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0화. 흑도의 패권 (1)
“각자 준비하고 아버지 방 앞에서 모이도록 하자.”
“그럽시다.”
“그리고 강량은 나 좀 보자.”
일행을 보낸 연호정이 강량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다.”
강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입니까?”
“묵룡부주 혼인 건 말이다.”
“……잉?”
“너에게 있어 양 부주는 철천지원수가 아니냐. 만약 양 부주가 청화공주와 혼인하게 되면, 네 복수가 훨씬 어려워질 거다.”
“아?”
강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 생각은 못 했네?”
연호정은 순간적으로 비틀거릴 뻔했다.
강량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어차피 복수도 실력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무극에 도달해도 양천과 비벼 볼 만한 실력이 되지 못하면 언감생심 건드릴 수도 없어요.”
“그렇긴 하다만.”
“그리고, 형님이 뭔가 오해하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응?”
“현시점에 있어 양천은 중원 판도에 지극한 영향을 끼치는 거물입니다. 설령 실력이 된다 해도, 지금 당장 양천을 죽이는 것은 모두가 파멸하는 길 아닙니까?”
“…….”
“사적인 복수심 때문에 천하의 안위가 뒤흔들리게 할 정도로 바보가 아닙니다, 나는.”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하지만 네 가족의 원수가 아니냐?”
“그 생각은 언제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
“양천 인생의 마지막은 제 담당입니다. 그것은 십 년 뒤가 될 수도, 이십 년 뒤가 될 수도 있지요. 나는 그것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강량이 미소를 지었다. 어떠한 사심도 없는 웃음이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정 뭣하면 나중에 아무도 모르게 슥삭 해 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컥.”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그때 제가 도움을 바라면 꼭 도와주셔야 합니다.”
연호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반드시 그리하겠다.”
강량이 연호정의 가슴을 툭 때렸다.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입니까? 장난입니다, 장난. 복수는 내 손으로 해야 제맛이지요. 어떤 상황이든 형님한테 도움 바랄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니,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는데 그만한 도움은 줘야지.”
“상황은 처음부터 어려웠습니다. 누구 때문에 더 어려워졌다, 누구 때문에 시기를 잡지 못했다…… 이런 건 다 핑계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강량이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복수는 내 개인의 일입니다. 형님은 형님의 뜻대로 거침없이 밀고 나가십시오. 천하가 안정되면, 그때부터는 저의 시간입니다. 그것만 아시면 돼요.”
“…….”
“물론 실력부터 쌓아야겠지만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마음을 알겠다.”
“하여간 난 또 무슨 일이라고. 괜히 쫄았네.”
투덜대던 강량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겁니까?”
“뭘?”
“양천 그 양반, 형님을 상당히 아끼긴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 웃으면서 받아 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도 웃으면서 대하진 않았다.”
“경우가 다르지요. 그때야 그 양반 몸도 안 좋았고, 흑도의 분위기 자체가 당한 놈이 바보라는 인식이 깔려 있으니 어느 정도 참작이 가능한 거였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르잖습니까?”
“당한 놈이 바보라는 인식은 그대로야.”
“하지만 형님에 대한 양천의 믿음은 예전보다 확고해졌습니다. 그 배신감이 상당할 텐데요.”
“배신감?”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 양반은 날 믿지 않아. 그저 아쉬워할 뿐이지.”
준비를 마친 연호정은 연위와 꽤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직후, 황제를 알현하여 또 한 시진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와 황제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또 밤이 깊어졌다.
연위와 팽무강, 제갈아연은 황궁 외성까지 배웅을 나왔다.
“언제나 몸조심하도록 해라.”
“예.”
팽무강이 연호정에게 금낭을 건넸다.
“급한 일도 속이 든든해야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법일세. 너무 급하게 가지 말고, 가면서 맛난 거 사 드시게.”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육가 가주님께 용돈도 받고, 제가 정말 거물이 되긴 했나 봅니다.”
“예끼, 이 사람아. 당장의 명성만 보면 우리 가문 다 합쳐도 자네와 비교가 될까 싶은데 무슨 헛소리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성천에 이름을 올린 이상, 연호정의 무명(武名)은 가히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도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그것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든, 그 명성 자체가 연호정에게는 크나큰 힘이었다.
제갈아연이 물었다.
“언제 돌아올 거야?”
“글쎄?”
“적당히 일 마무리되면 빨리 돌아오는 게 좋을 거야.”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맹주 선거 때문에?”
제갈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해도 얼마 남지 않았어. 해가 지나면 수뇌부 쪽에서도 슬슬 맹주 선거에 관한 얘기가 나올 거야.”
“……그렇겠지.”
“네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엄청나게 클 거야. 꼭 와야 해.”
“나 보고 싶어서 하는 말 아니지?”
빠각!
“윽!”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정강이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생각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제갈아연의 침을 탁! 뱉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몸 성히 돌아오기나 하셔.”
“폭력은 쓰지 마라. 아프다.”
“웃기고 있네.”
그때, 기우희가 말했다.
“저는 여기에 있을게요.”
모두가 기우희를 바라보았다.
기우희는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나름대로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마지막까지 생각을 해 봤는데…… 역시 환자들을 두고 갈 수는 없어요.”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막원 선배는?”
“괜찮으실 거예요. 그래도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기우희가 품에서 검은색 천으로 잘 싸인 무언가를 꺼내 연호정에게 건넸다.
“환약이에요. 이곳 환자분들에 대한 조치는 닷새 안에 끝날 거고, 이후 저도 가주님들과 함께 맹으로 돌아가도록 할게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분께서 위급해지시면 곧장 무림맹으로 연락을 주세요.”
가만히 기우희를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뜻이 그러하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다.”
기우희가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괜히 고집을 부려서.”
“아직 다른 의원들이 오지 않았잖아? 네가 그들의 치료를 맡았으니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야지. 당연한 일이야.”
연호정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기 의원은 다시 무림맹으로 돌아갈 테니, 자네들은 이만 부주께 돌아가도 괜찮아.”
기우희도 입을 열었다.
“그간 감사했어요.”
하지만 묵룡대는 요지부동이었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기어이 무림맹까지 호위할 모양이다.”
“……네.”
기다렸다는 듯 가득상이 말했다.
“사부님은 잠시 옆 동네에 가셨수다. 따로 연락은 해 둘 테니까 너무 섭섭해하지 마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봅시다.”
“거 개방 후개보다 바쁜 사람 처음 봤소. 적당히 쏘다니시오. 맹으로 오면 찐하게 한잔합시다.”
“나야 좋지.”
대충 정리가 되는 분위기였다.
연위가 말했다.
“몸 성히 다시 보도록 하자.”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그래.”
“그럼.”
마지막 인사를 마친 연호정 일행이 궁문을 나섰다.
돌아올 때와는 달리 상당히 가벼운 차림들이었다. 묵룡부로 귀환하는 길이니 굳이 변장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쉬익!
등 뒤에서 날아오는 무언가를 느낀 연호정이 그대로 손을 뻗었다.
턱!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연호정의 손에 잡힌 것은 꽤 커다란 술 단지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황궁 외벽 앞, 벌컥벌컥 술을 마시는 곡경이 있었다. 작은 단지를 통째로 들고 마시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호쾌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대화를 나누기엔 적합하지 않다. 곡경 역시 연호정을 보다가, 이내 몸을 휙 돌려 궁문으로 걸어갔다.
가만히 곡경의 뒷모습을 보던 연호정이 단지를 열었다.
순간 묵직한 주향이 흘러나왔다. 전에 함께 마셨던 서역의 술이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부끄러워하기는.”
단지는 시원했다. 나름대로 온도 조절을 해 놓은 모양이었다.
한 모금으로 속에 불을 붙인 연호정이 묵비에게 단지를 건넸다.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들 해. 귀한 술이다.”
묵비는 한 모금을 마신 후 눈살을 찌푸렸지만, 강량과 진양은 호들갑을 떨었다. 독하고 묵직한 술맛이 몹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자, 슬슬 달려 볼…… 야, 이 새끼들아! 다 마시지 마!”
* * *
파아아앙!
“후우.”
숨을 몰아쉰 양천이 자세를 풀었다.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그의 몸은 가히 예술이었다. 키와 덩치는 그리 크지 않지만, 완벽하게 짜인 근육은 세월을 무색게 하는 강인함으로 가득했다.
‘묘하군.’
며칠 전부터 몸이 근질근질한 것이, 술로도 잘 풀리지가 않았다. 하여 어제부터 오랜만에 온몸이 푹 젖을 정도로 수련을 했더니, 그 근질거림이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수련을 멈추니 또 근질거림이 시작되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은데.’
수백 마리의 거미가 등허리를 타고 올라와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듯한 묘한 기분.
그것은 불쾌함이었고, 불안함이었다.
화아아악!
순간적으로 방출된 내공이 몸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사방으로 날려 버렸다.
양천이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오래 있을 곳은 아니야.”
묵룡부는 여전히 넓었다. 이제는 공사도 끝나서, 그야말로 거대한 지하 세계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햇빛을 자주 안 봐서 그런지, 한 번씩 답답함이 느껴진다. 공기는 잘 통하지만, 숨만 쉰다고 잘 사는 건 아니지 않나.
“어차피 옮길 생각도 했으니.”
이 거대한 지하 동혈은 차후 세워질 묵룡부의 뇌옥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실제로 공사 역시 그에 맞춰 진행되었다. 부주인 자신과 수뇌부들이 사는 곳은 뇌옥장들과 간수들이 지내는 방이 될 것이다.
한참 주변을 둘러본 양천이 거처로 돌아왔다.
깔끔하게 수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그가 대전으로 향했다.
“부주님.”
“왔나.”
백서가 고개를 조아렸다.
“업무 보고는 나중에 드릴까요?”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백서는 좋은 수하였다. 주군의 분위기, 표정, 목소리만으로도 그날의 기분을 유추할 줄 아는 수하는 정말 많지 않다.
“괜찮네. 한잔하면서 보고를 듣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날의 보고도 이전처럼 평이하였다.
흑도 무림은 꽤 잠잠했다. 흑도에서 내로라하는 세력들도 맹부 동맹이 체결된 이후 몸을 사리고 있었다.
“예산이 남아돌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어떻게 처리를…….”
“정보단에게 투자하지.”
양천의 의지는 확고했다.
“정보는 곧 힘이야. 제대로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우리의 정보력은 정파를 앞서고 있다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해.”
“…….”
“정보력으로 완전히 압도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보다 적은 힘으로 커다란 산을 무너트릴 수 있게 될 게야.”
“하면 이 문서에 적힌 예산 중 어느 정도를 투자하실 생각이신지요?”
“전부.”
“……!”
“시국이 불안정한 때일수록 과감한 투자가 필요한 법이지. 어차피 본부의 운용 자금은 충분하니 생활에 어려움은 없을 걸세.”
“알겠습니다. 하면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러게나. 아! 그리고…….”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궁 쪽에서는 연락이 온 게 없나?”
“아직 없습니다.”
“그렇구먼.”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양천이 나른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무림맹주 선거 건으로 슬슬 급할 텐데. 언제쯤 오려나, 그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