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5화. 천명 (5)
“……!!”
연호정의 얼굴에 순수한 놀라움이 깃들었다.
“어떠냐? 넓지?”
“그렇군요.”
대전에서 나온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꽤 넓은 공터였다.
양천의 처소 뒤편에 은밀한 비밀 통로가 있었다. 그 통로를 이각이 넘게 걸어가자 지상으로 이어지는 문이 나왔다.
그렇게 묵룡부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선 자리는, 어지간한 명문가의 연무장 서너 개를 합친 크기의 공터였다.
‘여긴?’
연호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꽤 큰 나무들이 사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 너머를 보기가 힘들었다.
“묵룡부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입니까?”
“걸어 봐서 알잖느냐?”
“한데 왜 묵룡부 주변을 정찰하는 무인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다.
두 사람은 양천의 처소에서부터 일각이 넘게 걸었다. 말이 일각이지, 절대고수인 두 사람의 보행 속도는 범부를 한참이나 넘어선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성인이 쉬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해도 반 시진이 넘게 걸릴 거리였다.
그 정도면 묵룡부에서도 상당히 떨어진 거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호정의 예민한 기감에, 묵룡부 인근을 도는 무사들의 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거리는 아닐 것이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안 느껴지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잘 설계되긴 한 모양이다.”
“설계……?”
순간 연호정의 두 눈에 맑은 빛이 어렸다.
광명신단을 열어 상단전을 완전하게 개방한 연호정이 기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허.’
공기의 흐름이 조금, 아주 조금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난 연후에 기감을 증폭시켜서야 겨우 깨달았다. 만약 양천의 반응을 보지 못했다면, 동떨어진 섬에 왔다고 착각할 정도로 주변에 인기척이 없었다.
“천궁미로대진(天宮迷路大陣)이다.”
양천이 손으로 허공을 휘휘 저었다.
“진법 내부의 기운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완벽히 차단하는 천궁진과, 초절정고수의 기감으로도 생로(生路)를 찾기 힘든 환영미로진(幻影迷路陣)을 합친 것이다.”
“……그런 진법이 있었습니까?”
“나도 진법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한다. 다만, 세상에는 무림인이 막연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진법이 존재한다. 그 난이도가 천차만별이고 특성 역시 제각각이라, 진법의 대가(大家)가 작정하고 만든 진에 갇히면 성천의 고수도 쉽사리 빠져나오기 힘들다고 하였지.”
몇 번 주위를 둘러보던 연호정이 일순 눈을 빛냈다.
“도피처입니까?”
“……역시 너는 똑똑하구나.”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여기는 혹시 모를 적의 습격에 부주인 내가 도주해야 할 상황이 오면 도달하게 될 안가(安家)다.”
“단순한 안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이다. 이곳에는 중원 최고급 미로진의 특성도 함께 섞여 있어. 진법의 전문가가 와도 파훼에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추적자들이 날 찾겠답시고 공터에서 나가는 순간, 놈들 모두가 평생 미로진에 갇혀 버리겠지.”
“당연히 사부님께서는 미로진을 탈출할 방법을 알고 계시겠지요.”
“당연하다. 도망치겠다고 만든 곳인데 내가 미로진에 걸려 아사(餓死)할 수는 없지 않으냐.”
연호정이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왠지 이곳, 단순한 안가로만 활용되는 건 아닌 듯합니다.”
“그렇다.”
주변을 둘러보던 연호정이 양천을 바라보았다.
뒷짐을 진 양천의 모습이, 어쩐지 이전보다 조금 더 커 보였다.
“성천의 고수라도 명상이나 내공 수련만 해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렇지요.”
“물론 안에서도 수련이야 할 수 있겠지만, 지닌바 모든 것을 쏟아 내면서 수련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럴 때 이곳에서 수련하시는군요.”
“놀랍지? 천하의 투왕이 전력을 다해 내친 공격으로도 이 안가는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는 걸 넘어서, 흠집 하나 제대로 내기가 힘들다. 경력(勁力)의 충격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거든.”
성천의 고수는 하나하나가 대문파 수준의 전력을 보유한 재해급 전력이다.
그런 고수의 힘을 고스란히 쏟아부어도 흠집을 내기 어렵단다. 그것만으로도 이 진법을 만든 자는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전에 말했던 믿을 만한 친구, 그 친구가 만들어 준 것이다.”
혈옥마군의 재능을 꿰뚫어 봤던 친구. 양천이 유독 신뢰하고 있던 그 친구.
연호정이 물었다.
“전부터 여쭙고 싶었는데, 대체 그 친구는 누구입니까?”
“알 거 없다. 홀연하기가 귀신과 같은 놈이라, 제 놈이 스스로 찾아와야 얼굴이라도 한번 본다. 먼저 초대도 못 하는 놈이야.”
“그렇군요.”
“뭐,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뒷짐을 푼 양천이 양손을 활짝 펼쳤다.
연호정의 얼굴에 작은 긴장이 떠올랐다.
“절대고수의 힘을 흡수할 수 있는 영역. 너비도 적당하니, 괴수들이 난장을 쳐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한판 붙는 겁니까?”
“왜? 의외냐?”
“조금 뜬금없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군.”
양천이 좌우로 천천히 목을 돌렸다.
“본디 싸움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도 벌어질 수 있는 것. 어느새 이유 따위는 중요치 않게 되는 것.”
“이유는 언제나 중요합니다.”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연호정의 좌측 얼굴에 길쭉한 상처가 났다.
번뜩이는 살기를 읽고 본능적으로 상체를 우측으로 뉘었다. 그래서 이 정도에 그친 것이다.
어느새 왼 주먹을 든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반응이 좋아.”
파아아아아앙!!
놀랍게도 다음 공격은 양천이 아닌 연호정이었다.
거의 양천과 흡사한 속도로 좌권(左拳)을 쏘아 내는데, 양천 역시 연호정과 비슷한 동작으로 안면에 날아드는 권포(拳砲)를 피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자세를 잡았다.
“이렇게 하는 겁니까?”
“배움이 빠르단 말이지.”
파파파파파팡!
기다렸다는 듯 서로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두 사람.
뜬금없는 장소에서, 뜬금없는 싸움의 시작이었다.
양천은 그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연호정은 그것이 궁금했지만, 듣지 않아도 몸이 먼저 반응하고야 말았다.
빠가각!
먼저 일격을 허용한 것은 연호정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두 주먹을 휘두르는 동시에 상대의 권격을 피했지만, 귀신처럼 몸을 낮춰 허벅다리를 때린 각법은 피하지 못했다.
파바박!
거리를 벌리는 연호정의 움직임이 조금 흔들렸다.
파아아아아악!
마치 양천이라는 사람을 십여 장이나 쭉 늘린 것만 같았다.
벼락처럼 거리를 좁힌 양천의 주먹이 연호정의 명치를 노렸다.
파악!
사선으로 움직여 주먹을 피한 연호정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대로 통과할 것만 같았던 양천의 주먹이 어느새 쫙 펴져, 가슴께의 옷을 움켜쥔 것이다.
‘위험!’
찌이이익! 퍼엉!
옷이 찢어지는 소리는 곧바로 터진 폭발음에 묻혀 사라졌다.
멱살을 잡고 끌어와 무릎으로 안면을 갈겨 버리려는 양천의 공격은 엄청나게 거칠고 과격했다. 무공 초식이라고 할 것도 없다. 이건 그냥 싸움이었다.
“대단하구나.”
양천이 손에서 힘을 풀자, 찢어진 연호정의 옷자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공 상쇄라? 거기까지 읽고 있었더냐?”
양천의 손에 옷이 잡히는 순간, 연호정은 광명신단을 풀어 미리 옷을 찢어 버렸다. 그러지 않았다면 양천의 내공이 옷자락에 흘러 들어와 천을 강하고 질기게 만들었을 터,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앞섶을 털며, 연호정이 말했다.
“제가 자주 쓰는 수법입니다.”
“역시 싸울 줄 아는 녀석이로고.”
번쩍!
양천의 눈이 빛났다.
앞섶을 털던 연호정이 어느새 반 장 안쪽으로 다가와 명치를 올려 치고 있었다. 주먹이 아닌 관수(貫手)다. 공기 저항을 최대로 줄인 채 손끝으로 급소를 뚫어 버리는 살벌한 공격이었다.
‘빠르다.’
툭! 촤악!
양천의 무릎이 올라와 연호정의 손목을 건드렸다. 양천의 명치를 뚫어 버려야 할 관수가 그대로 밀려 올라와 어깨를 스쳤다.
퍼어어억!
내리치는 주먹이 가슴에 꽂혔다. 연호정이 답답한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주먹을 내리친 그 자세 그대로, 양천이 말했다.
“보법을 제대로 쓰는군. 근거리 박투전에서 아주 효과적이다. 백타술(白打術)이 제법이야.”
천하의 연호정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온 천하에 셋을 넘지 않을 것이다.
연호정은 전투를 위한 거의 모든 무공에 능했다. 병장기술이 더 파괴적이지만, 권각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살기를 자랑했다.
한 가지 무공에 통달한 것이 아닌,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무공을 두루 익힌 것.
그런 면에 있어서 두 사람은 다르면서도 몹시 닮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일격 필살에 능하구나. 달리 말하면 나 정도 되는 고수들과 싸울 때는 그런 습관과 살법이 너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양천은 두 주먹만으로 투왕(鬪王)의 아성을 일군 전설적인 고수다.
연호정은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하는 군인(軍人)에 가깝다.
일대일 박투전의 기량에 있어서 백타술의 화신인 양천에게 뒤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죽자고 싸운다 해도 이룬 경지의 차이 때문에 이기기 힘들겠지만, 맨주먹으로 놓고 싸우는 비무라면 양천이 절대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 차이를, 연호정은 이 몇 합의 부딪침만으로 완벽하게 이해했다.
“처음입니다.”
화아아아악!
연호정의 몸에서 사색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어느 하나의 무공이 아닌 사신공(四神功) 전부를 끌어 올렸다.
모든 진기를 일깨우고 쓸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전부 쏟아부어도 이기기 힘든 상대였다. 간을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맨손 싸움만으로 이런 막막함을 느끼는 거, 처음입니다.”
“막막하다면서 표정은 아주 좋아 죽을 것 같구만.”
“그렇습니까?”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쿠구구구궁!
연호정의 기운이 돌풍처럼 타오르는 신비함으로 가득하다면, 양천이 뿜는 기운은 현무암처럼 검고 화강암처럼 단단했다.
크르르.
어디선가 낮은 맹수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연호정은 양천의 등 뒤에서 환상처럼 포효하는 거대한 흑사자(黑獅子)의 아가리를 보았다.
‘이것이.’
연호정의 눈에 경이로움이 깃들었다.
‘이것이 당대 투왕의 진신진력이구나.’
콰르르릉!!
절대고수의 기운조차 완벽히 흡수한다는 진법 내부.
하지만 양천의 전력은 다 흡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땅을 디딘 양천의 두 발 밑으로 강력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양천이 오른 주먹을 들어 올렸다.
휘이이이잉!!
시커먼 흑사자의 갈기가 바람이 되어 그의 주먹과 팔뚝 전체를 휘감고 회전했다.
한없이 어둡지만, 연호정의 사신공보다도 화려해 보였다. 일대의 공기를 몽땅 빼앗을 것처럼, 주먹과 팔에 걸린 흑풍(黑風)의 회전이 대단했다.
양천이 담담히 말했다.
“흑도 연맹은 역사가 없다. 나의 힘에 굴복했을 뿐, 흑도의 주인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신물(信物)이나 의복 같은 것도 없다.”
“언제나 그래 왔지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 나는 역사의 시초가 되었고, 너는 역사를 끌어 올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 흑도에도 역사가 생기는 것이다.”
우우우웅!!
양천의 두 눈에 흰자위가 없어졌다. 모조리 검게 물든 그의 눈은 악마와 같았다.
“흑도의 맹주를 대표하는 것은 언제나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소림의 백보(百步)와 같이, 무당의 태극(太極)과 같이 대를 이어 전해질 것이다.”
“……?!”
“자세 따위 봐줄 시간이 없다. 네 수준과 오성을 믿겠다. 알아서 배워라.”
훅!
양천의 선풍사자권(旋風獅子拳)이 공간을 격하고 연호정의 가슴에 닿았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