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88화 (788/963)

788화. 대국의 선(線) (4)

묵룡부주 양천.

성천십삼좌의 일인으로, 당대 흑도 무림의 제왕이자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어지럽고 난잡한 흑도인들을 하나로 모아 거대한 연합체를 일궈 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역량을 알 수 있다. 사음교주에게 많은 지원을 받았다지만, 돈이 있다고 누구나 그런 위업을 달성하지는 못한다.

황제 역시 양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놀랐고, 동시에 ‘과연.’이라는 생각을 했다.

“투왕 양천이라. 당대 무림을 양분하는 절대자에게 청화를 보내라는 것인가?”

“저에게 제안하셨던 조건과 동일하게 진행하신다면, 그렇습니다. 청화공주를 보내셔야겠지요.”

“호오.”

“그러나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대단할 겁니다.”

“그런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황제의 딸과 양천의 혼사.

이 사실이 무림에 알려지면, 그야말로 엄청난 폭풍이 불어닥칠 것이다.

“그대는 괜찮겠나?”

“예?”

“그대가 중매쟁이가 되어 짐의 딸과 묵룡부주를 이어 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그대들 정파 무림에서 난리가 날 터인데.”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물론 그렇겠지요.”

“……의외로군.”

물끄러미 연호정을 내려다보던 황제가 용상 좌측으로 고개를 틀었다.

“게 있는가.”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용정을 준비하라.”

“예.”

잠시 후, 내시 둘이서 차를 내왔다.

용상 앞 탁자에 찻잔이 올라왔고, 연호정 앞에는 작은 다탁이 놓였다.

“어떤가?”

연호정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예?”

“자네 앞의 다탁, 꽤 화려하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심미안(審美眼)이 없는 제가 보기에도 예사 물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크지. 쓸데없이.”

“……?”

스르륵.

몸을 일으킨 황제가 찻잔을 들고 용상에서 내려왔다.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연호정 앞의 다탁에 자신의 찻잔을 놓은 황제는 맞은편 맨바닥에 그대로 앉았다.

이 순간만큼은 연호정조차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

“사람을 보려면 가까이서 마주하는 게 좋지. 그대처럼 뛰어난 사람이라면 더더욱.”

황실의 법도, 황제로서의 품위 따위는 그대로 내던져 버렸다.

마치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는 듯 바닥에 편안히 앉은 황제의 모습은, 일국의 제왕이라기보다는 저잣거리 평상에 앉아 있는 노인의 소탈함에 가까웠다.

“차 들지.”

“……예.”

연호정은 괜스레 올라오는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황제가 빙긋 웃었다.

“부담스러운가?”

“폐하께서 마주 보고 앉아 계시는데, 누가 있어 부담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재미있는 소리를 잘도 하는구먼. 그대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소인에 대한 강호의 평판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 원체 예의가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지요. 다만 그런 소인이라도, 일국의 천자 앞에서 부담을 느끼지 못할 만큼 둔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좋군. 어떤 순간이라도 당황하지 않을 것 같은 그대가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괜찮은 유희가 아니겠나.”

가볍게 차를 한 모금 마신 황제가 연호정의 눈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황제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법도에 맞지 않지만, 자신의 눈을 보고자 하는 황제의 바람을 알았기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

묘한 침묵이 어렸다.

반 각이나 지났을까? 황제가 입을 열었다.

“내 수십 년간 국정을 돌보지 않았지만, 그동안 주색에만 빠져 있던 건 아니야.”

“…….”

“무도한 이들의 눈을 피할 수 없어, 내가 볼 수 있는 책들은 지극히 한정되었다네. 그중 하나가 상법(相法)에 관한 것이지.”

상법, 즉 관상학(觀相學)을 뜻한다.

관상학의 역사는 깊다. 물론 생김새만으로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이 말이 안 되긴 하지만, 가끔 놀랄 정도의 통찰력을 지닌 사람은 관상학을 기반으로 그 사람의 과거를 읽어 내거나 미래를 점치는 등 신통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상법은 제대로 된 학문으로 취급받지 못했다네. 이른바 유사 학문이지. 황제가 읽을 필요도 없거니와, 읽어서도 안 될 사이한 학문이야.”

“…….”

“다만 상법에 흥미가 있어 파다 보니, 짐에게도 제법 재능이 있긴 한 모양이더군.”

황제의 눈이 깊어졌다.

“그런데도 그대는 잘 읽히지가 않아.”

“송구하옵니다.”

“그대의 언행을 보았고, 그대가 걸어온 역사를 아네. 그 모든 것을 배제하고 보면…….”

“…….”

“……잘 모르겠군.”

황제가 피식 웃었다.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착각했던 건지, 그대가 읽기 어려운 사람인 건지 모르겠네.”

연호정이 무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독특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묘한 상이야. 생김새, 상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 같은데…… 그 올곧음과 명확한 주관은 도덕과 어울리지 않는구먼.”

“……?!”

“아비 된 자는 만세에 길이 남을 정의로운 상의 소유자이거늘, 자식인 그대에게서는 아비의 그림자가 보이질 않아. 그렇다고 어느 지파에 어울리느냐 묻는다면, 그 어느 쪽도 떠오르질 않네. 동떨어진 세상에서 사는 것 같아. 마치…….”

“…….”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괜한 말로 그대의 마음을 흔든 모양이군. 그저 웃어넘기게.”

“……예.”

웃어넘기라고 했지만, 쉽게 넘길 만한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연호정에게는 그러했다.

재차 한 모금 차로 입술을 축인 황제가 말을 이었다.

“백도 정파의 명문가 자식으로 태어나 파격적인 행보로 무림을 뒤집어 놓은 천재는 무엇을 보고 자랐기에 이와 같은 삶을 사는가. 그것이 못내 궁금했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겸손인가?”

“본디 세상은 평범한 사람의 손으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허허허.”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화를 양천과 혼인시키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양천의 연배가 짐과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뛰어난 자입니다. 외양은 소인의 부친과 비슷해 보이지요. 이룬 경지가 지극히 뛰어나니, 평탄히 산다면 백 세를 넘어서도 정정할 겁니다.”

“일신의 능력만 뛰어나다면 나이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인가.”

연호정은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 띤 얼굴은, 황제의 다음 발언으로 인해 얼음처럼 굳어졌다.

“양천을 쫓아낼 생각인가?”

“……!”

“그게 아니라면 양천에게 황궁이라는 족쇄를 채워 더는 날뛰지 못하게 만들 생각인 듯한데.”

“……대단하십니다.”

연호정은 순순히 인정했다.

“폐하의 통찰력은 실로 천하에 이르러 계십니다.”

“공상하기를 좋아할 뿐이라네.”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 그대의 의도가 양천의 손발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라면, 하나의 전제를 무시해서는 안 될 터인데.”

“맞습니다.”

양천을 황제의 부마로 만든다.

얼핏 보면 흑도에게 좋은 일을 시켜 주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연호정의 날카로운 노림수가 숨 쉬고 있다.

양천에게는 야망이 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철저히 무림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는 흑도가 백도를 짓누르고 더 우위에 서길 바란다. 더 나아가, 흑도가 백도를 통합하여 사상 최초의 전무림연합(全武林聯合)을 이루고 그 총수가 되고자 한다.

실제로 그것이 가능한지를 떠나, 그가 바라는 곳에는 무림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그런 양천이 황제의 부마가 된다면?

제국에 힘이 없다면 모를까, 황제가 눈을 뜨고 황궁에 암약하던 삼교 무리가 백도의 힘으로 씻겨 나간 상황에서 황실과의 혼인은 양천에게 무시무시한 족쇄가 될 수밖에 없다.

공식적으로 천하 권력의 정점에는 황제가 있다. 그 위에는 누구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더하여 황궁은 차기 황제의 권력을 위해 자식들도 내칠 만큼 냉정한 곳이다. 권력이 몰린 집단이면 그러한 법도는 대동소이하다지만, 문제는 황궁이 지닌 정당성이다.

황실에 위협이 될 정도의 힘이 외부에서 자라나는 것을 묵인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양천이 무림왕(武林王)이 되기 위해서는 황실과 혼인하지 않거나, 혼인 후 황제에게 공식적인 허가를 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시에는?

그때는 또 한 번의 전쟁이 터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흑도에게 패배한 백도 무림인들은 철저히 황궁의 편에 서서 흑도 무림을 공격할 것이다.

물론 황제가 양천과 손을 잡고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한 작업을 해 나간다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즉, 연호정이 양천에게 진정 족쇄를 채우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그대는 짐에게 무엇을 줄 수 있나?”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바로 여기다.

이 순간, 이 얘기를 하기 위해 며칠을 고민했다. 아버지와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황궁의 정보도 최대한 끌어모아 분석했다.

그리고 마침내, 연호정은 결심했다.

“그대의 생각은 흥미로우나, 짐은 여전히 그대를 원한다. 한데 그대는 그대를 대신할 사람으로 흑도 무림의 총수를 언급했어. 나쁘지 않지만, 여전히 그대를 손에 넣는 것보다 나은 선택은 아니다. 짐에게는 그렇다.”

“예, 그리 생각하실 거라 짐작했습니다.”

“짐이 그대에게 원하는 것, 그대일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을 짐에게 주지 못하면, 짐은 결코 청화를 양천에게 보내지 않을 것이야.”

“그래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어떤 판단을 내렸지?”

연호정의 얼굴에 결심의 빛이 어렸다.

“최근 광혼귀군 곡경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 짐에게 보고하더군.”

“그렇다면, 귀군이 소인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전부 보고하였을 것입니다.”

“그랬지.”

“폐하께서 소인을 원하시는 이유는, 세상을 하나로 만들고자 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둘 이외에 아무도 없는 어전.

그렇다 하더라도 이리 솔직하게 말할 만큼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황제의 눈이 빛났다.

“세상을 하나로 만든다…… 틀린 말은 아닐세. 다만, ‘어떤’ 하나가 되느냐가 문제일 뿐이야.”

“예.”

“곡경은 뛰어난 인재지만, 짐이 원하는 것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해. 짐의 꿈은 알지만, 그 꿈의 세부 사항은 모를 수밖에 없지.”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대는 짐작하는가? 짐이 세상을 어찌 하나로 만들고자 하는지, 어떤 세상을 보고 있는지를.”

“폐하께서 보시는 세상을, 소인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소인이 품은 일생의 목표는 삼교를 멸하고 천하를 외세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히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상의 천명(天命)은 소인에게 없었습니다. 소인이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그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 볼까 합니다.”

황제의 눈이 휘어졌다.

“목표는 변함이 없지만, 그 목표를 이루는 이유를 조정해 보겠다?”

“그렇습니다.”

회귀 전, 회귀 후를 통틀어도 비할 데 없을 만큼 묵직한 목소리로, 연호정은 말했다.

“질서가 바로잡힌 세상, 완전하지는 못해도 위태롭지는 않은 세상, 천하 백성들이 지금보다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

“…….”

“그 미래를 위해, 새 시대의 선봉으로 나서 보겠습니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황제의 손을 잡았다.

황제가 말했다.

“많이 힘들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대와 그대 가문 전체가 백도 무림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어.”

“위험할 때는 폐하께서 소인의 가문을 지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허허허.”

연호정의 두 손을 잡은 황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양천과의 혼사, 정식으로 진행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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