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9화. 복마전(伏魔殿), 그리고 복마전(伏魔戰) (7)
퍼어어어어엉!!
곽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월도가 저 멀리 숲에 처박히며 엄청난 폭음을 냈다.
콰르르르릉!
곽준의 눈빛이 바뀌었다.
월도에서 휘몰아친 경력의 폭풍이 십여 그루의 거목을 박살 내고 땅을 뒤집어 놓았다.
쿠구구구궁!
지반이 박살 나니 그 위에 있던 바위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지지할 땅이 없어진 나무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콰콰쾅! 쿠궁!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무너지고 또 무너진다.
이 정도면 소형 산사태나 다름이 없었다. 규모는 작지만 천 년이 넘도록 그 자리를 지켰을 것이 분명한 야산의 일부가, 인간의 육신을 빌어 강림한 무신(武神)의 힘에 무너지고 있었다.
곽준이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화아아아악!
연호정의 몸에서 끔찍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한없이 강력하고 위엄 넘치는 기운이 검게 물들어 버린 것만 같았다.
주작화기가 삼신기(三神氣)의 기운을 억누른 채 연호정의 심장을 강하게 쥐어짰다.
푸스스스스.
연호정의 몸 곳곳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심지어 숨을 쉬는 코와 입에서도 연기가 새어 나왔다.
곽준의 얼굴에 환희가 깃들었다.
“누굴 찾아간다고?”
위잉! 위이이잉!
빛으로 충만하던 광명신단의 진기가, 어쩐지 조금은 탁해진 것만 같았다.
탁한 유백색의 기운이 전신으로 퍼지다가 다시 심장으로 모여들었다. 심장에 집결한 과다한 진기는 이내 주작화기로 돌변해 연호정의 상단전까지 올라갔다.
오싹!
살기로 불타오르는 연호정의 눈을 본 곽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잊고 있던 두려움을 강제로 끄집어내려는 듯, 괴물과도 같은 힘이 곽준의 상단전을 강타했다. 혈정마공의 마기가 아니었다면 그 살기를 버티지 못하고 거리를 벌려야 했을 정도였다.
두려움, 그리고 두려움.
권신 무허와 싸울 때도 느끼지 못했던 그 두려움이, 그보다 한참이나 약하고 젊은 고수를 상대하는데 찾아왔다.
하지만 곽준은 웃었다.
그 두려움마저도 그에게는 기쁨이요, 환희였다. 아니, 이제야 상대가 자신 못지않은 악귀로 돌변한 사실이 두려움을 짓누르고 순수한 환희와 쾌락을 선물했다.
‘드디어!’
화아아악!
곽준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마기가 한층 더 강렬해졌다.
이제야 진짜 힘을 쓰는가? 그렇지 않다.
조금 전 연호정과의 공방 때도 그는 넘치는 힘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때도 전력이었고, 지금도 전력이다.
다만 곽준의 마기가 더욱 거세게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연호정의 살기 때문이었다.
극치에 이른 마(魔)는 상대가 강하다고 위축되지 않는다. 오히려 음(陰)의 극치이기도 하기에, 상대의 살기와 부정적인 감정을 빨아들여 그 힘을 불리는 것이다.
곽준이 웃으며 외쳤다.
“날 죽이지 못하면 네 핏줄이 죽는 거야!”
그때, 연호정의 등 뒤로 거대한 불꽃의 날개가 돋아났다.
훅! 퍼어억!
어느새 곽준의 앞에 나타난 연호정이 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곽준의 눈이 커졌다.
정확하게 명치를 비틀어 올려 친 일격이었다. 순간적으로 속이 뒤집히고 눈알이 빠질 것만 같은 압력이 느껴졌다.
빠각!
곽준의 수도가 연호정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연호정의 머리와 상체가 땅과 직각을 이룰 듯 숙어졌다. 머리가 찢어진 연호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투우우웅!
기울어진 상체가 곧바로 펴졌다. 연호정의 좌장(左掌)이 곽준의 옆구리를 때렸다.
곽준의 눈이 충혈되었다.
옆구리에서부터 퍼져 나간 미세한 진동이, 오장육부에 도달하자 그 힘을 벼락처럼 불렸다.
“쿨럭!”
곽준의 코와 입에서 대량의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연호정은 상대가 토한 피를 피하지 않았다. 그대로 핏물을 뒤집어쓴 채 두 손을 휘둘렀다.
빠각! 퍼버벅!
좌측 허벅지 위에 수도(手刀), 좌측 옆구리에 반권(半拳), 우측 갈비뼈 최하단에 정권(正拳), 명치에 투골권(透骨拳), 동맥이 지나는 빗장뼈를 내리치는 주참격(肘斬擊)까지.
인체의 급소와 연약한 곳들을 일수유에 강타하는 연호정의 권법은 그야말로 벼락이 따로 없었다.
“컥!”
답답한 신음을 토한 곽준이 손톱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연호정의 상체에 사선으로 네 줄기의 상처가 새겨졌다.
살점을 파내는 조공(爪功)이었다. 칼에 베이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심각한 상처였다.
우둑!
곽준의 눈이 재차 커졌다.
연호정의 가슴에 고랑을 낸 오른손 손목이 어느새 붙들렸다.
곽준의 손목을 쥔 연호정의 검지가 그의 곡지혈을 찍었다. 그 순간 곽준은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오른팔 전체가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퍼어억!
곽준의 좌장이 연호정의 가슴을 때렸다.
상처 난 가슴에서 대량의 선혈이 뿜어졌다. 단 한 방으로 정신을 잃기 충분한 일격이었다.
연호정의 몸이 사선으로 돌아갔다. 그의 옆구리에는 어느새 마비된 곽준의 오른팔이 끼어 있었다.
콰드득!
팔꿈치 관절이 부서지고 연골이 찢어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호정은 곽준의 오른팔을 부러트린 회전력을 왼발에 담았다.
살짝 허공에 떠오르며 회전하는 연호정의 왼쪽 다리가 곽준의 등허리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곽준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퍽! 콰르릉!
이십여 장 밖, 황궁 외성의 성벽을 뚫고 들어간 곽준.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점점이 핏물이 배어 있었다.
화아아!
입을 벌린 채 곽준에게로 걸어가는 연호정의 몸에서 더 많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이제 남은 삼신기 중 백호기와 현무기는 완전히 쪼그라들어 해당 장기에 숨어 있었다. 청룡기만이 연호정의 몸에 남아, 신체를 유연히 하고 침투하는 마기를 불살랐다.
나머지는 모두 주작기였다.
광명신단이 쏟아 내는 대량의 내공, 그 대부분이 주작화기로 몰리며 연호정의 살기를 끝 간 데 모르고 증폭시켰다.
“……허어.”
무너진 성벽에 깔린 곽준이 하늘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저 자식 저거, 뭐 이렇게 싸움을 잘해?”
힘이 강하다거나 속도가 빠르다거나, 그런 일차원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놈의 감각은 짐승처럼 예민했고, 감각이 반응하는 즉시 공격이 날아왔다.
자신의 공격을 모두 피하면서도 치명타를 날려 온다. 세상에 백전노장이 많고, 천부의 싸움꾼도 많다지만 이렇게까지 무섭게 반응하는 놈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하단에서 상단까지 올라오는 엄청난 급소 공격.
‘살벌하군. 땡중과 싸우기 전에 이런 공격을 받았으면 나라도 위험했어.’
무극에 오른 고수라 한들 사람의 육신을 지닌 이상 급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급소가 파괴되면 범부든 절대고수든 목숨이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다.
‘혈마귀갑(血魔鬼鉀)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중단전이 뭉개졌을 것이다.’
상대를 자극하자마자 초살(初殺)을 당할 뻔했다. 천하의 곽준조차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저런 재미있는 놈을 상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죽으면 억울해서 눈도 못 감지.’
지금 이 순간, 그는 무허를 향한 복수심조차 잊어버렸다. 그에게 있어 연호정은 일생의 복수조차 잊게 할 만큼 멋지고 재미있는 상대였다.
푸스스스!
곽준이 돌무더기에 깔려 있던 몸을 일으켰다.
우두두둑!
관절이 부서지고 연골까지 찢긴 오른팔이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걸 빤히 보고도 연호정은 놀라지 않았다. 당연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그저 곽준의 눈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
바닥에 깔린 회색빛 운무를 헤치며 다가오는 거대한 사신처럼.
무지막지한 살기와 박력을 자아내며 자신에게로 오는 연호정에게, 곽준은 애정마저 느꼈다.
콰아아앙!
이번에는 곽준이 먼저였다.
그 특유의 기기묘묘한 신법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힌 곽준이 우장(右掌)을 휘둘렀다.
콰르릉!
곽준의 우장에서 쏟아져 나온 장력이 검붉은 돌풍을 일으키며 연호정에게 날아갔다.
연호정이 좌권을 휘둘렀다.
퍼어엉!
마치 곽준이 연호정의 첫 일도를 튕겨 낸 것처럼. 연호정의 왼 주먹은 곽준의 혈환장(血煥掌)을 힘으로 튕겨 냈다.
그리고 곽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움직였다.
훅!
더 빠르다.
안 그래도 빠른 속도가, 혈환장이 날아감과 동시에 두 배는 더 빨라졌다.
사람의 감각을 흐트러트리는 신기(神技)의 경공술이었다. 연호정의 감각은 곽준의 속도를 본래보다 더 빠르게 받아들였다.
퍼버벅! 쩌엉!
곽준의 손톱이 연호정의 몸에 이십여 개의 상처를 냈다.
하나같이 깊지 않았다. 연호정의 주먹이 곽준의 팔목과 팔뚝을 후려치며 위력을 상쇄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대단해!’
그 짧은 순간, 벼락처럼 빨리 움직이는 양팔의 움직임을 읽고 팔을 쳐 내 위력을 경감시키는 것은 성천의 고수에게도 쉽지 않았다.
‘짐승이다! 실로 짐승이 따로 없구나!’
훅!
곽준의 양손 손톱에서 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연호정의 살기 넘치는 눈에 빛처럼 순수한 기운이 어렸다.
콰콰콱!
비로소 드러나는 곽준의 절기, 혈야마조(血夜魔爪)가 대지를 찢어발겼다.
위기를 느끼고 물러난 연호정의 몸은 순식간에 넝마가 되었다. 정강이의 각반을 제외한 상체의 경갑 갑주는 모조리 날아갔고, 상의 역시 누더기가 되어 좌측 어깨에 간신히 걸쳐져 있었다.
곽준의 팔이 또 한 번 허공을 갈랐다.
콰콰콰캉!
직접 닿지 않아도 혈야의 마기가 휘몰아치며 연호정은 물론 그 뒤에 있는 흙더미와 부서진 나무들까지 박살 냈다.
굉장한 파괴력이었다. 기공술의 위력만 보자면 천하에서 수위를 다툴 만했다.
주르륵.
비스듬히 선 연호정의 몸은 또다시 피투성이가 되었다. 혈야마조의 공격은 피했지만, 경풍에 휩쓸려 상처를 입은 것이다.
곽준이 씨익 웃었다.
쾅!
더는 대화가 필요치 않다. 곽준이 달려듦과 동시에 연호정의 왼손이 산사태가 난 뒤쪽을 향했다.
퍼어어억!
흙더미를 뚫고 날아온 월도를 쥔 연호정, 번뜩이는 칼날이 그대로 곽준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졌다.
콰아아앙!
두꺼운 월도의 날이 교차된 곽준의 팔뚝에 막혔다.
피는 흘리고 있지만, 그게 전부였다. 혈야마조를 꺼내 든 순간 그의 양팔도 신병이기급의 강도를 지니게 된 듯, 피부만 살짝 베이고 끝난 것이다.
퍼억!
곽준의 각법에 옆구리를 맞은 연호정이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갔다.
곧장 따라붙어 허벅지를 뜯어내려던 곽준은 순간 이동을 멈추고 자세를 낮췄다.
부아아아아앙!
언제 날렸는지 알 수가 없다. 월도가 고속으로 회전하며 곽준의 머리 위를 통과했다.
훅!
재차 뛰어들던 곽준보다 먼저 움직인 연호정의 수검(手劍)이 일직선으로 휘둘러졌다.
퍼어어억!
섬뜩함에 고개를 젖힌 곽준, 주작공의 홍련일섬(紅蓮一閃)이 그의 상부 승모근을 베고 지나갔다.
서로의 숨결마저 느낄 수 있는 초근접 거리였다. 곽준이 하얗게 웃으며 연호정의 턱을 향해 혈야마조를 올려 쳤다.
그때, 두 사람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
곽준의 눈이 흔들렸다.
사아아아악!
어느새 혈야마조가 허공을 갈랐다. 연호정이 그 자리에서 공격을 피해 낸 것이다.
퍼억!
연호정의 무릎이 곽준의 복부를 후려쳤다.
포탄과도 같은 위력, 뒤로 날아가는 곽준의 왼팔을 잡아 끌어당긴 연호정이 그대로 머리를 휘둘렀다.
빠각!
“크윽!”
박치기에 콧대가 부러진 곽준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퍼어억!
곧바로 쫓아가 주먹을 휘두른 연호정, 그러나 그 주먹은 곽준의 왼손에 잡혔다.
터어어엉!
그대로 오른손을 휘두른 곽준, 그의 팔목을 연호정의 왼손이 낚아챘다.
툭! 투둑!
두 사람의 몸에서 흐르는 피가 땅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서로의 팔을 봉쇄한 두 사람이 상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무극의 절대고수가 아닌 짐승들의 싸움이었다. 상처를 입어도 절대 물러나지 않으며, 어떻게든 상대를 파괴하기 위해 고통조차 잊을 만큼 몰입했다.
곽준이 쾌락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연호정 역시 하얗게 웃으며 곽준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콰콰쾅!
솟구친 두 사람의 기파가 충돌하며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