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2화. 흑도의 패권 (3)
“눈인가.”
간만에 바깥 언덕에 올라 하늘을 보는 양천의 모습은 묘한 운치가 있었다.
합! 합!
절벽 아래, 추운 날씨에도 웃통을 벗은 무사 수백 명이 창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들 대다수의 손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다. 그렇게나 오랫동안 연마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손이 찢어져 피가 난다. 그만큼 그들의 훈련 강도는 대단했다.
두두두두두.
저 멀리서는 또 수백의 기마가 진법을 펼치며 훈련 중이었다.
넓은 평야는 물론 산길에서까지 오와 열을 맞추며 훈련한다. 기마도 뛰어났지만, 그 기마와 하나가 되어 적재적소로 움직이는 무사들의 능력은 중원 천하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철기단의 훈련은 보는 맛이 있구만.”
황석태가 고개를 숙였다.
“부주님의 말씀, 제게는 언제나 힘이 됩니다.”
“허허.”
황석태를 돌아보는 양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철기단도 철기단이지만, 기실 가장 놀라운 것은 자네로군.”
“예?”
“언제 그렇게 무공이 깊어졌나? 얼마 전에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데.”
실제로 황석태의 기도는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엄격하고 냉엄하기 그지없는 기도로 보는 이를 위축되게 하는 위압감이 사라져 버렸다.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이 돋보이는 굴강한 외모는 그대로였지만, 기도의 변화 때문에 훨씬 더 유연해 보인다. 어쩐지 몸도 조금은 더 마른 듯했다.
하지만 양천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황석태가 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해졌다는 증거라는 걸.
언제 전투가 벌어져도 즉각 반응할 수 있도록 항상 적당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던 황석태의 기도가 지금은 물처럼 부드러웠다.
그것은 단순히 긴장을 놓은 게 아니었다. 이제는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어떤 영역이라도 극에 이르면 남다르게 보이지만, 극을 넘어서면 오히려 평범하게 보이는 이치는 무공에도 적용된다.
몸과 의지가 언제, 어떤 순간에라도 반응할 수 있도록 연마된 진짜 고수의 기도.
황석태는 바로 그러한 경지에 오른 것이다. 무극 이전에 그 자신만의 무도(武道)를 개척한 것이 틀림없었다.
황석태가 담담하게 말했다.
“시대의 강자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양천이 피식 웃었다.
“연호정 말인가?”
“그도 그렇고, 그와 함께하는 이들도 그렇습니다. 다들 연배가 어린데도 놀라운 성취를 쌓지 않았습니까.”
“어린데도 강하다…… 그래, 맞는 말이야.”
사람마다 성장의 때는 다른 법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더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다. 어릴 때, 젊을 때 열심히 수행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양천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리는 눈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씨알이 상당히 굵었다. 내일쯤이면 폭설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그토록 강해진 이유를 아는가?”
“재능도 재능이지만,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맞아. 재능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하지만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해. 치열하기로는 자네도, 철기단원들도 다 마찬가지 아니겠나?”
“그렇긴 합니다만.”
“누구나 다 치열하게, 열심히들 산다네. 재능의 차이도 분명하겠지만, 그 녀석들이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재능과 노력 이상의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야.”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전의 황석태였다면 쉽게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묻는 것 자체가 실례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어진 무공만큼이나 황석태에게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양천은 부하의 여유로움을 수용해 줄 수 있는 멋진 상관이었다.
“연호정이라네.”
“……예?”
너무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황석태에게는 그랬다.
양천이 웃으며 말했다.
“이상한 답변인가?”
“조금…… 이해하기 힘든 답변이긴 합니다.”
“허허, 그럴 수 있지.”
양천이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면 녀석과 함께 다니는 이들은 평범한 무림인들과는 달랐어. 정확히 말하면, 달라졌지.”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자신을 보는 눈.”
“……!”
“연호정도 마찬가지야. 그놈은 스스로 남들만 한 재능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만한 헛소리도 없지. 무공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근골이 뛰어나고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남다른 것만이 전부가 아니거든.”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어떤 영역이든, 어느 정도의 성장을 위해서는 그 일에 대한 이해도가 필요해. 하지만 어느 정도의 성장을 끝낸 연후에는 스스로를 올바르게 돌아볼 줄 아는 눈과 지금 자신에게 어떤 것이 필요한지를 아는 본능적인 감각이 필요한 법이야.”
“아!”
“연호정 그놈은 그걸 알아. 그를 따라다니는 놈들도 마찬가지지. 연호정은, 제 사람들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순간순간 잡아낼 줄 아는 눈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안목을 지닌 녀석과 함께하다 보면 어떻게 되겠나?”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겠군요.”
“스스로를 돌아보고, 이윽고 찾아내는 것이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그 필요한 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어떤 것을 익혀야 하는지를.”
결국에는 노력의 방향이다.
노력은 누구나 다 한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 정점에 오르는 이는 한 줌밖에 되지 않는다.
다 비슷한 재능과 노력을 하고 있다면, 결국 갈라지는 것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눈과 어느 정도까지 연마해야 하는지를 아는 감각이다.
“성천에 이른 이들 모두가 그러한 감각이 있는 이들이야. 치열한 삶? 생사의 경험? 성천 중에는 생사결을 많이 겪어 보지 못한 이들도 꽤 있다네. 그럼에도 그들은 무극을 열고, 나아가 무림 최강자의 반열에 올랐어.”
“……무섭군요.”
“무섭지. 무인의 성장은 신공의 성장과 같다네. 무림에 흔한 삼재검법(三才劍法)을 대성했다고 하여 일류가 됐다고 말하는 이들은 없어. 그러나 대성한 삼재검법을 자신에 맞게 개량하여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간 이들은 일류가 된다네.”
양천이 눈을 떴다.
“무공을 대성하는 것은 또 다른 시작점에 도달한 것과 같아. 무공을 대성하기까지는 근골과 이해도 같은 ‘재능’의 영역이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목과 감이 필요한 것이야.”
“…….”
“어쩌면 그 안목과 감까지도 재능의 한 부류일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 나이까지 살다 보니, 확실히 그런 건 재능과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되네.”
“…….”
“그런 면에 있어서, 연호정 그놈의 말이 맞지. 녀석에게는 뛰어난 무재가 없어. 다만 무재 이상의 무언가를 갖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그것은 부주님께서도 갖고 계신 것이지요.”
“나만?”
“예?”
양천이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예?”
“연호정과 함께 다니며, 그와 그 일행들이 세상을 어떻게 사는지를 배우지 않았나?”
황석태의 표정이 조금 어색해졌다.
“저와는 다르더군요.”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였기에 자네는 성장할 수 있었던 게야. 그 또한 노력이지. 그들의 다름을 틀렸다고 해석하거나 다름으로 놔두기만 했다면, 자네가 성장할 수 있었겠나?”
“……!”
“자네는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다네. 그 경지에 도달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한 치의 성장을 이뤄 내지 못했어. 하지만 연호정과 함께 새로운 경험을 쌓고 돌아온 자네는, 지금 이렇게나 변모했네.”
황석태는 왠지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양천의 말이 마치 그 자신보다 연호정이 더 뛰어난 이가 아니냐고 묻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결국 황석태는 이렇게 말했다.
“부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가 아니었다면, 제가 어찌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
본디 황석태는 말솜씨가 좋지 못했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오해하지 말게. 자네가 어떻게 강해졌든, 자네를 향한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아. 그리고 나를 향한 자네의 충성심 역시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네.”
“감사하고도 감사한 말씀입니다.”
양천이 다시 철기단을 돌아보았다.
우렁찬 기합과 함께 창을 휘두르는 철기단원들의 모습은, 다시 봐도 장관이었다.
“자네들이 큰 힘이 되어 줘야 하네.”
“물론입니다.”
“다음 세대에 말이야.”
“……?”
“나에게는 야망이 있다네. 그 야망은, 어쩌면 전후의 무림에 또 다른 비극이 될지도 모를 만큼 강렬한 것이지.”
“…….”
“세상에 꿈을 꾸는 자는 많지만, 모두가 꿈을 달성하지는 못해. 어쩌면 나 역시 그럴지도 몰라.”
황석태의 얼굴이 굳어졌다.
“부주님께서는 반드시 꿈을 이루실 겁니다.”
“허허, 그랬으면 좋겠네. 다만 이 묵룡부라는 집단은 아직까지 내 힘으로 유지되고 있다네. 하나로 집결한 흑도인들은 투왕 양천을 볼 뿐, 묵룡부주를 보지는 않아.”
묵룡부의 한계였다. 역사가 짧은 거대한 집단은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바란다네. 내 후계자가 지금의 묵룡부를 더 높은 위치로 끌어올려 주기를. 물론 이 자리를 넘기기 전에 나름의 준비는 해 두겠지만, 어디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된다던가.”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황석태의 눈이 빛났다.
“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묵룡부의 수장을 위해 분골쇄신할 것입니다.”
“아네. 자네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더 고맙네.”
담담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던 양천이 일순 크게 기지개를 켰다.
“답답해서 나와 봤는데 참 괜찮군. 기분도 풀리고 말이야. 자네는 내 말 상대를 해 주느라 힘들었겠어.”
“아, 아닙니다!”
당황한 황석태의 얼굴을 본 양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애들 훈련 적당히 시키게. 훈련만큼이나 질 좋은 휴식도 필요하지 않겠나.”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몸을 돌려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두 사람.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부주님!”
저 멀리서 백서가 달려왔다.
양천의 눈이 빛났다.
“무슨 일인가?”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백서가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연호정 부관과 그 일행이 한나절 뒤에 도착할 거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오, 그래?”
양천이 씨익 웃었다.
“드디어 그 낯짝을 보는군. 빨리 좀 오지.”
* * *
호남에 접어든 일행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팽무강이 준 돈은 진즉에 다 써 버렸다. 호남까지 오며 진양과 수련을 했는데, 그것을 본 묵비와 강량도 손이 근질거렸는지 수련에 동참했던 것이다.
기나긴 행군, 그리고 수련. 평소보다 더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위장은 팽무강이 준 돈을 닷새 만에 증발시킬 정도로 컸다.
묵비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좀 씻고 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래야지. 찝찝하기도 하고. 그래도 연락은 해 뒀으니, 씻고 적당히 쉬다가 가자고.”
“그래요.”
두 사람 뒤로 강량과 진양이 쩔뚝거리며 다가왔다.
“허억! 허억! 빌어먹을, 어디서 쉴 거요?”
“저기 보이는 주루에서 쉴 거다. 근데 아직도 다리가 그 모양이냐?”
“당신이 엊그제 부러트렸잖소!”
“그 다리로 용케 잘 따라붙었다.”
진양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강량이 손사래를 쳤다.
“신경 꺼, 진 형. 형님은 원래 저래.”
“이, 이……!”
연호정이 손뼉을 쳤다.
“자, 지옥의 아가리로 들어가기 전에 배부터 채우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