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08화 (808/963)

808화. 굴에 살지 않는 범 (2)

“……호오?”

양천이 피식 웃었다.

“그랬단 말이지?”

백서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어서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려? 왜?”

“예?”

“흑도의 작은 주인으로서 기강 한번 잡겠다는데, 그걸 왜 말리나? 놔둬야지.”

“부주님! 자칫 잘못하다가는 본부에 반감을 품은 조직들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없나?”

“……?!”

“그런 조직이, 지금은 없을 것 같은가? 철철 넘쳐흐른다네. 다만 나의 명성과 힘에 굴복하여, 죽기 싫어서 하나로 뭉쳤을 뿐이야. 그런 흑도 문파들이 적어도 반은 될걸?”

“하지만……!”

“나는 그들을 온건하게 이끌 생각이었다네. 그럴 수밖에 없지.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피를 보았으니까.”

“소부주는 그렇지 않습니다. 애초에 우리 흑도의 인물이 아니었던 만큼, 자칫 이번 사태로 많은 세력이 등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 없을 걸세.”

“……예?”

“보면 안다네. 흑도 문파 수장들에 관한 얘기는 질리도록 많이 해 놨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그 녀석이 생각하는 하나 된 흑도가 어떤 것인지 맛이라도 보자고.”

양천이 차갑게 웃었다.

“천천히 시작할 줄 알았더니, 바보 같은 산적 놈들이 벌써부터 시작종을 울려 버렸구만.”

* * *

‘역시 똑같군.’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묵룡부 소속 무사들은 웅성거리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와 똑같아. 이들의 이러한 성향은 절대 바뀌지 않는군.’

흑제성을 만들고 흑도 자체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시절.

그 시절에도 이들은 똑같았다.

조직의 수장을 포함, 강력한 전투 부대원들을 제외하면 평무사들은 어떤 사태가 터져도 절대 먼저 나서지 않는다.

무림맹도 비슷하다? 물론 그런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눈빛과 정신력부터가 다르다.

무림맹의 일원이 된다는 것 자체가 강력한 동기를 주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은 정파 무림의 상징이고, 그곳의 무사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림인에게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들여진다.

연호정 입장에서야 그따위 게 영광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중요한 것은 집단 소속원으로서의 강한 자긍심이었다.

물론 때로는 그 자긍심이 과격해져 불운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긍심과 오만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들이 저지르는 잘못일 뿐, 집단에 자긍심을 느끼는 것은 분명 중요한 덕목이었다.

흑도인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강한 이에게 모여들고, 강한 이가 당하면 금방 흩어진다.

그것이 흑도인들의 생존 방식이었다. 때로는 비굴하고 때로는 수치스럽지만, 명예롭게 죽는 것보다는 진흙탕에 구를지언정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먼저다.

현명하다면 현명한 태도였다. 그러나 하나 된 소속감을 지닌 채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것과, 그저 나만 알고 도망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묵룡부라는 집단에 대한 자긍심 넘치는 소속감을 가졌다면, 분명 먼저 나서는 이가 있었을 것이다.’

설령 아무도 나서지 않았더라도 분위기부터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흥미로움과 두려움, 께름직함이 어린 시선으로 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하나로 만드는 과정의 시작이라.’

연호정의 미소가 살벌해졌다.

“옛날 생각나는군.”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워낙 식당이 조용해서 모두가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묵비가 말했다.

“연 공자, 괜히 나 때문에 이러는 거면…….”

“못 들었어? 이건 너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너는 피해자다. 머저리 같은 산적 두목 놈 때문에 내 사람인 네가 피해를 보았어.”

연호정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

고개 숙이는 연호정을 보고 묵비는 살짝 놀랐다. 연호정에게 이런 식의 사과를 받아 본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굳이 이런 일로 머리를 숙일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

묵비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묵룡부의 무사들은 물론 조필도의 호위들도 경악한 얼굴로 연호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묵비가 강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듯 살짝 미소 짓던 강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비가 헛기침을 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요. 그렇게까지 고개 숙이지 마요. 이제는 부담스러워요.”

“그래, 알았다.”

고개를 든 연호정이 팔짱을 끼고 조필도를 보았다.

조필도는 덜덜 떨고 있었다. 고통이 심했지만, 점점 커지는 공포에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호정의 기세는 조금씩 조금씩 식당 전체를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이 영역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도, 입을 열지도 못했다.

연호정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잠시 후.

후욱!

매서운 중압감으로 완전히 장악된 식당으로 사나운 기운 하나가 빠르게 접근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자.

오십 세를 넘긴 나이지만 키는 연호정만 했고, 덩치는 오히려 연호정보다 컸다.

더하여 온몸이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그렇다고 둔해 보이지는 않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육체의 소유자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반백의 머리, 위압감 넘치는 눈매와 요대에 매단 박도(朴刀)가 놀랍도록 잘 어우러지는 남자.

당대 녹림왕, 호마(虎魔) 조동국(趙凍菊)의 등장이었다.

“……!!”

이미 얘기를 들은 듯, 조동국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오셨군.”

연호정의 담담한 목소리가 긴장감 넘치는 이 상황에 무게감을 더해 주었다.

조동국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묵룡부의 무사들, 아들놈의 호위, 묵비와 강량, 마지막으로 조필도를 향하는 시선.

조동국의 눈매가 씰룩거렸다.

‘빌어먹을.’

그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질 않았다.

‘한 번만 더 사고를 치면 팔다리를 뽑아 개먹이로 준다고 했거늘, 이런 대형 사고를 쳐?!’

조동국은 언제나 바빴다.

산적왕이라고 아랫놈들이 챙겨 주는 걸 받아먹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산적들의 왕이기에 더더욱 바빴다.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려는 놈들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고, 중간 세납액을 빼먹으려는 놈들은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그런 놈들을 일일이 상대하고 관리하려면 엄청난 심력 소모가 필요하다. 하물며 무력으로 찍어 누르기 위해서는 하루도 수련을 빼먹지 말아야 한다.

그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나면, 수면 시간 외의 개인 시간이 한 시진도 채 남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둘째 아들놈의 도 넘은 행위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불러서 훈계한 적은 손에 꼽혔다.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경고도 주고 손도 대 봤지만, 역시나 아들놈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아들놈의 그러한 행위가 엄청 심각한 문제라고까지는 생각지 않았다.

산적이다. 총채주의 자식이라면 그만한 품격이 있어야겠지만, 이 정도 막 나가는 걸로 목을 날려 버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다만 세상이 바뀌고 있기에 몸을 사리라고 두어 달 전 크게 혼을 냈다. 당분간 또 그런 짓을 하면 진짜로 죽여 버리겠다며 소리를 쳤더랬다.

한데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친 것이다. 심지어 묵룡부 안에서!

“소부주.”

몇 걸음 앞으로 걸어온 조동국이 포권을 취했다.

“아들놈 관리를 제대로 못 했소이다. 그래도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은 몰랐는데, 몸 둘 바를 모르겠구려.”

“그렇소?”

“내 이렇게 사과하오. 망종 같은 아들놈 때문에 면목이 없소.”

“사과는 중요하지 않소이다.”

“……?”

“사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가 중요하지. 안 그렇소?”

조동국의 얼굴이 더더욱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총채주씩이나 되는 분의 자제가 세상 돌아가는 꼴도 모르고 날뛸 것 같지는 않단 말이오.”

“……?”

“물론 세상에는 그런 머저리들도 많소. 앞뒤 안 가리고 날뛰는 망종들, 하도 버릇없이 커서 자기가 황태자라도 되는 양 설치고 다니며 그보다 더 강한 힘 앞에 굴복할 머리도 없는 놈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아니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의도라고 할 것까지야 있겠소? 조금만 머리를 굴려 보면 답이 나오는 건데.”

연호정이 싸늘하게 웃었다.

“수만의 녹림도를 다스리는 총채주의 자식이라면, 아무리 버릇없이 컸다 해도 건드려도 될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머리 정도는 있겠지. 한데 이놈은 내 친구를 건드렸고, 감히 소부주인 나의 직책을 함부로 부르기까지 했소이다.”

“소부주, 그것은…….”

“설마 이놈이 정말 그런 망종이란 말이오? 아닐 거요. 역사상 손에 꼽히는 위업을 달성하셨다는 산적왕께서 자식을 그리 가르쳤을 리가 없지.”

“……!”

“안 그렇소?”

조동국의 눈이 흔들렸다.

여기서 ‘소부주가 말한 대로 망종 같은 놈이오.’라고 말하면 완전히 체면을 구기게 된다. 아들놈 하나 제어하지 못한 얼간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리되면 자칫 아들놈이 뭔가 의도를 품고 소부주를 능욕했다는 소문이 돌게 되기 때문이다.

그 소문 자체는 상관없다. 문제는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조동국이 고개를 숙였다.

“소부주에게 사과드리겠소. 근래 저 녀석에게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다고 들었소. 이 정도 실수를 하는 녀석이 아닌데, 무척이나 심란했던 모양이오.”

“오호, 평소와 같지 않은 상태란 말이오?”

“그렇지 않다면 언감생심 어찌 소부주에게 이런 무례를 저지르겠소? 부디 내 얼굴을 봐서라도 아들을 용서해 주시오.”

녹림총채주로서 이렇게까지 머리 숙여 사과하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능구렁이 같은 놈.’

아들이 머저리라는 말도 피했고, 아들에게 아무 의도도 없을 거란 말도 피했다.

이런 중압감 속에서 저리 머리를 굴리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숙일 때 확실하게 숙일 줄 아는 저 철면피 같은 낯짝이야말로 조동국이 총채주가 될 수 있었던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대가 어찌 산적왕이 되었는지 알겠소. 과연 수만의 녹림을 휘어잡은 녹림왕다운 처세요.”

조동국이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민망할 따름이오.”

처세라는 말 앞에서도 당당하다. 그것이 조동국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 아들을 용서할 수는 없겠소.”

“……소부주.”

“이놈은 내게 무례를 저지른 것은 물론 내 친구를 희롱하기까지 했소.”

“그것은 말씀드렸다시피…….”

“결정적으로!”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항상 훈련과 업무로 바쁜 무사들의 유일한 행복인 식사 시간을 이 멍청한 놈이 망쳐 버렸소이다.”

“……!”

“이 한 놈 때문에 피해를 본 이가 삼백이 넘소. 나아가 호칭만 들어도 나를 인정치 않음을 알겠소. 무사들에 대한 예우도 없고, 묵룡부 소부주에 대한 인정도 없소. 이것은 묵룡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해석할 수 있소이다.”

조동국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연호정의 눈빛에 강렬한 위엄이 어렸다.

“내가 이놈을 살려 둬야 할 이유가 있소이까?”

“…….”

“설마 그대도, 그대 아들과 같은 심정이오?”

“소부주.”

“큰아들의 재능이 대단하다고 들었소. 첫째를 묵룡부 후계자 자리에 밀어 넣지 못해서 한이 쌓이셨소이까?”

차아아아앙!

조동국이 칼을 뽑았다.

식당 안에 있는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무슨 의미요?”

“소부주.”

“말씀하시오.”

“소부주에게 무례를 저지른 아들놈을 정녕 용서해 줄 수 없겠소?”

“내가 할 말은 다 했소만.”

“그렇다면.”

조동국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내가 벨 수 있게 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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