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4화. 복마전(伏魔殿), 그리고 복마전(伏魔戰) (2)
“……?”
가부좌를 틀고 한참 명상 중이던 연위가 돌연 눈을 떴다.
한옆에서 문서에 무언가를 적던 제갈아연이 연위를 돌아보았다.
“아, 깨셨어요?”
“…….”
“가주님?”
연위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갈아연은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지금은 아니지만.”
“네?”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뭐였지?’
연위는 더 이상 내공을 연마하거나 육신을 단련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수련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정심을 바로 세우고 상단전을 제대로 다스리는 일이었다.
한없이 깊게 들어가는 명상, 나 자신의 혼(魂)을 돌아보고 내 무도(武道)가 품고 있는 진의(眞意)를 찾아가는 길.
천만다행히도 첫 심검발출(心劍發出) 직후 스스로를 다스렸기에, 정심을 세우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선을 넘느냐, 넘지 않느냐는 심검에서도 적용되는 원리였던 것이다.
명상으로 상단전을 다스리고 그 힘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훌륭한 방벽을 세우는 것.
그러다 보니, 연위에게는 전에 없던 기묘한 능력이 생겼다.
‘분명 마기(魔氣)였다.’
어느 방향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위는 확신할 수 있었다. 황궁의 영역 안에 마공을 익힌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전에 가까웠다면 방위까지 짚을 수 있었을 터. 그렇다면 외성인가?’
연위의 주먹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그냥 마인이 아니다. 엄청나게 고요하지만…… 그 힘의 편린은 분명…….’
움찔!
연위가 고개를 돌렸다.
‘……?’
이번에도 정확한 방위는 알 수 없었다. 저 멀리 서쪽 인근인 듯한데, 너무 넓어서 어디라고 콕 집기가 어려웠다.
‘기이한 힘이다. 마기의 주인보다도 훨씬 더 은밀해.’
우우웅.
연위의 동공이 파랗게 물들었다.
검극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상단전이 활성화되며 자연스레 일어난 신기(神氣)가 그의 두 눈에 모이고 있는 것이다.
눈은 곧 마음이 창이요, 상단전으로 이어지는 통로와도 같은 법.
‘내공력보다 고차원적인 힘…… 하지만 그 또한 기의 조화인데…….’
순간 청색 안광이 번갯불이라도 된 양 번뜩였다.
“술력(術力)?”
“네?”
스르륵.
자세를 푼 연위가 침상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황궁에 감당키 힘든 고수들이 있다.”
“……!”
제갈아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물론 팽무강 역시 연위의 능력을 십 할 확신하고 있었다. 특히나 그가 심검을 구현해 낸 이후, 두 사람은 암암리에 이쪽 전력의 최강자가 연위라고 믿었다.
올바른 믿음이었다. 연위는 단순히 병장기를 잘 휘두를 줄 아는 무인 정도가 아니라, 그 깨달음이 너무나도 깊어 하나의 도(道)를 이룬 각자(覺者)에 가까웠으니까.
“정체는 모르겠다. 방위도 정확히 짚을 수는 없어. 하지만…… 둘 모두 무극의 경지를 연 괴수들이다.”
“……!!”
“아마도.”
아마도라니?
연위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 명은 확실해. 마공을 연성한 마인이다. 하지만 다른 한쪽은 불확실하다. 술력 비슷한 기운이 존재를 감추고 있는데,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겠다. 성천급일 수도 있고, 이제 갓 무극에 도달한 정도일 수도 있다. 확실치 않아.”
어떠한 잡념도 없이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했기에 볼 수 있었다.
연위의 이 능력을, ‘짐승’을 위해 부적술을 펼쳤던 도사가 알았다면 아마 기겁했을 것이다. 그는 고차원적인 술법과 각종 부적술을 삼 년 동안 준비해서 신비로운 방을 만들었지만, 연위는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그와 비슷한 능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렇군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하지만 적측이 공격을 시작한다면 저들 역시 움직이겠지. 그 정도 무력이라면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순간 연위가 움찔했다.
“가주님?”
“…….”
“가주님, 괜찮으세요?”
“괜찮다.”
연위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스르륵.
그의 코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렀다.
손으로 코피를 훔친 연위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상에 앉았다.
연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적측의 병력은 모르긴 몰라도 우리의 몇 배는 될 것이다. 단순히 머릿수로는 금군까지 있는 우리가 더 많겠지만, 고수의 숫자로 본다면 비교할 수가 없겠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한데도 놈들은 지금까지 우릴 공격하지 않고 있다. 팽가주의 교섭 능력이 뛰어난 걸 차치하더라도 이건 뭔가 이상해.”
무극의 고수로 추정되는 괴수가 둘이나 있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교섭이 필요치 않을 터였다. 작정하고 싸우려 들면 순식간에 이쪽을 초토화시킬 능력이 되는 것이다.
무극의 고수는 그래서 무섭다. 가히 움직이는 재해와 같은 것이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제갈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요.”
“두 가지?”
“하나는 가주님의 심검입니다.”
“…….”
“그때 어전에서부터 퍼져 나간 심검은 적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을 겁니다. 만약 가주님께서 적아를 구분치 않고 심검을 난사했다면, 저와 팽가주님도 지금쯤 정상이 아니었겠지요.”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제갈아연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보아서 알았지만, 적은 이쪽에 심상치 않은 고수가 존재한다고 받아들였을 수 있어요. 아마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그래.”
“정체를 모르는 미지의 존재는 언제나 공포를 유발하기 마련이죠. 게다가 우리는 우헌 태감을 생포하고 있다고 알렸어요.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 수밖에요.”
“하지만…….”
“네. 지금까지는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가주님 말씀대로 적에게 무극의 괴수가 둘이나 있다면, 이쪽 전력을 무시하고 쓸어 버릴 생각을 하는 게 정상이었을 겁니다.”
제갈아연이 검지와 중지를 펼쳐 들었다.
“여기서 두 번째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그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통제?”
“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 놈들은 시간을 끌어서 좋을 상황이 아니거든요. 물론 우리가 모르는 간교한 계책을 준비 중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염두에 두어도 너무 머뭇거리고 있어요.”
“음.”
“가주님께서 보신 그 두 괴수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어차피 직접 보고 듣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 없는 추측이었다. 약간의 정보라도 있었다면 모르되, 그들 역시 적을 모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뭐가 되었든,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고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족쇄가 되겠네요.”
“그래, 맞는 말이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농성전이 생각보다 길어질…….”
그때였다.
삐익!
연위는 물론 제갈아연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효시?!”
제갈아연은 당황했다.
“갑자기 이게 웬?”
우우우웅.
연위의 동공이 재차 파랗게 변했다.
주르륵.
또다시 코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출혈이었다.
하지만 연위는 이내 옅게 웃었다.
“이거,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을 것 같구나.”
* * *
쿠르릉. 쿠르릉.
연호정이 새파란 눈으로 성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피워 올리는 이들이 가득했다. 열린 성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들만 족히 백 명에 가까웠다.
‘대단하구먼.’
연호정은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세상에 강자는 많다. 대륙 전체에 퍼져 있는 무림인의 수에 비하자면 극소수인 것이지, 절대적인 숫자를 생각하면 강호 무림에도 고수가 적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저놈들도 이쪽 못지않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서들 그렇게 고수를 양산하는지, 당장 눈에 보이는 초절정고수만 해도 무려 넷이었다.
그 뒤에 도열한 고수들 역시 구파의 정예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긴, 당연한가.’
다른 어디도 아니고 황궁이다. 황궁에 저 정도 병력도 배치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쿠르르르릉!
‘음?’
심상치 않은 소리였다.
성문이 올라가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신화교도들 뒤로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고 다섯, 바퀴가 달린 흑색 철제의 쇳덩이들이었다.
‘화포(火砲)?!’
연호정의 얼굴이 절로 떨떠름해졌다.
기우희가 작게 속삭였다.
“화려하게 나오는데요?”
“그러게.”
“어떻게 해요?”
“대놓고 쏘지는 못해. 걱정하지 마라.”
새삼 기우희는 참 화포와 인연이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기우희를 구하러 갔을 때도 적들은 화포를 동원했더랬다. 주변 관부까지 움직여 이동로를 포착, 열 대가 넘는 화포로 이쪽을 노리는데 정말이지 등골이 다 오싹했었다.
당시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홀로 돌진해 그걸 다 부숴 버리긴 했지만…….
‘확실히 황궁제(皇宮製) 화포는 좀 다르군.’
관부에서 동원되었던 화포보다 훨씬 단단한 강철로 만든 것 같았다. 광택도 좋고, 무엇보다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것을 동원한 이들이 열양공의 대가인 신화교도들이다.
‘이건 좀 위험할 수도 있겠군.’
혼자서 무차별 돌진을 꾀한다면야 그리 어려울 것도 없지만, 문제는 이쪽에도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아닌 말로, 놈들이 미친 척 주변에 화포를 쏴 대기만 해도 이 일과 무관한 이들이 떼죽음을 당할 수 있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누구냐?!”
열린 성문 중앙.
기천형이 버럭 소리쳤다.
“이따위 사이한 내용을……!”
“시끄럽다.”
우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순식간에 기천형의 말을 끊어 내는데, 마치 그 목소리가 성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연호정이 월도의 도면으로 기우희의 턱을 툭툭 쳤다.
“이년 맞지? 너희가 그렇게 애달파하는 성녀.”
거리가 제법 떨어졌지만, 고수인 기천형이 기우희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기천형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성녀?!’
진짜 성녀다.
서역인 특유의 새하얀 피부와 푸른 눈동자, 아름답기 그지없는 얼굴은 꾸민다고 꾸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천형은 시치미를 떼었다.
“누구냐, 그년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세게 나오네?”
“그리고 네놈은 또…….”
“화살 날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꼬랑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우르르 몰려나와서는 모르는 척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
“통할 만한 연기를 해, 이 새끼야. 그쪽에 대가리 잘 돌아가는 대장은 없나 보지? 더럽게 무식하네그려.”
기천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다혈질에 생각하는 걸 싫어하는 그였지만, 동시에 가장 싫어하는 게 무식하다는 말이었다.
“이 개자식이!”
“그래서 어쩔 거야?”
월도를 내린 연호정이 대놓고 기우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친근해 보일 법한 동작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연호정의 굴강한 팔이 당장이라도 기우희의 목을 꺾어 버릴 것만 같았다.
기천형의 눈빛이 흔들렸다.
“성녀가 아니면, 지금 얘 모가지 꺾어도 되는 거야?”
“이익!”
“성녀 맞네.”
연호정의 새파란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본인의 기도와 존재감을 완벽하게 갈무리한 그가, 담담하게 사신기를 풀어 냈다.
“황궁 안에 있는 너희 병력 전부 데려와. 성녀 모가지 날아가는 거 보기 싫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