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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782화 (782/963)

782화. 제국의 피 (7)

제갈가와 인연이 있는 관리들과 함께 서책을 분류하던 제갈아연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이 정도면 이쪽은 충분하겠지요?”

“음, 그런 것 같습니다.”

“다음은…….”

“아, 괜찮습니다. 나머지는 우리가 할 테니 이만 쉬십시오.”

“에이, 밥값은 해야죠.”

관리가 손을 저었다.

“본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껏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칩니다.”

“그래도…….”

“그리고 지금부터 정리할 문건들 중엔 외인에게 알려져선 안 될 것들이 많습니다.”

“아.”

제갈아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궁에 들어온 무림인들은 황제의 허락을 받고 초토화된 궁을 정리했다. 그중 제갈아연은 관리들을 도와 찢어지거나 불살라진 문건들을 제외한 나머지들을 추리거나 복구하는 데에 힘썼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 제갈가의 장녀이지만, 그녀는 황궁에 속한 관리가 아니었다. 비밀 문건에 손대는 것은 황제의 직접적인 허가가 있지 않은 이상 불가한 일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합니다.”

제갈아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 말씀하지 마세요. 당연한 일인걸요. 오히려 이제 합법적으로 쉴 수 있어서 좋은데요?”

“하하.”

“나중에 따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관리 열 사람이 붙어서 정리한 것보다 소저 한 사람이 정리한 양이 몇 배는 더 많았습니다. 그토록 효율적인 자원을 두고 썩힐 순 없죠.”

제갈세가와 인연이 있을 뿐, 한 번 본 적도 없었던 이들이다. 그러나 며칠 간의 고생으로 부쩍 가까워진 그들은 서슴없이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로 변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그러십시오. 아, 오늘은 동료분들과 축하주라도 한잔 나누시는 게 어떻습니까?”

“축하주라니요?”

“음? 저기 벽산연가의 장자분과 친분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제갈아연이 피식 웃었다.

“친분 있죠. 악우(惡友)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말이 악우지, 목소리만 들어도 깊은 친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연가의 장남분께 경사가 있지 않습니까?”

“경사요? 아! 그거요?”

제갈아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엄청난 경사죠. 참나,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요.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그 나이에 강호 최고수 반열에 오르는 건 천지가 개벽할 일이거든요.”

“예?”

“네?”

“……아, 그 또한 축하할 일이군요. 맞습니다. 저희야 잘은 모르지만, 젊은 나이에 그와 같은 위업을 이룬 것은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닐 겁니다. 그것도 경사지요.”

제갈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 말고 달리 경사가 있나요?”

“못 들으셨습니까? 폐하께서…….”

그때, 옆의 관리가 눈을 부라렸다.

“이 친구야.”

“어? 아…….”

갑작스레 당황하는 그들을 보며, 제갈아연의 눈이 반짝거렸다.

“황제 폐하께서 그 녀석에게 무슨 선물이라도 주셨나요?”

“그것이…….”

눈을 부라렸던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시국이 좋지 않은 상황, 관리인 저희로서는 입조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직접 들은 사항도 아니니, 소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궁금한데요? 뭔데요? 말씀하시는 걸 보니 어차피 돌 소문인 것 같은데, 미리 좀 들려주시죠.”

관리의 얼굴에 고민이 깃들었다.

잠시 후.

“뜨헉!”

깜짝 놀란 제갈아연은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가 버렸다.

* * *

“통천진인. 강호삼기(江湖三奇) 혹은 강호삼통(江湖三通)이라 불리는 기인들 중 하나.”

“…….”

“이제는 스러져 버린 과거 전진교(全眞敎)의 후예라고 알려졌네. 다만 실제 전진교처럼 정신 수행과 내단 수양에 힘쓰기보다는 한때 널리 퍼진 신선도(神仙道)를 끌어와 공부했고, 그 과정에서 신통한 능력을 얻어 점복(占卜)과 부적술에 능해진, 말하자면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술사(術士)가 되었지.”

화진천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어두워 보였다.

“술사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무림인의 시선으로 본 것이고, 실제로는 도(道)를 추구하는 정직한 도사일세. 본인이 지닌 그 특별한 능력을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지. 학문으로 궁극의 지혜에 도달하려는 자가 남들보다 더 많은 문자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라는 식으로 비유하곤 했었네.”

“그랬군요.”

“나와는 막역한 사이였어. 실제로 그 덕분에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고, 남들은 몰랐던 일의 단서를 얻거나 천하에 위협이 될 일들을 사전에 방지하기도 했었네.”

천하에 위협이 될 일들.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가 예전 같지 않음을 느꼈네. 얼마 되지 않았어. 삼사 년 전쯤일까? 그는 내게 더 이상 천기(天機)를 볼 수 없다고 하였네. 적어도 내가 봤을 때 그건 진실이었어.”

“천기…….”

“그 이후 짧으면 한 달, 길어도 서너 달에 한 번씩은 들러 술자리를 가졌지. 하지만 어인 영문인지, 그의 모습은 볼 때마다 점점 더 수척해졌네.”

화진천이 눈을 감았다.

통천진인을 회상하는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본 게 일 년 전이라네. 그때의 그는 도저히 도사라 부를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있었어. 총기와 신기로 번뜩이던 두 눈은 잔뜩 충혈되어 혼탁했네. 그전에도 살은 다 빠져서 거죽만 남고 성격도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지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차분해 보였네.”

“…….”

“그 차분함은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나는 그에게서 말 못 할 공포를 느꼈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해서도 안 될 무언가가 스산하게 웃는 듯한 광경이었지.”

화진천이 재차 눈을 떴다.

그의 눈은 깊은 근심과 서글픔, 그리고 미약한 두려움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그의 변화를 두고 볼 수가 없었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알았기에, 누군가에게서 조언을 얻고자 했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탁무자.”

“어떻게 알았나?”

“황궁에 오기 전, 저도 검선 노선배님을 뵈었습니다.”

“……!”

“그리고 들었지요. 그분께서 왜 무당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를.”

“……통천에 대해서도 들었겠군.”

“그렇습니다.”

화진천이 한숨을 쉬었다. 당장이라도 땅이 꺼질 것 같은, 깊고 무거운 한숨이었다.

“그가 악랄한 잡신에 홀려 버렸다는군.”

“예.”

“믿을 수 없었네. 사실 지금도 믿기지 않아.”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를 떠나, 그는 방주님께서 아시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삼교와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연호정의 말을 들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것은 화진천이었다. 담담하게 연호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고통이 가득했지만,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계셨군요.”

“안다기보다는 의심하고 있었네.”

“제가 그에 관해 물어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연호정이 팔짱을 꼈다.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도, 그의 입은 쉬지 않았다.

“방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통천진인 덕분에 천하에 위해를 가할 일들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고.”

“그래, 그랬네.”

“삼교 이상의 위협이 될 만한 일이 당금 천하에 또 있습니까? 심지어 삼교는 느닷없이 닥쳐온 불행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을 뿐, 그들은 수십 년 전부터 중원에 암약하며 완전무결한 승리를 위해 온갖 공작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화진천이 한숨을 쉬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통천진인이 본다는 그 천기라는 것. 어떻게 그런 걸 보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짐작건대, 원하는 것만 골라서 알아낼 수 있을 만큼 속 편한 능력은 아닐 거라고 봅니다.”

“자네 말이 맞네. 흘러가는 천기를 순간순간 읽어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악스러운 일이야. 거기에 원하는 것만 콕 집어서 읽어 낼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역천일세.”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삼교와 관련된 것을 놓쳤다고 보기에는 그가 지닌 능력이 지나치게 규격 외입니다.”

“…….”

“새외의 잡신에게 홀린 것이든 그 스스로가 본래부터 삼교 출신이었든, 그의 변화는 결코 몇 년 새에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훨씬 옛날부터, 그는 삼교의 존재를 알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애써 부인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나도 그렇게 결론을 내렸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궁금한 것은 하나입니다.”

팔짱을 푼 연호정이 화진천을 주시했다.

“그에게 중원의 정보를 얼마나 알려 주셨습니까?”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지만, 적어도 이곳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안목과 중원 무림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갖춘 이들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통천진인과 화진천의 관계 때문에 중원의 앞날이 꽤 살벌하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화진천이 재차 한숨을 쉬었다.

“많은 것을 알려 주었지. 우리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야.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안다네.”

“사람을 아는 것과 그 사람이 다루는 일에 대해 아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

“방주님께서는 통천진인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잘 모르셨습니다. 반면 그는 방주님께서 다루시는 정보 전반에 대해 많은 것을 얻어 갔군요.”

“그렇다네.”

“음.”

화진천이 눈을 감았다.

“내, 변명은 하지 않겠네. 지금껏 대륙에서 벌어졌던 일들, 삼교의 광신도들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죽은 책임에서 나는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걸세.”

가득상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사부님.”

“너에게는 미리 말해 주지 않아서 미안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풀 생각이었어.”

가득상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통천진인이 그리도 악랄한 자라는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것은 결코 죄가…….”

“죄가 되지.”

“…….”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수장이란 그런 것이야. 의도가 어떻든 간에 결과를 나쁘게 만들면, 그것은 결국 수장의 책임인 것이지.”

화진천이 탄식을 토했다.

“하물며 용안(龍眼)이라고까지 불리는 개방의 총수라는 작자가 적의 간세를 알아보지 못하고 중요 정보를 미주알고주알 알려 주었으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가득상의 눈이 흔들렸다.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때 이른 자괴입니다.”

“……?”

“방주님께서 그에게 여러 정보를 알려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만, 실제로 그가 그 정보들을 고스란히 삼교로 넘겼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는 새외의 잡신, 아니 혈신(血神)이라는 듣기에도 끔찍한 신을 모시고 있다고 했네. 완전히 삼교의 사람이라 봐도 무방하거늘 어찌…….”

“제 말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항 때문에 중원 정보 조직의 총수께서 자괴감을 느끼셔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

“방주님께서는 앞으로 하실 일이 많습니다. 또한 방주님의 존재는 당장 대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세상을 위해 더 힘을 써 주셔야 합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모든 걸 내려놓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은.”

가득상이 고맙다는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더는 그쪽으로 주요 정보가 들어가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래. 일단은 그래 보겠네.”

“하면 이제 차례를 바꿔 보도록 하지요. 방주님께서 궁금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통천진인의 제자가 황궁에 있네. 그 이름 모를 도사를 뇌옥에 가둬 두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황궁의 뇌옥이니 섣불리 만남을 요구할 수가 없어. 혹 이 거지가 그와 만날 방법이 있겠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무림이 황궁을 구했으니, 소소한 빚을 청산할 때가 되었습니다.”

“응?”

“황제 폐하께 요청을 드리겠습니다. 천자로서의 면이 있는데, 쪽팔리게 이 정도 요구도 안 들어주겠습니까?”

일행이 입을 쩍 벌렸다.

화진천조차 놀라서 떠듬떠듬 말했다.

“자네, 마, 말투가 너무…….”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없는 데서는 천자 욕을 해도 무죄입니다. 가죠. 이것저것 뜯어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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