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4화. 복마전(伏魔殿), 그리고 복마전(伏魔戰) (12)
“쿨럭!”
어전에 떨어진 연위가 또다시 피를 한 움큼 토했다.
“가주님!”
연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다가오는 제갈아연의 발소리,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에 머리가 찡하고 울렸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애써 검극사기를 끌어 올려 상단전을 보호한 연위가 자세를 바로 세웠다.
“상황은 어떠하냐?”
제갈아연이 빠르게 말했다.
“현재 팽가주님께서 적들의 화포를……!”
그때였다.
콰콰쾅! 퍼어어엉!
엄청난 폭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끼아아아악!
소름 끼치는 귀곡성은 덤이었다. 연위를 내려 주고 그대로 남쪽으로 향한 거대한 귀신이, 정면에서 오는 적들을 일직선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과연.’
연위의 눈이 빛났다.
‘엄청난 신위로구나.’
그 괴물과도 같은 상대와 싸웠음에도 아직 힘이 넘친다. 하물며 저 속도, 저 체공 시간을 유지하면서 눈에 보이는 적들을 폭살시키며 나아간다.
굉장한 힘이었다. 놀라운 능력이었다.
무극이란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게 아니라 아예 하늘을 노니는 경지라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심검을 얻었을 뿐인 자신은 감히 흉내 내기도 힘든 경지였다.
“저, 저 사람은……?!”
“광혼귀군이다. 저쪽 싸움이 승리로 끝났다.”
제갈아연의 얼굴이 밝아졌다.
연위가 말을 이었다.
“남쪽에서 싸우는 마인까지 처리하고 온다고 했다. 이쪽에서 아무리 잘 버텨도 마인이 승리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난전이 된다. 이곳에서의 승부는 우리에게 맡겨 두고, 마지막 싸움을 끝낸 연후에 합류한다고 하였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제갈아연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어렸다.
두 곳에서 벌어진 절대고수들 간의 전투. 그중 하나가 승리로 끝났다면,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뜻과 같다.
“그래서, 상황은 어떻다고?”
“아, 네! 적들이 화포 수백 문을 끌고 와서 외성 전체를 불사르고 있어요.”
연위는 동요하지 않았다.
“동선을 짧게 가짐과 동시에 수성전을 치를 우리 병력의 사기를 꺾기 위함일 것이다. 혹여 실패하더라도 화탄을 모두 소모하여 황궁의 전력을 끌어내릴 의도도 있겠지.”
제갈아연이 빙긋 웃었다.
확실히 연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특히나 전세를 파악하는 능력만큼은 제갈세가의 현인들 못지않았다.
“정확하세요.”
“팽가주는 호승심이 넘치는 사람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리할 사람은 아니다.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면 돌아올 것이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폐하께서는?”
“황보적 오천인장이 수시로 드나들며 폐하의 안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아무 이상은 없습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오천인장이 움직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황제 폐하께는 아직 움직이지 않은 진짜 세정번이 있어. 그들의 무력은 대문파 정예고수들에 비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하였다.”
“네. 이 싸움이 끝난 이후에도 안전하실 거예요.”
“문제는 적들의 숫자다. 외성 일대를 포위 중인 무림의 병력은 어떻게 되었지?”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때였다.
푸르르르르륵!
하늘 높은 곳에서 수많은 전서구가 어전을 향해 날아왔다.
연위의 눈이 빛났다. 제갈아연의 얼굴이 밝아졌다.
“개방의 전서구예요!”
수십 마리의 전서구가 그들 주변으로 내려앉았다.
재빨리 전서구의 발목에 매인 서신을 펼친 제갈아연이 큰 소리로 외쳤다.
“무림의 병력이 외성 동쪽에서부터 치고 들어온답니다!”
내공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금군 전체에 닿았다.
“우와아아아!!”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금군 병사들의 얼굴에 화기가 돌았다.
위태롭게 날 선 사기가 단숨에 불처럼 타올랐다. 병사들이 내지르는 환호성에 외성에서 벌어지는 전투 소리마저 묻혔다.
“가주님.”
제갈아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됐습니다. 이대로라면 우리의 승리예요!”
“그래, 그렇겠지.”
주르륵.
“헉! 가, 가주님!”
연위가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아 냈다.
이미 하얗게 질려 있던 안색이 조금 더 창백해졌다. 그는 제갈아연 몰래 천라제국검의 검집을 움켜쥐었다.
“세상일은 섣부른 확신을 싫어한다. 이럴 때면 언제나 생각지도 못한 변덕을 부리지.”
“……!”
“외부의 도움이 없다고 생각하고 철통처럼 준비해라. 무림의 병력이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길든 짧든 싸워야 한다.”
제갈아연은 연위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가 걱정을 원치 않을 것이기에,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네!”
물러난 제갈아연이 진법을 살펴보고는 금군 병력을 둘러보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연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들 앞에선 드러나지 않았던 피로가 두 눈에 가득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엔 묘한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빨리 정리하고 몸 성히 와라.”
* * *
내리친 월도가 대지에 거대한 고랑을 만들었다.
콰드드드득!
살벌한 도격을 피해 낸 곽준은 순간 등 뒤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혈야마조를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정!
손톱과 손톱이 부딪치며 매서운 굉음을 토해 냈다.
곡경이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그의 손톱 역시 날카롭게 곤두선 상태였다. 하지만 곽준만큼은 아니었다. 곽준의 손톱은 마치 하나의 병기를 끼워 놓은 것처럼 그 길이가 거의 반 자에 달했다.
“더럽게끔, 손톱 좀 깎고 살지.”
훅!
엄청난 속도로 돌진한 곽준이 곡경의 몸을 향해 양팔을 휘둘렀다. 역시나 혈야마조였다.
그때, 곽준의 아랫배를 향해 날카로운 도풍이 날아들었다.
사선으로 일도양단할 기세였다. 제아무리 곽준이라도 잘려 나간 몸을 붙일 힘은 없었다.
곽준의 양손이 월도의 도신을 내리쳤다.
쩌어어엉!
힘의 수급이 자유자재라지만, 중간에 공격 방향을 튼 만큼 내력의 공백이 생겼다.
곽준의 몸이 뒤로 멀찍이 날아갔다. 동시에 연호정의 공격을 예측한 곡경이 어느새 흑사신장을 뿌렸다.
펑!
곽준이 답답한 신음과 함께 땅으로 내려섰다.
파아아악!
연호정과 곡경의 움직임은 지독하게 안 맞는 것 같으면서도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전투의 흐름을 이끄는 사람은 곡경이었다. 연호정은 곡경의 빈틈이 될 만한 방위로 움직이며 때때로 곽준에게 공격을 가했다.
“이익!”
쩌저저정! 퍼억!
세 번의 도격과 다섯 번의 흑귀살조(黑鬼殺爪)를 튕겨 냈지만, 마지막 일격을 막지 못했다. 곡경의 오른손이 곽준의 옆구리살을 한 움큼 쥐어뜯었다.
‘……!’
곽준은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다.’
그것도 보통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곡경의 손이 한 치만 더 파고들었다면 근육을 넘어 장까지 뜯겨 나갔을 것이다.
물론 혈정마공의 역천회복으로 어떻게든 회복할 수야 있겠지만, 없어진 근육과 살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영양분이 필요하다. 피해가 커지면 사람의 피와 원혼까지 먹어 치워야 할지도 몰랐다.
‘이대로는 안 돼.’
곽준의 증오 가득한 눈이 연호정에게 닿았다.
눈이 마주쳤음에도 연호정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맑고 깊었으며, 흔들림이 없었다.
거대한 월도가 곽준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졌다.
쩌어어어어엉!
양팔로 도격을 막았지만, 그 충격이 몸 전체에 전해졌다. 순식간에 지혈해 둔 옆구리 상처가 퍽! 소리를 내며 터졌다.
쾅!
곡경의 일장이 곽준의 복부를 후려쳤다. 곽준이 핏물을 쏟아 내며 멀리멀리 날아갔다.
그때였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번쩍!
손에서 떠난 월도가 빛살처럼 날아갔다.
결전의 때를 읽은 파멸의 일초, 홍염육살공의 홍화섬(紅禍閃)이 이기어도(以氣馭刀)의 힘을 싣고 쏘아진 것이다.
치명상을 입은 와중에도 곽준은 극심한 위기를 느꼈다. 전신의 마기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곽준이 초인적인 힘을 담아 양손을 휘둘렀다.
퍼어어어억!
그러나, 혈야마조가 구현되기도 전에 연호정의 월도가 곽준의 가슴팍에 꽂혔다.
콰드드득!
곽준의 몸을 꿰뚫은 채로 날아간 월도가 황궁 외측 성벽에 꽂혔다.
곽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퍼버버버버벅!
그의 몸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월도에 실린 사신기(四神氣)의 발경이 그의 몸 곳곳을 돌아다니며 혈도를 파괴하고 있었다. 혈도를 파괴한 기운들은 각 장기에 모여들어 곽준의 마기를 씻어 냈다.
치이이이이익!
곽준의 몸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크아아아악!!”
양손으로 월도의 창봉을 움켜쥔 채 괴성을 지르는 곽준의 모습은 말 그대로 발버둥 치는 마귀의 그것이었다.
“끝났군.”
스르륵.
곽준의 오 장 앞에 내려선 곡경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한 놈이었어.”
“그렇소.”
“어지간히 힘을 빼 놔서 다행이었다. 세상에 저런 마공은 또 처음 보는구만.”
거기엔 연호정의 도움이 컸다.
연호정의 무공은 빠르고 강하며 변칙적이었다. 일대일 전투에서도 충분히 강했지만, 난전에서의 능력이 특히 돋보이는 무공이었다.
연호정이 곡경과 손발을 맞춰 대응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곽준의 역공에 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무극의 고수라도 손발이 안 맞으면 혼자 싸우는 것만 못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둘이 덤볐음에도 위험한 순간을 맞이할 만큼 곽준이 강했다는 뜻이었다.
“후우.”
연호정이 양 무릎을 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주르륵.
그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 삼켰던 핏물이 역류한 것이다.
곡경이 혀를 찼다.
“쏟아 내지 뭐 하러 삼켰냐.”
“피를 보면 좋아할 것 같아서.”
“누가? 저놈?”
“그렇소.”
“그게 뭔 병신 같은 소리냐?”
연호정이 입가를 닦아 내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놈 정체를 모르겠소.”
“혈옥마군이잖냐.”
“그 말이 아니오. 이상하게 나의 살기를 탐했소. 제대로 살기를 드러내지 않으니 벌컥 화를 내기까지 하더군.”
“……살기를?”
“그렇소. 뭐 아는 거라도 있소?”
곡경이 고개를 저었다.
“마기는 모든 음한 기운의 마지막 도달 지점이야. 내 사공도 깨달음이 더해지면 마기(魔氣)로 변할 것이다.”
“……허?”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마공을 익히면 미쳐 버리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애초에 사람의 정신과 육신으로는 마기를 담아내기 힘들어. 그래서 마공은 둘 중 하나다. 완전하게 다듬어져 뛰어난 절기가 되든지, 뛰어난 위력은 발휘해도 사람을 미치게 만들든지.”
곡경이 손으로 곽준을 가리켰다.
“저놈의 마공은 완전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어. 그런 걸 익히고도 무극을 열었으니, 재능이 정말 엄청난 거다.”
“소름이 돋는군.”
“네놈에게서 무슨 살기를 보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마도 저놈의 마기가 너를 원했을 것이다.”
“기가 기를 원한단 말이오?”
“순천(順天)의 기운은 더 깊은 기운에 녹아들어 상생을 이루지만, 역천의 기운은 더 깊은 기운을 잡아먹고 재탄생되지.”
“……?”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 말은, 내 살기가 저놈의 마기보다 더 지독하단 뜻이오?”
곡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냐. 다만 저놈이 일면식도 없는 네 살기를 그렇게 부르짖었다는 걸 보면, 꽤 맛있는 먹잇감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미친.”
“미친 건 너야.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몸뚱이냐? 그 정도 살기를 품고 사는 게 가능하냐?”
“모르오. 알고 싶지도 않고.”
연호정이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싸움이 끝나자 온몸이 아팠다.
“일단 끝을 냅시다.”
“그러자고. 전장 정리하고, 폐하께도 가 봐야 해.”
그때였다.
“난 안 죽는다.”
섬뜩한 목소리에 두 사람이 곽준을 바라보았다.
곽준이 희게 웃었다.
흰자위까지 붉어진 눈, 월도의 창봉을 꽉 쥔 손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역천을 이룬 내가 이대로 죽을 것 같더냐?”
연호정과 곡경이 벼락처럼 권장(拳掌)을 휘둘렀다.
콰콰쾅!
성벽이 무너지며 자욱한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빌어먹을.”
파아아아아앙!
엄청난 속도로 성벽 안으로 뛰어든 연호정이 월도를 쥐었다. 따라서 몸을 날린 곡경이 그 위를 날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곽준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