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8화. 제국의 피 (3)
“후우.”
인부들 틈에 섞여 돌을 나르던 팽무강이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팽가 무사의 걱정스러운 말에 팽무강이 손사래를 쳤다.
“그냥 속이 좀 허해서 그렇다네. 술 한잔하면 나으니까 걱정하지 말게나.”
“저희가 가주님 몫까지 할 테니 조금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떽, 이 사람아. 나이 들었다고 벌써 늙은이 취급인가? 나 아직 자네들 다 모아 둔 것보다 쌩쌩해!”
무사가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물러나는 무사를 웃으며 바라보던 팽무강이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옆구리를 꾹꾹 눌렀다.
‘아직 안 나았나.’
연위와 곽준의 화려한 충돌 이후, 남은 적군 병력은 우왕좌왕했다.
누구라도 그럴 만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재해급의 고수들 셋이서 외성을 뒤집어 놓았으니, 사기는 차치하고서라도 싸움을 계속 이어 가야 할지 말지조차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때, 팽가의 부대를 위시한 무림의 병력들이 동쪽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오며 일대 난전이 벌어졌다.
결과만 말하면 당연히 아군의 승리였다. 비록 연위가 사경을 헤매었지만, 이쪽에는 무극의 고수가 둘이나 존재했다.
열폭탄이 몇 개나 터져서 아군에 사상자가 꽤 많이 났지만, 연호정과 곡경의 맹활약은 물론 뒤이어 금군까지 합세하여 적들을 싹 쓸어 버렸다.
그 과정에서 팽무강 역시 부상이 상당했다. 애초에 기천형과의 전투로 내상을 입은 상태였으니, 난전에서 더 다칠 수밖에 없었다.
“…….”
옆구리를 매만지던 팽무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미안하구나.’
황궁은 구했지만, 정작 가문의 무사들이 많이 다쳤다.
칠백의 지원병 중 사상자만 무려 사백이었다. 그중 백 명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고, 남은 삼백 중 사망자가 백오십이 넘었다.
황제 폐하를 지키고 황궁을 외세의 손에서 구해 냈으니, 이는 참으로 영광된 전투였다. 그러나 가주인 팽무강 입장에서는 무사들의 죽음에 비통해할 수밖에 없었다.
가문으로 돌아가 짧게 제를 지냈지만, 결국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다시 여기까지 와야 했다. 황제 폐하께서 황궁 전투의 주축들을 보자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돌아왔지만, 아직 부름이 없었기에 인부들과 함께 일을 했다. 이렇게 땀이라도 흘릴 때는 무사들을 잃은 슬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자네들은 나를 원망하지 않을 걸세. 내 그것을 잘 알아.’
팽무강이 눈을 감았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간 수많은 무사들과 함께 수십 년을 싸웠다. 그렇게 자신은 살아남았지만, 죽은 무사들의 숫자는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이제 이승에서 흘릴 눈물은 없었다. 이 눈물은 고스란히 모아 두었다가, 훗날 저승에 가서 회포를 풀 때 흘려도 충분하리라.
‘그래도 나는 자네들이 나를 원망했으면 하네.’
후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이 뜨거워진 가슴을 식혀 주었다.
눈을 뜬 팽무강이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휴, 이제 또 움직여 볼까.”
그때였다.
“팽가주님!”
“음?”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철곤개가 달려오고 있었다.
팽무강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하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어인 일로 날 찾아오셨는가?”
철곤개가 고개를 숙였다.
“본방의 방주님께서 외성 밖에 도착하셨습니다. 방주님께서 가주님을 뵙고자 하시는데, 혹 시간이 괜찮으십니까?”
팽무강의 눈이 번쩍였다.
“용두방주께서 오셨다고?”
“그렇습니다.”
“산동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벌써 여기까지 오셨나?”
철곤개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사태가 사태이다 보니, 무리해서 오신 모양입니다.”
“허어.”
팽무강이 천으로 땀을 닦고 매무새를 바로 했다.
“안내하게. 어서 가서 뵙자고.”
“알겠습니다.”
“한데 나야 뵈면 좋지만, 굳이 콕 집어서 나를 보자고 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는가?”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만, 안에서 벌어졌던 일을 상세히 듣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음, 그렇기야 하겠지.”
“그리고…….”
“응?”
철곤개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개와 어떤 도사에 대한 말씀을 나누셨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 *
모든 무장을 해제한 연호정이 어전에 들었다.
어전을 지키던 황보적이 새로 만든 문 바깥에서 외쳤다.
“폐하, 말씀하신 연가의…….”
“들라 하라.”
“……예.”
덜컹!
거대한 문이 좌우로 열렸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코를 벌렁거렸다. 밖에서도 느껴졌지만, 어전 안에서 무척이나 좋은 다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정인가?’
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용정은 안다. 하지만 어전에서 풍기는 다향은 일반 용정과는 궤를 달리하는 듯했다.
‘향이 엄청 진한데도 묘하게 상쾌하군.’
맡기만 해도 건강이 좋아질 것 같은 다향은 처음이었다.
연호정이 붉은 융단 위를 그대로 걸었다.
‘저 사람이군.’
융단으로 쭉 이어지는 길.
그 좌우에는 이십여 명의 관리들이 나뉘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황궁이 이 지경이 되자 가까이 있던 고관들이 서둘러 입궁한 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분위기 봐라?’
엄숙하기 그지없다.
듣기로 젊었을 때의 영민함을 잃은 지금의 황제는 정국을 뒤로한 채 주색에 빠져서 지독하게 무능해졌다고 하였다.
‘다르군.’
관리들 중 일부만 왔을 뿐이지만, 하나같이 이름 높은 고관들이었다.
정치에 빠삭하고 눈치 빠른 이들이 잔뜩 긴장한 채로 엎드려 있었다. 아무리 황제라지만, 그런 평가를 받던 위인이라면 이렇게까지 분위기를 잡긴 힘들었을 것이다.
연호정이 융단의 중앙까지 걸어왔을 때였다.
“폐하, 소신 한림대학사 조충이 간언을 올리나이다.”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조충이라는 관리가 말을 이었다.
“제아무리 배움이 얕은 강호의 무부라고는 하나 그 또한 황제 폐하의 자식이요, 제국의 신민이 분명할진대 일체의 예법도 없이 무도하기 그지없는 모습만 보여 주고 있사오니, 이는 참형에 처해도 부족함이 없는 대죄인 줄 아뢰옵니다. 부디 저 무도한 무부를 중형에 처하여 폐하의 위엄을 만천하에…….”
“조충.”
순간 어전의 분위기가 무섭도록 싸늘해졌다.
황제는 그에게 조충이라 하였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관명을 부르는 것이 예의였다.
조충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예, 예! 폐하.”
“짐이 그대의 발언을 허락하였는가?”
“……!”
“짐은 그런 적이 없는데.”
어딘지 모르게 농담조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 웃음기 어린 목소리는 마치, 너희들 정도는 언제든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수 있는 존재라고 과시하는 듯했다.
창백하던 조충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 갔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소신의 경망을 용서해 주십시오!”
“황궁의 예법에 어두운 무부의 악의 없는 모습은 죽을죄 운운하며 중형에 처하라 하더니, 짐의 허락도 없이 요언을 입에 올린 그대는 용서를 바라는구나.”
“……!!”
“머리에 든 것이 많아도 성품이 간악하면 세상을 해칠 사이한 지식이 될 것이요, 아는 것이 많지 않아도 성품이 올바르면 일생의 천명(天命)을 바로 세울 지혜를 갖출 수 있다고 하였다. 그대는 어느 쪽이라 생각하는가?”
쿵!
조충이 바닥에 이마를 찍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소신을 주, 죽여 주시옵소서!”
황제가 입을 열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폐하.”
“조충을 옥에 가두어라.”
황제는 끝까지 관명을 부르지 않았다.
어전의 문이 열리며 황보적과 금군 병사들이 들어왔다.
황보적이 황제에게 절을 올리자 황제가 손을 까딱였다. 동시에 병사들이 절도 있게 걸어와 조충을 끌고 나갔다.
덜컹!
어전의 문이 재차 닫혔다.
이제 어전 안은 숨소리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황제가 손을 뻗었다.
“편히 앞으로 오라.”
연호정이 고개를 숙이며 계단 바로 밑까지 도달했다.
잠깐 걷는다 싶더니 어느새 거기까지 도달했다. 엎드린 관리들은 연호정의 빠른 보행에 내심 깜짝 놀랐다.
황제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편히 앉으라.”
“예.”
연호정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편히 앉으라 하였거늘, 어찌 무릎을 꿇는가?”
연호정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황궁의 예법은 모르니, 제가 아는 한에서 가장 성실한 예를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대의 마음은 가상하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네.”
“일국의 주인이시자 천자를 눈앞에 두고 편히 앉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부디 소인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당당함을 넘어 건방지기까지 한 어조인데도 묘하게 예의는 차리는 느낌이었다.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강동 벽산연가의 장남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아비 되는 사람과는 너무나도 다르군.”
“…….”
“하지만 그대의 그 당당함은 연씨 가문의 주인과 더할 나위 없는 판박이로다. 결은 달라도 핏줄은 핏줄, 과연 그 아비에 그 자식이다.”
연호정이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소인의 아비 된 자는 온후한 성품과 공사 구분이 분명한 눈으로 지금껏 천하를 위해 살아온 대협입니다. 부족한 소인은 부친의 발끝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오호.”
황제의 얼굴에 흥미가 감돌았다.
“천자의 앞에서도 당당한 위인이, 아비 된 자 앞에서는 그리도 겸손하구나.”
“…….”
“건방지기는 해도 그대의 성품 역시 나쁘지 않음을 알 수 있겠다. 그대 말마따나 부친에 이르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부친의 위명에 먹칠을 할 만한 위인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송구하옵니다.”
연호정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보다 더 공손해진 자세였다.
그는 황제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만나 본 적도 없었고, 그의 세상에 무림은 있어도 황궁은 없었다. 애초에 너무 먼 세상에 있는 존재라 호불호를 따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아버지인 연위를 알았고, 연위를 좋게 봐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황제를 향한 예의를 더 깍듯이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연호정의 행동을 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볼 수 있었다.
“허허허.”
용상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어전을 진동시켰다.
고관들은 내심 깜짝 놀랐다. 황제가 저렇게 크고도 소탈한 웃음을 짓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만 해도, 나는 그대가 강호의 흔한 야인이라고 생각하였다. 호부 밑에서도 견자가 나는 세상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
“…….”
“하나 이리 보니, 아비를 생각하는 그 마음 씀씀이가 몹시도 곱고 올바르다.”
“…….”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악인이라도 제 부모를 귀히 여기면 사람으로 죽고, 만고의 충신이라도 제 부모를 외면하면 짐승으로 죽는다고 하였다. 짐은 그대가 사람임을 보았다.”
연호정은 말없이 고개만 더더욱 조아렸다.
황제가 손을 들었다.
“고개를 들라.”
연호정이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황제가 말했다.
“아비를 사랑하는 자, 스승을 사랑할 줄 안다. 스승을 사랑하는 자, 군주를 사랑할 줄 안다. 군주와 스승, 부친의 은혜와 사랑은 하나이니, 이를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한다.”
“…….”
“혼인을 하였는가?”
“……예?”
연호정은 흔치 않게 당황했다.
“저 말…… 아니, 소인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다.”
“아직 마음에 드는 처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대는 강호의 야인이니 짐으로서는 달리 가르칠 것이 마땅치 않겠군. 그러나 군주이자 또 하나의 아비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짐에게 방년에 이른 딸이 하나 있다. 혼사를 치르겠는가?”
연호정의 입이 떡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