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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758화 (758/963)

758화. 천도(天道)의 변화 (3)

퍽! 퍼벅!

서리 내린 어도 일대에 대량의 피가 튀었다.

끔찍한 파육음과 절삭음이 고요한 어전을 살벌하게 치장했다.

제갈아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쓰러진 기우헌의 목줄을 잡고 마구 검을 휘두르는 연위의 뒷모습은 마치 사냥감을 찢어발기는 맹수처럼 살벌해 보였다.

“가, 가주님!”

그때, 팽무강이 제갈아연의 어깨를 잡았다.

“가만히 있어라.”

“하지만!”

“우리가 도와선 안 돼. 연가주 스스로 빠져나와야만 한다.”

“빠져나오다니요?!”

팽무강은 말없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깊고 깊어진 두 눈에 걱정과 놀라움이 담겼다.

‘극한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팽무강의 눈가가 살짝 떨려 왔다.

‘설마하니 정녕 심검(心劍)에 도달했을 줄이야.’

심검.

마음으로 검을 다루는 경지를 뜻한다.

다만 그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었으니, 뜻이 향하는 대로 검을 휘둘러 검무(劍舞)를 추는 무희(舞姬)도 심검에 도달했을 수 있다.

하지만 무림인들이 말하는 심검은 무도(武道) 최고의 경지로, 마음으로 검을 다루기에 실검을 휘두르지 않고도 상대를 벨 수 있음을 뜻한다.

심인상인(心印傷人). 마음으로 상대를 죽이겠다 하면, 상대는 저항도 못 해 보고 죽는다.

실제로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그야말로 신(神)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그 즉시 사람이 죽는데, 이야말로 진정한 무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실제로 심검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여 심검이라는 경지는 그저 전설 아닌 전설로만 남았다.

다만, 연위가 도달한 경지 역시 심검의 길목에 있다. 굳이 말하자면 무신(武神)의 심검이 아닌 검인(劍人)의 심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육신은 무극에 도달치 못했음에도 엄청난 깨달음을 통해 상단전을 발달시켰다. 그 강인한 정신과 마음으로 상대에게 벗어날 수 없는 환상을 보여 주거나, 정신을 파괴하여 미쳐 버리게 만들 수 있다.

마음으로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베는 경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니, 이것은 천하 어떤 술법도 비견할 수 없는 최고급의 무리(武理)다.

하지만 그 경지에는 문제가 있었다.

‘심검은 곧 극단적으로 발달된 정신력의 발현에서 시작한다. 살기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더 섬세하고 위험해. 상황에 따라 큰 힘을 발휘하지만, 의지가 박약하면 상대에게 흠집도 내지 못한다.’

팽무강의 눈이 깊어졌다.

‘강력한 정신력으로 저 난적을 물리쳤으나, 지나친 상단전 활용은 개인에게도 위해를 가할 수 있다. 그 날카롭기 그지없는 양날의 검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신검(神劍)이 될 수도, 마검(魔劍)이 될 수도 있는 법.’

움찔!

기우헌의 몸을 베고 찌르던 연위의 검이 멈추었다.

‘연가주. 당신이 보여 준 그 살검(殺劍)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사납소. 나아가, 심검을 토대로 자연스레 몰입하다 보면 진짜로 아수라가 될 수도 있소.’

부르르르.

팽무강의 걱정을 느낀 것인지, 그도 아니면 저항을 하는 것인지.

소검을 든 연위의 팔이 희미하게 떨렸다.

‘몰입에서 벗어나시오. 역적을 죽이기 위해 살검을 들었을 뿐, 당신은 아수라가 아니라 벽산연가의 수장이오.’

팽무강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면, 훗날 또다시 살검에 휘둘릴 것이오!’

그때였다.

훅!

연위의 몸에서 푸른빛 광영이 솟구쳤다.

스스로를 살심에 던져 검격 그 자체를 바꾸니, 살기에 물든 진기의 색 역시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아수라팔검을 꺼내 든 순간 연위의 진기가 암청색으로 바뀐 것은 그러한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연위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진기는 특유의 진청색이었다.

사아아악.

거미줄처럼 어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무형의 살기가 보이지 않는 아지랑이가 되어 사라졌다.

팽무강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쉰 연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아연의 얼굴이 밝아졌다.

“가주님!”

“쿨럭!”

순간 연위가 밭은기침과 함께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냈다.

“가주님?!”

파아악!

제갈아연이 재빨리 연위의 곁으로 다가갔다.

“쿨럭! 콜록콜록! 우웩!”

허리를 숙여 피를 토하는 연위의 얼굴은 지독하게 창백했다.

제갈아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괜찮다.”

잠시 숨을 고른 연위가 무안한 듯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못난 꼴을 보였구나.”

“아니에요! 저만한 고수와 싸워서 이기셨어요! 정말 큰일을 해내신 겁니다!”

연위의 시선이 자연스레 기우헌에게로 향했다.

꿈틀! 꿈틀!

사나운 칼질에 난자당한 기우헌의 몸통이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팔 두 개가 날아가고 다리 하나도 잘려 나갔다. 얼굴과 목, 상체 전체에 거미줄 같은 검상이 새겨진 기우헌의 모습은 실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연위의 눈이 어두워졌다.

‘……짐승이 되었구나.’

아수라팔검은 딱히 기기묘묘한 초식을 자랑하는 무공은 아니었다. 초식 자체만 놓고 보면 군자팔검세와 거의 흡사했다.

다만 끓어오르는 살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멈춰야 할 동작에서 멈추지 않고 기어이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살인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연위가 아수라팔검을 꺼내지 않은 것은, 그 검을 완전히 다룰 자신이 없어서였다.

‘아직 멀었어.’

심검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딱 그 직전에서 멈추었다면 이런 못난 꼴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심검이라는 지고의 경지를 뚫고 나자, 오히려 아수라팔검의 위력이 상승함과 동시에 과다하게 소모된 신기(神氣) 때문에 정심(貞心)이 흔들렸다.

무릇 고수란 정기신(精氣神)이 일체가 되어 어느 하나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법.

신이 무너지니 정도 흔들리고, 정이 흔들리니 기가 폭주한다.

이것은 마공(魔功)을 연성한 마인들이 주화입마에 걸려 광기 어린 살귀가 되는 과정과 유사했다.

‘아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다 변명일 뿐이다. 익숙하지 않은 사태라고 마음을 바로 세우지 못한 채 살심에 사로잡혔다면, 결국 이 또한 나의 수양이 부족한 것. 애초에 스스로를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면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소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호정에게 그러지 말라 신신당부를 했거늘, 정작 애비란 사람이 이런 꼴을 보이다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치이이이익!

연위의 몸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검극사기가 온몸을 돌며, 망가진 혈도를 치료하고 불어난 탁기를 배출하고 있었다.

실제로 기우헌의 공격 때문에 입은 상처는 크지 않았다. 지금 그의 몸에서 배출되는 탁기는 전부 심검의 여파로 얻은 내상이었다.

‘정신은 곧 육신과 이어져 있으니, 내 정신이 탁해지면 몸도 약해지는 것.’

후우우웅!

서늘한 바람이 그의 정신을 맑게 일깨워 주었다.

‘반성은 나중에 하자.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연위가 제갈아연에게 물었다.

“금군을 설득했느냐?”

“네.”

“잘했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 팽가주님께서 하셨지요.”

고개를 끄덕인 연위가 팽무강을 바라보았다.

팽무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위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일대를 정리하고 오겠소.”

“괜찮겠소?”

“걱정을 끼친 듯하여 팽가주의 얼굴을 볼 낯이 없소. 본래대로 돌아왔으니, 앞으로 또 이럴 일은 없을 것이오.”

“당연히 그래야 하오.”

씨익 웃는 팽무강의 얼굴은 그야말로 호협 그 자체였다.

연위가 제갈아연의 어깨를 두들겼다.

“금군이 도착할 때까지 어전을 호위해라. 주변에 숨은 적들을 처리하고 오겠다.”

“네!”

카앙!

여전히 살기가 서려 있는 소검을 부러트려 버린 연위가 저 멀리 떨어진 철검으로 손을 뻗었다.

우우웅.

기분 좋은 공명음과 함께 부러진 철검이 연위의 손에 잡혔다.

부러졌음에도 그 길이가 소검과 비슷했다. 쥐고 휘두르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애초에 연위의 경지는 병기에 구애받지 않았다.

파아악!

천종운행비로 어도 밖으로 튀어 나간 연위는 순식간에 열양공의 기척을 포착했다.

“크아악!”

“아악!”

짤막한 비명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엄청난 속도였다. 연위가 풍기던 아수라의 살기에 겁을 먹고 숨어 버린 교도들이 삽시간에 목숨을 잃었다.

잠시 후.

훅!

되돌아온 연위, 그의 철검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황보적이 이끄는 금군이 어전 앞에 당도했다.

황보적의 눈이 흔들렸다.

“이, 이런!”

신성한 어전 주변이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었다.

대체 어떤 기운들이 충돌했는지, 땅 여기저기가 움푹 파여 있었다. 흙이 눌어붙어 시커멓게 변한 곳도 있었고, 박살 나 무너진 궁벽과 궁문은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그중 단연 압권은 어전의 대문이었다.

극도로 예리한 검기에 잘려 나간 대문은 본래의 위엄 넘치는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어떤 놈이 감히!”

너무 기가 막힌 사태에 황보적은 눈앞이 다 핑핑 도는 것 같았다.

“황후 폐하!”

금군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문석이 놀라서 어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황후 폐하께서는 괜찮은 것인가!”

팽무강이 도갑을 들며 문석의 언행을 막았다.

“폐하의 어전이오. 진정하시오.”

“……!”

문석과 황보적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정작 황궁 소속의 관리는 그들이었지만, 이상하게 어전 앞을 지키는 팽무강의 말에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팽무강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이곤 철검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훅!

순식간에 팽무강을 지나친 연위가 열린 어전 안으로 향했다.

황보적의 눈이 충혈되었다.

“이놈!”

파아앙!

순식간에 계단 밑으로 이동한 황보적이 살벌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허락받지 못한 자가 어찌 어전에 들려 하는가! 당장 내려오지 못하겠는가!”

그때였다.

“정리는 되었나?”

순간 어전 주변에 모인 모두의 몸이 굳어졌다.

어전 안, 그것도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나른하고도 위엄 가득한 목소리. 수십 년간 정사를 외면하고 쾌락에 젖어 살던 황제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전까지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마치 내공이라도 익힌 것처럼 매서운 울림을 담은 목소리는 어도까지 이르러 선명하게 퍼져 나갔다.

연위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폐하.”

“일어나라.”

“…….”

“그대들은 황궁의 사람이 아니야. 강호의 예법은 간결하고 효율적이라 들었으니, 그대들은 그대들답게 행동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나아가 황궁을 좀먹던 사교 무리의 우두머리를 해치우고 짐의 마음을 다잡아 주었으니, 짐은 물론 황궁 전체의 은인이라 할 만하다.”

“…….”

“편히 있으라.”

“황송하옵니다.”

황보적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궁내대장군인 문석은 물론 금군의 병사들, 나아가 팽무강과 제갈아연조차도 깜짝 놀랐다.

“그래서, 정리는 다 끝났는가?”

“송구하옵니다만, 아직입니다.”

“그렇겠지. 태감과 휘하 몇몇 죽여서 되찾을 수 있는 천명이었다면, 내 수십 년을 방탕하게 살지도 않았을 것이야.”

“…….”

“얼마나 남았나?”

“추산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제부터 황제 폐하의 처소와 어전을 중심으로 하나씩 하나씩 정리를 해 볼까 합니다.”

“자신은 있는가?”

“없습니다.”

연위가 눈을 감았다.

“그저 일심으로 행할 뿐입니다.”

황제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렸다.

“주변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대는 잠시지간 짐과 용정이나 한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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