공격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게다가 극문을 연 절대고수를 제외하면 신화교 내에서 가장 방대한 내공을 소유했다. 고수일수록 내공의 질이 더 중요하다지만, 비슷한 경지라면 내공량이 많은 자가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삭! 사사사삭! 사삭!
소름 끼치는 참격이 기우헌의 육신 전체를 노렸다.
금제순화공의 화벽으로 그 모든 검격을 예측했지만, 이상하게 회피가 힘들었다.
기우헌이 손이 다급하게 하늘로 향했다.
치리리리링!
부서져 흩어진 건곤권의 철 조각이 그의 손으로 모이며 화염의 돌풍을 일으켰다.
“죽어!”
퍼어어엉!
열화신장으로 내친 장력이 단숨에 연위를 휩쓸었다.
제갈아연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가주님!!”
쾅!
폭음과 함께 연위를 휩쓸어 가던 화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드러난 연위의 모습은 지독할 정도로 멀쩡했다. 검을 중단으로 뻗은 자세 그대로 기우헌을 노려보는데, 그 눈빛을 본 기우헌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뭐야.”
기우헌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대체 뭐야, 너!”
그때였다.
‘……?!’
찰나에 찰나를 쪼갠 시간.
기우헌은 하늘 위에서 수십 개의 검이 쏟아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검 하나하나가 대전의 기둥보다도 큰 거검이었다. 그런 검이 수십 개니, 도저히 피할 곳이 없어 보였다.
기우헌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공포가 어렸다.
중단전이 출렁이며 상단전과 하단전이 공명했다.
“으아아아아!”
콰르르릉!
위협적으로 넘실거리던 금화(金火)가 기우헌의 몸을 중심으로 돌풍을 그리며 하늘 높이 솟구쳤다.
지닌바 모든 내공을 쏟아부은 천외천의 기공술이었다. 이전처럼 불기둥을 쏘아 보낸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불기둥이 되어 닥쳐오는 모든 위협을 분쇄하는 것이다.
사아아아악!
소용돌이치며 치솟는 금색 불기둥을 중심으로 부서진 돌멩이와 외물이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 회오리치며 솟구친 외물은 불기둥에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이내 재로 화해 스러졌다.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생사의 승부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감탄을 금치 못했을 광경이었다.
번쩍! 퍼어억!
그때, 빛줄기 하나가 불기둥의 중앙을 관통했다.
훅!
솟구치던 불기둥이 일순간 흩어져 사라졌다.
사아아아아악!
초고온의 불길이 사라지고, 불어오는 바람이 열기를 식혔다. 짙은 아지랑이와 함께 어도 일대에 서리가 맺혔다.
그리고 그 중심에 기우헌이 서 있었다.
“…….”
기우헌은 말없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날아온 소검이 정확하게 그의 심장을 뚫고 박혀 있었다.
“이걸로는…….”
기우헌이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포, 충격, 당황, 분노 등 온갖 감정이 엿보이는 얼굴.
“이런 공격으로는 날 죽일 수 없어.”
말을 하면서도 기우헌은 스스로의 발언에 의아함을 느꼈다.
내가 왜 이따위 말을 하고 있지? 그 시간에 검을 부러트리고 화정으로 회복한 뒤, 즉각 공격에 들어가야 정상인데?
“너, 너희는 실패했어. 황제? 병신이 다 된 꼭두각시가 정신을 차렸다 한들 우리의…….”
피슉!
“컥!”
기우헌이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의 가슴을 꿰뚫은 소검이 다시 연위의 손에 잡혀 있었다. 허공섭물의 술수였다.
화르륵! 화르르륵!
화정에서 농축된 기운이 솟구치며, 파괴된 혈도를 재생성하고 뼈와 근육, 심장까지도 본래대로 돌려놓았다.
고도의 경지를 이룬 기우헌의 화정은 다른 이들과 차원을 달리했다. 심장이 뚫려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부르르르!
상대의 다음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자세를 낮추던 기우헌은 문득 다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다리만이 아니었다. 가슴 속 어딘가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어느새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손이 차가워졌다.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등허리가 시큰시큰했다.
몇 날 밤을 쉬지도 않고 싸운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호흡은 점점 흐트러졌고, 눈은 침침해졌다.
‘이, 이게 뭐야?’
이상하다. 내 몸이 왜 이러지?
고작 검에 한 번 뚫린 게 전부인데?
슥.
당황하여 자신의 몸을 살피던 기우헌이 섬뜩한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연위가 있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일 장 거리도 채 되지 않는 곳이었다.
딱딱!
기우헌의 이빨이 절로 부딪혔다.
연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순간,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이 굳어 버렸다.
“마음이 꺾인 자, 정신을 놓은 자.”
“…….”
“전의를 상실했으니 놓아주어야 옳은 일이다만.”
번쩍!
연위의 등 뒤로 아수라의 환상이 어렸다.
“지금의 나는 자비를 잊었다.”
그 순간, 기우헌은 깨달았다. 자신이 왜 이토록 공포에 젖어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지.
한 수 위의 힘을, 한 수 위의 속도를 갖고도 왜 이리 연위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것인지.
왜 보이지도 않는 검에 위협을 당했는지. 심장이 뚫려도 멀쩡한 이 몸을 갖고도 왜 적극적인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는지.
‘이 작자가 금제순화공을 파훼한 것이 아니야.’
푸화아악!
기우헌의 팔 하나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내가 제힘을 내지 못한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서걱! 서걱!
남은 팔 하나와 왼쪽 다리도 날아갔다.
털썩 쓰러진 기우헌의 눈에 공허함이 맺혔다.
‘마음과 정신을 베였다…… 심검…….’
턱!
기우헌의 목을 틀어쥔 연위가 검을 역수로 쥔 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서걱! 퍽! 퍼벅! 찌이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