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2화. 천도(天道)의 변화 (7)
말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한 일행의 속도는 그야말로 번개가 따로 없었다.
특히나 묵비의 경공술이 돋보였다. 연호정과 곡경은 무극을 연 고수들이라지만, 묵비는 그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두 사람보다 여유 있는 경공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연호정이 그녀까지 데리고 가는 이유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유사시에 언제든 발 빠르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북으로 접어든 일행에게로, 개방도들이 붙기 시작했다.
“현재 황궁은 조용합니다! 다만, 어전 인근에 진을 치고 있는 무림맹 파견사들에게서 오는 연락들이 간간이 끊기고 있습니다!”
“중간에서 정보를 끊어 내고 있는 겁니다! 전형적인 정보 차단의 술수입니다! 다행히 그들 역시 섣불리 궁 밖으로 나오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쪽 상황을 잘 모를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외부 상황을 모른다면 무리해서라도 어전을 공략할 위험이 있습니다!”
확실히 개방의 정보는 빠르고 정확했다. 거기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짚어 주었기에 듣는 것만으로도 황궁 상황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곡경에게도 황궁의 정보원들이 붙었다.
“황궁 외성의 출입구가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내부에서 통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전에서 통제하는 게 아닙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어전에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곡경이 연호정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냐?”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정보를 취합해 보면 현재 적들이 중앙 어전을 에워싸고 있는 형국인 듯하오. 개방의 정보대로 이쪽 상황을 몰라 꽤 다급할 텐데, 지금까지 아무 전투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어전에서 나름대로 수를 쓰고 있다는 뜻이오.”
“어떤 수를 쓰는 건지 모르겠군. 아닌 말로, 이제부터는 칼과 칼의 싸움이야. 명분 같을 걸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이지. 정치로 늦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닐 테니.”
“틀렸소.”
“뭐?”
“정치가 통하지 않는 상황이란 있을 수 없소. 하물며 황궁이오. 만약 우헌 태감 밑으로 병력을 조율할 책임자가 없었다면 진즉 난이 벌어졌을 것이오.”
“그렇다면……?”
“쉽게 말해 농성전을 기반으로 적들과 교섭 중일지도 모르오.”
“하지만 한계가 있을 거다.”
“물론이오. 게다가 놈들은 황궁 외성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소. 당장 식량 문제만 생각해도 오래 버틸 수는 없소. 어전이나 적들이나, 한계는 금방일 거요.”
“빌어먹을, 아주 지랄들이 났군. 설마 놈들이 벌써 어전을 장악하고 거짓 정보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없소. 만약 어전을 장악했다면 놈들은 진즉 병력을 빼거나 황궁 전체를 불태웠을 것이오. 아무리 기괴한 꿍꿍이가 있어도, 대국의 효율을 보면 절대 가만히 있을 리 없소.”
“똑똑해서 좋겠다.”
“뭐가 되었든 빨리 가는 게 좋겠소.”
“그거야 당연하지.”
일행은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묵룡대는 끝까지 묵묵히 세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애초에 양천을 호위하기 위해 길러진 고수들이니, 경공술만큼은 묵비 못지않았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고수가 많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고수들이 허무하게 스러진다.
연호정은 그 허무하게 스러지는 이들 중 아버지가 없기를 바랐다.
“급보입니다! 황궁 외성 인근에 주둔 중이던 팽가의 병력 백 명이 간밤에 모종의 습격자들에게 당했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현재 팽가의 병력 칠백이 황궁 외성 한 곳에 주둔 중이었다.
당연히 절반 이상이 정예였다. 그중 백 명이라면, 설령 정예가 아니라 한들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좋아, 저 멀리 황궁이 보인다. 반 시진만 더 가면 돼.”
“좋소.”
“그나저나 어떻게 생각하냐? 팽가 놈들 백 명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아작 난 거.”
“때가 된 거요.”
“때가 됐다니?”
“적의 병력을 야금야금 없애는 것. 말 그대로 퇴로를 만들기 위함이오.”
“……!”
“나아가, 퇴로를 만드는 시점이란 건 곧 공격의 때가 다 왔다는 뜻이기도 하오.”
“빌어먹을! 그거 진짜야? 그냥 있는 병력 다 때려 박아서 탈출해 버리면 그만 아니야?”
황궁에 가까워질수록 곡경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팽가 쪽이 아니오.”
“뭐?”
“팽가 쪽 병력을 조금씩 없애 적의 병력 수 자체를 줄이고, 무림의 병력이 그쪽으로 이동하면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치고 나갈 생각이오.”
“확신하냐?”
“확신하오.”
“어떻게 확신해?!”
연호정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놈들이 워낙 자주 쓰는 방법이었소. 옛날에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걸 막지 못했소. 두 번씩이나.”
“…….”
“더는 놓치지 않을 거요.”
그리고 다시 반 시진 후.
“대수님!”
화아악!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거지 하나가 있었다.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철곤개?”
구주명가를 무너트릴 때 연가로 정보를 주던 지부장이었다.
철곤개가 포권을 취했다.
“개방의 철곤개가 성천을 뵙습니다!”
곡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에 그런 인사는 됐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나 읊어 봐.”
철곤개가 헛기침을 했다.
“광혼귀군 곡 선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뭔 인사를 두 번씩이나 해? 시간 많아?! 얼른 보고나 하라고!”
“……처음 건 선배께 드린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뭔 개소리야?”
“새로운 성천, 연호정 대수님께 드리는 인사였는데요.”
“잉?”
곡경이 저도 모르게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나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신선제왕의 일인, 비왕 공손백룡을 죽인 새로운 성천. 패왕 연호정 대협이 아니면 누가 있어 또 성천으로 불리겠습니까.”
다급한 상황임에도 순간 얼이 빠지게 되는 발언이었다. 연호정이 입을 떡 벌렸다.
“패, 패왕?”
곡경 역시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뭔 왕?”
“패왕입니다.”
“이놈더러 패왕이라고?”
“……그렇습니다.”
“어떤 골 빈 자식이 이놈더러 왕이라고 해?”
“세상이 다 압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놈 나이가 몇인 줄 알아? 내 손에 삼십 합도 못 버틸 놈이 선배들 다 제치고 왕이냐? 이게 뭔 개 같은 상황이야!!”
곡경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열이 잔뜩 받아서 눈앞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철곤개가 입맛을 다셨다.
“비왕을 처단하신 분이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하긴 뭐가 당연……!”
“선배께서 비왕을 죽이셨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겁니다. 선배도 그 자리에 계셨다면서요?”
순간 곡경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세상은 결과를 본다. 실제로 비왕을 죽인 사람은 연호정이었고, 심지어 그는 주변의 도움 없이 당당한 정면 승부로 왕을 꺾었다.
즉, 새로운 왕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묵비가 팔꿈치로 연호정을 툭툭 건드렸다.
“별호가 아주 화끈하면서도 유치찬란한 게, 딱 연 공자답네요.”
“……시끄러워.”
“네, 패왕 대협.”
“하지 마, 인마!”
묵비가 킥킥거렸다. 오랜만에 연호정이 당황하는 꼴을 보니 꽤 재미가 있었다.
연호정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괜히 말을 돌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한들 웃어넘길 수 없는 질문이었다. 상황은 그렇게나 다급했다.
철곤개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점점 들여다보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야음을 틈타 황궁 내부로 침입한 방도 중 다섯에게서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렇군.”
“다만 팽가의 병력이 기습을 당한 것으로 보아…….”
“격전의 때가 머지않았군요.”
“예.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철곤개 역시 답답한 듯 표정이 좋지 못했다.
“무턱대고 치고 들어갔다가는 놈들이 어전을 범할 것 같아서 함부로 병력을 운용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모인 병력이 어떻게 되오?”
“팽가의 병력을 제외하고, 산동 황보세가에서도 오백 병력을 차출해 보냈습니다. 세가 내 최고의 권사(拳士)들을 추렸다고 합니다.”
곡경이 눈을 빛냈다.
“금군 오천인장 이름이 황보적이다. 그놈이 황보세가 출신이야. 아마 따로 연락을 보냈을 것이다.”
“무림맹에도 연락을 취했습니다. 최고 정예들이 이동 중인데, 언제 도착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예상으로는 빠르면 나흘, 늦으면 엿새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지만, 안타깝게도 엿새는커녕 여섯 시진도 기다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 외에 섬서의 화산에서도 매화검수들을 보낸다고 했지만, 역시 때에 맞추긴 힘들 듯합니다.”
“그럼 팽가와 황보가뿐이오?”
“물론 아닙니다. 팽가와 연을 맺은 하북의 문파들이 한 시진 안에 도착할 겁니다. 그 수를 대략 일천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만…….”
“일천이라.”
소수의 강자들이 길을 뚫고 나면, 일천의 병력이 뒤를 따라 황궁을 휩쓸면 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지만, 문제는 그게 쉽냐는 것이다. 하물며 적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 고수가 얼마나 많은지도 추산이 어려웠다.
나름의 준비들은 하고 있지만, 무척이나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곡경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내가 들어가겠다.”
“선배.”
“여기서 황궁의 지리를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게다가 이번 싸움은 소수의 고수전(高手戰)에서 결과가 날 것이다.”
“…….”
“나는 알아. 기도가 느껴지진 않지만, 분명 황궁 내에 우리에 필적할 만한 놈이 있다. 적으면 하나, 많으면 둘 이상이겠지.”
연호정 역시 곡경의 말에 동감했다.
곡경이 말을 이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 폐하의 안위다. 놈들을 전부 때려죽인다 한들, 폐하의 옥체에 이상이 생기면 진 거나 다름이 없어.”
“음.”
“무조건 황제 폐하부터 지켜야 한다. 황궁 전체가 불살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와 그 일족만 지키면 최소한 패배는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 극단적인 발언이었다.
“일부긴 하지만 금군은 소화총을 소지하고 있어. 우리 수준의 고수가 난입해서 휩쓸어 버리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정면 승부가 벌어져도 꽤 버틸 수 있을 거다.”
곡경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먼저 들어간다.”
“기다리시오.”
“시끄럽다. 이제부터 우리는 따로 행동한다. 네놈은 황제 폐하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지 않느냐?”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소.”
“그러니…….”
“나는 황제 폐하의 목숨은 물론 황궁 그 자체를 잃지 않았으면 하오.”
“뭐?”
연호정이 기우희를 바라보았다.
“준비됐어?”
기우희가 쓰게 웃었다.
“마음의 준비는 함께 나설 때부터 했어요.”
“앞으로 신화교 측에서 너를 죽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켤 거다.”
“지켜 주실 거잖아요?”
“물론 그렇지. 그래도 확실히 말해. 지금 그 일을 시작하면, 너는 너의 핏줄까지 배신하는 거야.”
일부러 강한 표현을 써 가며 얘기했다.
그럼에도 기우희는 흔들리지 않았다.
“저는 제 신념에 따라 이곳에 왔어요. 그리고 더는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소중한 결정, 고맙게 잘 쓰겠다.”
그가 철곤개를 보며 말했다.
“서신을 써야겠습니다. 같은 내용으로 수십 장을.”
“예?”
“놈들의 성녀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걸 알려야지요. 만나러 오진 않을 테니, 화살에 묶어 팔방으로 날릴 겁니다.”
연호정의 시선이 이번엔 묵비를 향했다.
묵비가 웃으며 홍련궁의 시위를 튕겼다.
“몇 발이나 쏴 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