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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812화 (812/963)

812화. 굴에 살지 않는 범 (6)

연호정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빨랐다.

본래 며칠의 시간을 둔 이후 하나하나 정리할 생각이었지만, 조필도가 운명과도 같은 사건을 터트려 준 덕분에 갑작스레 할 일이 많아진 것이다.

대전에 모인 수장 중 벽운호를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

그들을 제거하는 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양천도 그러했고, 연호정도 그러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중심 조직을 개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조직과 줄을 댄 이들을 청소하는 것도 중요한 법이다.

연호정은 묵룡부 내부보다는 흑도 문파들부터 정리하는 게 우선이라고 보았다. 이유인즉, 묵룡부의 변화를 여러 문파가 민감하게 읽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생존에 특화된 이들인 만큼, 시간을 주면 숨기지 말아야 할 것을 숨기고 없는 공도 드러낼 것이다. 흑암제 시절 온갖 망종들을 봐 왔던 연호정은 그들의 본능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죽은 수장들의 문파에 서신을 보낸 것 역시 그런 이유였다. 본래는 그들이 왔을 때 모두를 불러 놓고 한 방에 해결할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결국 이렇게 되었다.

“화끈해서 좋기는 한데, 너무 급하게 움직이는 것 아니냐?”

양천의 질문에 연호정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루라도 빨리 법도를 세우라고 녹림에서 기회를 줬는데, 기회가 온 김에 해치워 버려야지요. 오히려 저는 좋은데요.”

“흐음, 그런가?”

“그리고 이거, 급한 거 아닙니다. 빠른 거지요. 미래를 위한 분명한 지도를 그려 놓은 이상 거리낄 게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연호정은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양천 말마따나 무극의 깨달음과 치열한 실전 경험 덕에 순식간에 배우긴 했지만, 흑사자기와 선풍사자권이 강호 정상급 무공임은 분명했기 때문에 몸에 붙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묵룡부에 새바람이 남긴 흔적이 지워지기도 전에 또 한 번의 폭풍이 일었다.

* * *

“마지막 보고입니다.”

백서가 서신을 펼쳐 놓고 말했다.

“강서와 절강 인근에서 은밀한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제법 대규모의 고수 집단으로 보이는데, 삼교 측 인물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정보도 그렇고, 개방에서도 눈에 띄는 삼교 놈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했네. 삼교는 아니겠지.”

“예.”

“어느 정도의 힘인가?”

“아직 전부가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까지 확보한 정보만으로도 철기단에 준하는 전력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건 대단하군.”

“어떤 조직과 연관이 있는지 파악 중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 쪽은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흑도 문파들에 관한 정보 대부분을 수집하고 있는 묵룡부였다. 혹 놓친 게 있다고 해도, 흑도의 정보단은 철기단에 준하는 무력 단체가 존재하는 걸 모를 정도로 어설프진 않았다.

“백도 무림 측의 전력이거나 그도 아니면…….”

“새외의 무력 단체일 수도 있습니다. 중원의 의복을 입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 옷이야 얼마든 바꿔 입을 수 있으니까요.”

“맞는 말이야. 생각해 보니 그럴듯하군. 삼교 때문에 숨죽이고 있기는 해도, 새외의 문파들 역시 그 힘이 대단하지. 중원이 이 난리가 났으니 잘됐다며 치고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어.”

“그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놈들은 절강 해안을 통해 왜인(倭人)들과도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다 합니다. 명예를 중시하는 백도 무림에서 건드릴 만한 곳이 아닙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조사하라고 하게. 공금이 부족하지는 않겠지?”

“물론입니다. 이전에 얻었던 천금을 정보단에 투입했습니다. 한 해 전보다 한층 날카로운 정보력을 보여 줄 것입니다.”

“좋아.”

양천이 한숨을 쉬며 태사의에 몸을 묻었다.

“세상 참, 바람 잘 날 날이 없구먼.”

“…….”

“오늘도 고생했네. 이만 가서 쉬게나. 자네도 요새 너무 바빴네.”

“……부주님.”

“음?”

양천이 백서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여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양천은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백서가 뭔가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양천이 웃으며 말했다.

“사제지간까지는 아니라지만, 내 자네에게 무공도 전수해 준 사람일세. 군신지간이라고는 하나 자네와 나 사이에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나? 괘념치 말고 말해 보게.”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허리를 든 백서가 양천을 보며 말했다.

“소신은 그저…… 지금의 상황이 너무 급작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어서 걱정입니다.”

편히 말하라 해도 개인적인 걱정을 대놓고 말한 적이 드문 그였다. 그만큼 백서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어떤 부분에서 말인가?”

“소부주가 벌이고 있는 일 말입니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역시 그거였나?”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나. 사실 나도 한 번씩 움찔움찔할 때가 있어.”

백서의 눈이 흔들렸다.

“소부주, 아니 패왕은 분명 놀라운 인재입니다.”

이전이었다면 이름 석 자를 불렀을 것이다. 천하의 백서라도 성천에 이름을 올린 연호정을 함부로 부르기는 힘들었다.

“무공과 지략에 있어, 그야말로 타고난 사람이지요. 재능도 대단하지만, 그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노력하는 이이기에 더욱 놀랍습니다.”

“물론 그렇지.”

“그러나 이번 일은, 불학무식한 소신이 생각하기엔 너무 지나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가?”

“죽은 흑도의 수장들은 그간 묵룡부가 성장하는 데에 큰 힘이 되어 준 이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곧장 없애 버린 것은 흑도 무림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 파장이 번져 가고 있지요.”

양천은 백서가 그들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파장이라.”

“그렇습니다. 그들이 죽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알게 된 여러 문파의 시선입니다.”

양천도 그렇지만, 백서 역시 세상을 힘으로만 거머쥘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흑도의 최고 미덕은 힘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가치냐고 묻는다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흑도에도 그 나름의 정치가 있다. 어떤 의미로는 백도의 정치보다 더 살벌하다.

백도의 정치에서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내일의 악몽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흑도의 변절은 하루 상간이 아니라 각(刻)의 상간으로 이뤄진다. 방금까지 같이 웃으면서 술을 마셨던 놈이 측간에 다녀오자마자 칼을 뽑고 달려들 수 있는 곳이 흑도다.

그처럼 변화가 빠르고 배신이 당연한, 살벌하기 그지없는 흑도 세상에서 묵룡부가 세워진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아가 양천은, 그 자신이 이룩한 명성과 막강한 무력으로 수많은 문파를 힘으로 굴복시켜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

그래서 양천을 따르는 이들은 그를 단순한 군주로 보지 않았다.

흑도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열망을 지닌 이들에게 있어 양천은 거의 신(神)에 가까웠다. 누구도 나서서 그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사람이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양천의 위엄과 영향력이 워낙 압도적이라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을 뿐, 그의 영향력이 조금만 덜했더라도 벌써 여러 문파가 묵룡부에서 손을 떼었을 것이다.

멍청해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살아온 이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흑도인들은, 자신들의 그런 행동을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주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분입니다. 지금껏 부주님께서 이뤄 놓으신 무수한 위업은 찬사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근래 패왕이 벌이는 일들은, 제아무리 부주님의 허락하에 벌이는 일이라도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양천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왜? 소부주의 급진적인 행동이 이 자리의 위엄을 해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백서 성격에 그렇다고 말한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백서는 감히 입에 담기도 힘든 말을, 오늘 끝까지 해 볼 요량이었다.

“나아가…….”

“소부주의 그런 모습이 나의 영향력과 위엄을 떨어트리고, 오히려 부주인 내가 녀석에게 휘둘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백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습니다.”

“허허.”

“죽여 주십시오.”

“예끼, 이 사람아. 내가 자네를 왜 죽이나?”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내 휘하에 수하는 많아. 그러나 내 마음을 온전히 전하는 사람은 몇 없네. 그중 하나가 자네야.”

“영광이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자네가 내 등에 칼을 꽂는다 해도 나는 결코 자네를 죽이지 않을 걸세. 어떤 이유에서건, 적어도 한 번은 자네를 용서할 것이야.”

백서의 얼굴에 격동이 깃들었다.

흑도에서 한 번의 용서는 곧 최고의 신뢰를 뜻한다.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이 날아가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즉, 양천의 말은 백서에게 제 목숨을 쥐여 줘도 아깝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자네와는 다른 의미로, 연호정 그 녀석을 믿는다네.”

“……!”

“자네에게 보이는 신뢰는 말 그대로 신뢰일세. 사람에 대한 신뢰 그 자체에 있어. 그러나 연호정에게 보이는 내 신뢰는 다르네.”

양천이 눈을 감았다.

연호정을 떠올리는 듯 고소를 짓는 그 표정이 꽤 압권이었다.

“나는 녀석의 욕망과 미래를 알아. 그리고 그 욕망이, 목적이, 꿈이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네.”

“…….”

“녀석은 누구보다도 가족을 위하는 놈이야. 한데 이번 소부주 건으로 인해 가족까지도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어.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놈이 얼마나 고뇌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군.”

백서의 눈이 흔들렸다.

“물론 믿는 구석이야 있겠지. 그러나 그러한 행위 자체가 녀석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일 것이네.”

양천이 눈을 떴다.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은, 투왕이라는 별호답지 않게 무척이나 현명해 보였다.

“이제 녀석에겐 뒤가 없네.”

“그래서 더더욱 걱정입니다.”

“뒤가 없으니 앞만 보고 달린다 하여, 그것이 꼭 급한 것은 아니지.”

“……예?”

“새로운 세상을 위해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네. 그리고 이제부터 그 대화를, 앞날을 자네에게도 보여 주고자 하네.”

이게 무슨 말일까?

의아해하는 백서를 두고, 양천이 대전의 문을 향해 외쳤다.

“들라 하라.”

쿠구구궁!

문이 열리고 연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어찌 조용히 있었느냐?”

“중요한 대화를 나누시는 것 같아 기다렸습니다.”

“네 녀석에게 그런 배려심도 있었단 말이냐?”

“사부님과 저의 관계가 아무리 남들 같지 않다고 한들, 최소한 지킬 건 지켜야지요.”

양천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겉으로라도 그래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구나.”

“하하, 농담입니다.”

연호정이 백서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백서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연호정은 백서를 보지 않았다.

연호정이 품에서 잘 접힌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새로이 만든 조직 개편도입니다.”

“벌써 만들었느냐?”

“외부 정리가 진행 중이니, 시간에 맞춰 내부 정리도 시작해야지요.”

“쉬면서 하거라. 무극의 경지에 올라도 사람은 사람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우우우우웅.

허공섭물로 종이를 받아 낸 양천이 흥미로운 눈으로 내용을 읽었다.

“파격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구먼.”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전보다 확실히 실용적이군. 이대로 간다면 제법 난리들이 나겠어.”

“그건 어쩔 수 없지요.”

종이를 접은 양천이 연호정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슬슬 동굴에서 나가자고?”

“예전부터 나가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공사도 진즉 들어갔어. 새로운 흑도 연맹은 지하가 아닌 지상에서, 당당히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예.”

왜일까?

이 순간 양천은, 저도 모르게 연호정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새 터전의 이름, 이 성(城)의 이름을 무엇이라 지으면 좋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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