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8화. 흑제(黑帝) (3)
“…….”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정의 얼굴은 상당히 부스스했다.
‘여긴?’
묵룡부에서 마련해 준 자신의 거처였다.
통기는 잘되지만 아무리 넓어도 답답한 건 똑같았다. 애초에 빛이 들어오지 않는 동굴에 야명주를 박아 만들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인상을 찡그린 연호정이 머리를 매만졌다.
‘쓰러졌나?’
중간중간 기억이 났다. 막원이 자신을 들쳐 메고 묵룡부로 들어온 기억이 있었다.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괜한 고생을 시켜 드렸군.’
자신을 깨우고 부축까지 해서 객잔을 나온 것 역시 떠올랐다.
평소라면 그 즉시 내공으로 주기를 발산해 버렸겠지만, 지난밤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막원에게 폐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스스로를 놔 버렸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오랜 시간 긴장하며 산 육체는 끝까지 그의 의식을 일깨우려 노력한 모양이었다.
의식은 스스로를 놓았는데, 무의식이 그를 수면 위로 끄집어내려 했다. 이번 싸움은 의식의 승리였다.
“제기랄, 쪽팔리게.”
서둘러 방을 나선 연호정은 받아 놓은 물에 세수를 했다.
찬물로 세수를 하니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묵룡부에는 지하 수로가 있어서 언제나 깨끗하고 차가운 물을 얻을 수 있었다.
물까지 한 사발 들이켠 연호정은 곧장 의관을 똑바로 했다. 그러고는 곧장 막원의 거처로 향했다.
“어? 깼나?”
막원은 아침부터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제는 철봉을 쥐고 휘두르더니, 지금은 묵직한 청룡도(靑龍刀)를 휘두르고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에는 죄송했습니다.”
막원이 피식 웃었다.
“죄송하다고 하는 거 보니 중간중간 기억은 나는 모양이군.”
“…….”
“사람이 그럴 때도 있는 법이지. 그 정도면 차라리 나아.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고는 다음 날 기억도 못 하고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주정꾼들도 많아.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정말 머리통을 쥐어박아 주고 싶을 정도지.”
“면목이 없습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울적한 동생 기분 풀어 주는 것도 형의 의무 중 하나 아니겠는가.”
아, 그랬지.
연호정은 그제야 막원과 호형호제하기로 했던 걸 기억해 냈다.
술이 좀 들어갔다지만, 참으로 엄청난 인연을 맺어 버렸다. 정확히는 원래 맺었던 인연을 완전히 묶어 버린 것에 가까웠지만.
“마침 아침 수련이 끝났는데,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지. 너도 해장이 필요할 텐데.”
“아, 그럴까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예?”
“슬금슬금 눈치 보는 그 표정 말이야. 계속 그렇게 보면 내가 부담스럽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조금 뻔뻔하게 나가 보겠습니다.”
“너한테는 그게 어울리지. 얼마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막원과 연호정이 거처를 나와 묵룡부 내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는 수많은 무사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기도를 품고 있었는데, 단순히 익힌 무공 때문이 아니라 누구 할 것 없이 실전에 능한 듯했다.
“엇, 형님!”
저 멀리서 묵비와 강량, 진양이 손을 흔들었다.
연호정이 손을 흔들다가 막원을 바라보았다.
“함께 드실까요?”
“좋지.”
연호정이 막원과 함께 오자 세 사람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묵비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무림말학, 진양이라 합니다.”
순간 강량이 푸확!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무림말학이라니, 무슨 소개가 그렇수?”
진양이 아무도 모르게 강량의 발을 밟았다. 강량이 죽는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진양이 떠듬떠듬 말했다.
“만병(萬兵)에 달통하신 백병신군 선배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에…….”
“……?”
“존경합니다!”
뭐야, 이 머저리는?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만들 앉아. 불편해하신다.”
“헉! 그러십니까?”
의자에 냉큼 앉은 진양의 얼굴은 무척이나 경직되어 있었다. 진심으로 막원을 존경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며칠이나마 같이 묵룡부에 있었지만, 그때는 서로가 만난 적이 없었다. 막원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막원일세. 그나저나 자네 대단하군. 나이도 많지 않아 보이는데 벌써 그만한 경지라니, 참으로 대단들 하네.”
“허억! 가, 감사합니다!”
진양이 다시 벌떡 일어났다.
“두 분 식사는 제가 떠 오도록 하겠습니다!”
“어? 아, 아니 괜찮…….”
진양은 말릴 새도 없이 음식을 가지러 갔다.
막원이 연호정을 보며 은근슬쩍 물었다.
“저 친구 원래 저런가?”
“원래 그런 모양입니다.”
“덩치는 산만 한데, 어째 행동하는 게 귀엽구만.”
“……형님한테는 귀여울지 몰라도 저한테는 좀 모자라 보이는데요.”
“모자란 사람은 저만한 경지에 도달하지도 못해.”
“그래서 이상한 겁니다.”
묵비의 눈이 커졌다.
“형님……?”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되었다.”
어느새 의자에 앉은 강량이 피식 웃었다.
“우리 형님 아주 전 무림을 돌아다니면서 오만 형제를 다 만들고 계시네. 나중에 연가주님이 아시면 개족보 만들었다고 매타작하시는 거 아닙니까?”
“시끄러워, 인마.”
“호호.”
“이상하게 웃지 말고. 그나저나 패율 선배랑 소정광은?”
“빨리도 물어보시네.”
강량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선배님은 폐관 중이시고, 소 형은 철기단주 아래에서 죽도록 구르고 있답니다.”
“……폐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막원이 말했다.
“패율하고도 몇 번 검을 섞어 보았지.”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러셨습니까?”
“놀랍도록 완성된 검법을 구현하고 있더군. 처음 봤을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어.”
“허어.”
“더 이상 건드릴 것은 없어 보여서 남은 건 깊어지는 것뿐이라고 말했더니, 얼마 뒤부터 폐관에 들어갔더구만.”
“부주가 용케 폐관 자리를 내줬군요.”
“네 사람이니까 그쪽도 귀빈 아니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정파의 명문인 점창파의 장로에게 폐관실까지 내준 걸 보면, 확실히 양천의 그릇은 보통이 아니었다.
“다들 강해지기 위해서 그렇게들 몸부림치고 있는 거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요.”
막원이 연호정에게 물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따 한가할 때 한판 붙어 보는 건 어떠냐? 네 녀석의 무공을 좀 보고 싶구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좋지요. 다만 입관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막원의 눈이 커졌다.
“입관자? 우리 비무를 누군가에게 보여 줬으면 한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형 몸뚱이에 신나게 칼질해 보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왜?”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저 이유가 궁금한 듯 보였다.
연호정이 입을 열려던 때였다.
‘…….’
한 줄기 익숙한 기운을 느낀 연호정이 몸을 돌려 식당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부선이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스륵.
살짝 고개를 숙인 부선이 손으로 식당 입구를 가리켰다.
가만히 부선을 보던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봐야겠습니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기다리지 마십시오.”
막원이 혀를 찼다.
“부주냐?”
“그렇겠지요.”
“아침밥은 먹이고 부르지. 알았다. 다녀와라.”
“예.”
연호정이 묵비에게 말했다.
“푹 쉬고 있어. 혹시 애들 사고 치지 않게 잘 관리해 주고.”
“걱정하지 말아요.”
강량이 투덜거렸다.
“애들이 아니라 애죠. 저는 사고 칠 일이 없거든요.”
“이따 진양 오면 같이 수련이라도 해. 기도가 조금 녹슨 것 같다.”
“……정말입니까?”
“정말이시지, 이놈 자식아.”
연호정이 손을 흔들었다.
“간다.”
부선과 함께 식당을 나와 걷는 연호정의 얼굴은 유독 무심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간 한마디도 안 하던 부선이 입을 열었다.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될 줄은 몰랐네요.”
“뭐가?”
“후계자요.”
순간 연호정의 눈에 작은 놀라움이 피어올랐다.
“부주께서 그걸 당신에게 말한 건가?”
“네.”
대답하는 부선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가만히 부선을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뢰받고 있군.”
“아직 많이 부족하죠.”
“기분이 나빴겠어.”
“좋다고는 할 수 없죠.”
“그렇겠지.”
연호정은 미안하다, 어쩔 수 없었다 등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사이도 아니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걸었다.
대전으로 향하는 줄 알았던 연호정은 길이 틀어지는 것에 조금 놀랐다.
“대전이 아닌가?”
“자주 가시는 언덕이 있어요. 그곳에 계십니다.”
“그렇군.”
차라리 잘됐다. 공기는 잘 통하지만, 그래도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얘기하는 것보다는 밖이 훨씬 좋을 것이다.
부선의 뒤를 따르며, 연호정은 생각했다.
‘어떻게 나올까.’
그때의 대화에서 양천은 큰 충격을 받았는지 대답을 보류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솔직히 연호정은 정말로 생사결이 터질 가능성이 작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겠지.’
양천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후우우우웅.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어제보다 훨씬 추웠다. 저 멀리 북쪽 지역의 날씨에 비견될 정도의 추위였다.
사방에는 눈이 가득했다. 지금도 한 송이, 두 송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벽 내내 펑펑 쏟아진 모양이었다.
‘운치 좋군.’
겨울은 보검과 닮았다.
누구에게나 가혹하고 위험한 계절이지만, 세상이 하얗게 물든 이 광경만큼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아름답고 치명적이다. 그래서 겨울은 보검과 같았다.
그리고 그 눈이 가득 쌓인 절벽 위에, 양천이 서 있었다. 바위를 날려 버리고 분노 가득한 기파를 발산했던 그 장소와는 반대쪽이었다.
걸음을 멈춘 부선이 연호정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주 살짝, 예를 표할 정도의 인사였다.
“그럼 이만.”
“고마웠어.”
말없이 고개를 든 부선이 다시 묵룡부로 향했다.
부선의 등을 보며, 연호정은 생각했다. 과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말없이 한참을 그러고 서 있던 연호정이 힘차게 발을 굴렀다.
훅!
무시무시한 경공술로 단숨에 절벽을 타고 오른 연호정이 양천의 뒤에 섰다.
양천은 가벼운 경장 차림으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일전보다 훨씬 단단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과격해졌던 그때의 말투와 다르다. 평소처럼, 부주와 부관의 관계로 돌아간 것이다.
양천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뒷모습은 눈 쌓인 겨울 경관과 아주 잘 어울렸다.
“연 부관.”
연호정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예.”
“……풍경 말이야.”
“예?”
양천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한 송이 눈이 그의 손에 닿아 스르르 녹아 없어졌다.
“아름답지 않나.”
“예, 아름답습니다.”
양천은 또 잠시간 말이 없었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연호정이 천천히 걸어가 양천 옆에 섰다.
그러자 양천의 입이 열렸다.
“사라지는군.”
“……?”
“내 손에 닿은 이 눈송이가, 내 체온 때문에 녹아 사라져 버렸어.”
무슨 심경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것만큼은 연호정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사람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을 손에 넣고 싶어 하지. 그러나 막상 내 손에 들어오면, 그것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그 가치를 잃어버려. 때로는 이 눈송이처럼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있지.”
양천이 눈을 감았다.
“연 부관.”
“말씀하십시오.”
“그래도.”
“…….”
“손에 닿자마자 녹아 없어지는 이 눈송이와 같다고 해도.”
양천의 눈이 뜨였다. 어딘지 모르게 힘들어 보이는 그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도 나는 세상을 가져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