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5화. 대국의 선(線) (1)
두근!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의식은 되살아났다. 다만 또렷하지 않아 꿈을 꾸듯 몽롱했다.
그 몽롱함 속에서도 그는 생각했다. 곧 자신이 온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이 몽롱함에서 벗어나 의지로써 신체를 완벽히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집중…….’
사아아아악.
낭떠러지 밑에 처박혀 있다가 무서운 속도로 상승하는 것 같다.
몸은 움직이지 않는데, 그 고속의 부유감은 명확히 느껴졌다. 신비한 체험이었다.
‘일체의 잡념 없이.’
훅!
순간 정신이 또렷해졌다.
정신이 깨어난 사람은 자연스레 눈을 뜨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우우웅.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었다.
사람이 눈을 감고 공상에 잠길 때, 집중이 극에 이르면 자신이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
그의 의지는 실로 막강하여 그러한 공간을 너무나도 손쉽게 만들어 냈다.
자신의 몸, 자신의 기(氣). 피와 기가 흐르는 통로를 바탕으로 만든 거대한 궁전이었다.
“여기구나.”
몇 발 앞으로 걸어 나온 그는 거대한 첨탑을 올려다보았다.
그 첨탑은 어쩐지 검(劍)을 닮은 형태였다. 구름마저 뚫을 듯 까마득한 높이로 솟구친 첨탑은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연위의 눈이 빛났다.
첨탑의 일 층에는 수많은 문이 있었다. 그 문 중 대다수는 활짝 열려 있었고, 열린 문에서는 무수히 많은 마차가 끊임없이 튀어나와 팔방으로 달리고 있었다.
돌아오는 마차들도 많았는데, 그 마차들은 하나같이 낡고 해진 모습이었다.
“이것이 나의 중심이구나.”
이 첨탑은 곧 그의 무공 근본인 검극사기였다.
팔방으로 내달리는 마차 행렬은 온몸의 신경으로 퍼져 나가는 진기였고, 피폐해져 돌아온 마차들은 제 일을 마치고 힘을 잃은 진기였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진기는 곧 온몸으로 피를 보내는 심장과 같았다.
연위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그는 환한 빛 앞에 서 있었다.
너무나도 밝았지만, 눈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강렬한 빛인데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강하지만 편안함이 느껴지는 빛의 핵(核)이었다.
“이건 뭐지?”
연위는 이 빛에서 친숙함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런 힘이 내게 있었던가.”
천하의 어떤 고수보다도 출중하게 발달된 상단전.
그러나 자신의 상단전에 머무는 신기(神氣)의 핵은 이 정도로 크지 않았다. 그 농도만큼은 이전과 다름이 없었지만, 크기가 세 배는 더 커진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일. 연위는 불안함을 느꼈다.
후우우웅.
그가 불안해하자 빛의 세기가 약해졌다.
순간 아차 싶어진 연위가 애써 기분을 상기하려 할 때였다.
‘……?!’
연위는 약해진 광채 속에 드리워진 이질적인 무언가를 보았다.
‘황금?’
정확히는 황금빛 무언가다.
‘뱀?’
뱀은 아니었다. 뱀처럼 길고, 똬리를 틀고 있었지만 분명 뱀은 아닌 것 같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건 내 힘이 아닌…….’
그때였다.
훅!
황금빛 무언가가 순식간에 연위의 몸을 관통했다.
“헉!”
깜짝 놀란 연위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멀쩡했다. 몸을 관통하는 느낌은 받았지만, 정작 의식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뭐였지?’
번쩍!
연위가 몸을 돌렸다.
한참 떨어진 곳, 하늘에 닿을 듯한 첨탑에서 강렬한 빛의 무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위가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그의 의식이 순식간에 첨탑 근처에 도달했다.
“……!!”
연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쿠르르릉!!
지진이라도 난 듯 첨탑이 거세게 흔들렸다. 동시에 연위는 가슴 안쪽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진기가…….’
쿠르릉! 쿠르르르릉!
팔방으로 달려 나가는 마차들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었다.
더 크고 화려해졌다. 바퀴는 두꺼워졌고, 마차를 끄는 말들도 훨씬 더 우람하게 변했다.
마차들의 외형이 더 강인하게 바뀌었다는 것은 곧 그의 진기 역시 이전보다 강하고 농밀하게 변화했다는 것을 뜻했다.
‘왜?!’
의문을 품음과 동시에 머리에서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다.
번쩍!
상단전의 핵에서부터 쏘아진 황금빛 무언가가 또 한 번 첨탑을 강타했다.
쿠르르르릉!
흔들리는 첨탑이 그 크기를 더욱 불렸다.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마차들도 더 크고 탄탄하게 변했다.
연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번쩍! 쿠르릉! 번쩍! 쿠르릉!
빛이 번뜩이고 첨탑이 흔들린다. 그러면 마차들의 외형이 자꾸만 바뀐다.
상단전에 도사리고 있던 어떤 힘이 검극사기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위에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그러나 폭발적으로 신공(神功)의 경지를 높여 주고 있었다.
멍하니 첨탑을 올려다보던 연위는, 문득 자신의 오른손에 무언가가 잡혀 있음을 깨달았다.
‘검?!’
검이었다.
수수하지만 그 비율이 완벽한 강철의 검이었다. 실제 검이 아닌, 연위 스스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검이 그곳에 있었다.
쿠르르르릉!
천지가 진동했다.
그 무서운 환경 속에서, 연위는 어쩐지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검은 내 곁에 있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그렇다면 검사는 어찌해야 하는가?
‘손에 쥐어져 있지만, 내 것일 뿐 나는 아니다.’
연위가 검을 거꾸로 쥐었다.
‘내가 곧 검이 되어야 한다.’
그가 힘차게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푹!
* * *
번쩍!
“악!”
연위의 면회를 온 제갈아연은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우우우웅!
연위의 미간, 명치, 복부에서 번져 나온 강렬한 광채가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제갈아연이 놀라서 일어났다.
“가주님!”
그때, 연위가 눈을 떴다.
“…….”
방을 가득 채웠던 빛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후우.”
가벼운 한숨과 함께 연위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오랫동안 누워 있었음에도 움직임이 몹시 부드러웠다. 마치 그저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것 같았다.
“가, 가주님! 깨어나셨군요!”
“아연이구나.”
연위는 언제나처럼 담담하고 여유가 넘쳐 보였다.
제갈아연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다행이에요.”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느냐?”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랬구나.”
연위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오는 진즉 지난 듯했다. 저녁은 아니지만 조금씩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황궁이구나.”
“네!”
“황궁의 상황은 어떠…… 아니다. 되었다.”
천천히 이불을 걷은 연위가 두 발을 침상 아래로 내렸다.
제갈아연이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가주님, 더 누워 계세요.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괜찮다.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의식은 깨어 있었다.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괜찮을 게다.”
“그렇다면…… 여기, 물 좀 드세요.”
연위가 사발의 물을 천천히 들이켰다.
결코 급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물의 감촉이 신선했지만, 연위는 여전히 담담했다.
“적당히 따뜻하니 좋구나. 네 실력이 그새 또 오른 듯하다.”
차가워진 물그릇을 내공을 이용, 순간적으로 데워서 건넨 것이다. 제갈아연의 기공 경지가 무척이나 뛰어남을 알 수 있었다.
제갈아연이 민망한 듯 웃었다.
“별것도 아닌걸요. 그보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래, 괜찮다.”
“식도로 관을 넣어 음식물을 넣어 드리긴 했는데, 그래도 허기가 지실 겁니다. 약식부터 드시지요.”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순간 제갈아연은 움찔했다. 연위의 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천지간의 기(氣)가 끊임없이 몰려들어 양분을 공급해 준 덕에, 허기는 져도 급하지 않구나.”
“그래도…….”
“그보다 어전에 들어야겠다.”
제갈아연의 눈이 흔들렸다.
“황제 폐하를 뵈시려고요?”
“일개 필부에게 황실의 운명을 맡겨 주신 분이다. 정신을 차렸으니, 인사부터 올려야 함이 마땅하다.”
“그럼…….”
제갈아연이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가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다.”
“아니에요. 가주님께서 깨어나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미소 짓던 연위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네?”
“얼굴에 혼란이 그득하구나.”
“제 얼굴에요?”
“그래 보인다.”
제갈아연이 씨익 웃었다.
“그런 일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연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인사를 올린 제갈아연이 방을 나섰다.
연위는 바닥에 내려섰다.
생각보다 괜찮았지만, 역시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탓인지 바닥을 디딘 발바닥의 감촉이 조금은 어색했다.
스르륵. 스르륵.
옷을 벗고 한옆에 잘 개어진 옷으로 갈아입은 연위의 눈에, 벽에 걸린 한 자루 검이 보였다.
수수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검병과 검집 모두에 예술적인 세공이 가득한 보검이었다. 검신의 길이와 두께가 조금은 전투적이나, 그 자체로 훌륭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천라제국검이었다. 황제가 직접 하사한 제국의 보물 중 하나였다.
연위는 제국검을 들고 방을 나섰다.
후우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이 몹시 싸늘했다.
환자의 몸으로 받아 낼 만한 바람이 아니다. 호흡이 무척 느린데도 코 밖으로 김이 새어 나온다. 굉장한 추위였다.
연위가 눈을 감았다.
딱! 딱! 쿵!
저 멀리 어디선가 인부들의 작업 소리가 들려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법 강하게 부는 이 한풍은 많은 정보를 알려 주었다. 수많은 소리와 냄새, 고수들의 움직임은 물론 대기의 흐름까지.
‘좋구나.’
황궁은 피폐해졌다. 그날 전투로 인해 외성과 내성 곳곳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널따란 영역에서는 강한 생명력과 희망 가득한 분위기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과거에 벌어진 흉사를 잊고 미래를 위해 달려 나가는 이들의 열정 가득한 숨결이 느껴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황궁의 분위기를 느끼던 연위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우우우우웅.
검극사기가 자연스럽게 일며 그의 몸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알아서 몸을 재생시키던 기운을, 명백한 의지를 갖고 훨씬 더 풍성한 움직임으로 이끌었다.
푸스스스스.
쌓여 있던 탁기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천천히 뜨인 눈에, 더 이상 피로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쓰러지기 전보다 훨씬 더 또렷하고 깊어진 두 눈이 거기에 있었다. 흐린 장막을 벗어던진 그의 눈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빨려 들어가게 하는 묘한 힘으로 가득했다.
‘그렇구나.’
연위는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어찌하여 진기가 이리도 성장했나 의문이었건만.’
의지로 진기를 운행하던 도중, 비로소 그는 깨달았다. 신공의 성장 이유를, 진기의 밀도가 높아진 진짜 이유를.
“……정아.”
어쩐지 낯설면서도 친근했던 그 기운의 정체.
그것은 바로 자신의 혈육, 이승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존재 중 하나의 힘이었다.
“제대로 해 준 것도 없는 못난 애비를, 너는 너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잘 보살펴 주었구나.”
아들이 어떤 심정으로 기를 나누어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고맙고, 더 미안했다.
‘폐하를 뵙고 곧장…….’
그때였다.
“……?!”
가부좌를 푼 연위가 천천히 일어났다.
잠시 후.
거처의 문밖에서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