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6화. 다시, 무림맹으로 (2)
쿠구궁!
문이 열리고 연호정과 패율이 나왔다.
“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패율이 가래를 뱉었다. 지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저런 머저리들 작살내는 것 정도엔 전력을 다할 필요도 없다.”
“그런 것치고는 온몸이 피투성이입니다.”
“내 피 아니다. 직접 봐서 알잖아.”
연호정이 웃으며 패율의 어깨를 가리켰다.
“베였습니다.”
“…….”
패율이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연호정 말대로였다. 의복 어깨 부근이 살짝 베여 있었고, 그 아래서 점점이 핏물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적의 피가 아닌 그 자신의 피였다. 말 그대로 생채기에 불과해서 상처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지만, 어쨌든 그 애송이들의 무공이 그의 몸에 닿은 건 확실했다.
패율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단창과 소검은 길이가 짧은 만큼 확실히 빠르지만, 선배의 무공은 기본적으로 넓은 범위를 아우릅니다. 방대한 내공과 수준 높은 기공술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지요.”
“…….”
“이런 제한된 영역에서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으실 겁니다.”
“……할 말이 없군.”
“선배의 무공은 완성되었습니다. 다만 이건 경험의 차이라고 봐야겠지요. 좁은 공간에서의 싸움에 익숙해지면, 지금보다 훨씬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으실 겁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실전을 겪은 직후 들은 얘기라 와닿는 게 컸다.
가만히 어깨를 내려다보던 패율이 물었다.
“언제 당했지?”
“두 놈 죽기 직전에요.”
“왜 말하지 않았느냐? 성공했다고.”
“말린다고 들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말도 안 돼. 네가 개입했다면…….”
“결정적으로, 저는 놈들을 다 죽이고 싶었습니다.”
패율의 눈이 번뜩였다.
“나를 무기로 쓴 거냐?”
“그리고 선배는 그에 동의했지요.”
“내가 언제?”
“선배 성격에 싫으면 바로 나가 버리지, 창칼부터 뽑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뭔가 달라진 것 같다.”
“그렇습니까.”
“아무리 쓰레기 같은 놈과의 약속이라도 한번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놈 아니었더냐? 한데 이걸 그냥 두고 봤어?”
“그건 선배 좋을 대로 한 해석입니다.”
“뭐?”
“삼교 놈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 저는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비단 삼교만이 아니죠. 적이라고 판단한 놈들에게 약속 같은 거 지킨 적 없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속여야 쉽게 죽여 없앨 수 있을지 고민했지요.”
“…….”
“흑도 무림의 후계자가 된 연후, 무림맹에서 쓰던 가면을 벗어던진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없어요. 방식도 같습니다. 그저 내가 보이는 모습이 더 강압적이고 딱딱해졌을 뿐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선배 생각을 교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너…….”
“이런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돌아가시면 됩니다.”
“…….”
“적어도 묵룡부의 작은 주인으로 사는 이상, 이전보다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온건하게 살지는 못할 겁니다.”
연호정을 보는 패율의 눈이 점점 차가워졌다.
반면 패율을 보는 연호정의 눈에는 묘한 여유와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전에 저도 하나 물어보지요. 선배는 왜 이리 변했습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더 강해진 무공과 여유를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는 또 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진 것 같습니다.”
“뭐라고?”
“종남 전쟁이 끝난 후 이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실은 싸움을 원한 게 아니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창칼을 휘둘러야겠다.”
“……!”
“대충 그런 의미의 말로 기억합니다만, 틀렸습니까?”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지금 선배가 보여 주는 모습,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만족할 만한 싸움을 할 수 있다면 그만이었던 그때 당시보다 더 예민한 것 같군요.”
패율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무인으로서 당당한 승리를 거머쥐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그런 싸움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 싸움의 목표는 이 세상 자체에 있습니다.”
그 방식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진 않는다. 그저 이렇게까지 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만의 선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선을 넘지 않는 한에서는 어떤 거친 수법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
“선배는 이만 맹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곳에 선배가 마음껏 활약할 만한 싸움은 없습니다.”
“나는…….”
“찝찝함을 안고 함께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선배는 선배 방식대로 세상을 위해 살아가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패율은 아무 말 없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짧게 포권을 취했다.
“마음을 정하시면, 그때 술 한잔하지요.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연호정은 벽제문과 한종림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패율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 선배님?”
한창 수련하던 강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 나오셨습니까?”
“얼마 안 됐다.”
“그랬군요. 근데 엄청 변하셨는데요?”
안 그래도 날카롭던 인상이 살이 빠져 더더욱 날카롭게 보였다.
패율이 강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너도 꽤 발전했구나.”
“멀어도 한참 멀었죠. 선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강량은 패율의 무공이 이전과는 비교조차 안 될 만큼 크게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폐관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까지 발전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히 정파의 정종 무공은 흑도의 사나운 무공과 결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있냐?”
“…….”
물끄러미 패율을 보던 강량이 히죽 웃었다.
“좋은 놈 꿍쳐 둔 게 있죠. 마침 칼질도 지루해졌는데 한잔하실까요?”
“그래.”
잠시 후.
“안주는 없습니다.”
“일없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패율이 감탄한 얼굴로 술병을 바라보았다.
“뭔 술이냐? 엄청 청아한데?”
“형님 소부주 대관식 때 나왔던 술입니다. 맛이 좋아서 몇 병 빼놨죠.”
“…….”
“왜 그러십니까?”
패율은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았다.
“마음이 좀 그렇군.”
강량은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워낙 성격이 딱딱해서 주변 사람과 잘 어울리지 않는 패율이었다. 그런 패율과 가장 많이 술잔을 기울인 사람이 바로 강량이었다.
“육대세가의 장남이 흑도 무림의 후계자가 된 일은 아무래도 이상하긴 하지요?”
“이상하다뿐이냐? 솔직히 폐관에서 나와 소식을 듣고는 기절할 뻔했다. 단순히 웃어넘길 사안이 아니야. 일대 사건이지.”
“그렇지요.”
“정파 명문 출신의 고수들이 흑도로 이적한 일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살았어. 살인과 약탈 등 감히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놈들이 목숨을 부지하고자 흑도에 투신하는 일은 지금도 벌어진다. 하지만 녀석은 그런 놈이 아니잖느냐.”
“뭐, 그간 어지간히 미친 짓을 많이 벌였던 양반이니까요.”
“너는 놀라지 않았단 말이냐?”
강량은 솔직하게 말했다.
“놀랐습니다. 그리고 심경이 복잡하기도 했죠.”
패율 역시 강량의 마음을 이해했다.
강량에게 있어 연호정은 강호에서 처음 사귄 의형제였다. 실제로 친혈육처럼 믿고 따르는 사람이었으며, 지금의 발전도 연호정 덕분이었다.
스승이자 형제이며 은인이다. 그런 사람이 철천지원수인 양천의 제자로 들어갔다.
‘생각해 보면 이놈은 나보다 더했겠군.’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살아온 그였다. 한데 가족처럼 아끼는 사람이 원수의 제자로 들어갔으니, 그 충격이야 말도 못 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도 받아들였단 말인가.’
과정이 어쨌든, 이 상황을 이해하고 인정했을 것이다. 지금 강량의 두 눈에 혼란과 미혹은 엿보이지 않았다.
패율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놈에게 화가 났다.”
“이해합니다.”
“아무리 막 나가도 같은 영역에서 숨 쉬고 살 줄 알았어. 한데 묵룡부의 소부주가 된 것도 모자라 그따위 말을 하다니…….”
“무슨 말을 했길래 그러십니까?”
패율은 연호정과의 대화를 그대로 들려주었다.
어지간하면 이런 말도 안 할 텐데, 지금 상황이 무척 답답하긴 한 모양이었다.
강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랬습니까?”
“난 모르겠다. 그놈 말마따나 나 역시 변했을지도 모르지. 성장한 이 힘을 뽐내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차마 못 잡은 거 아닙니까?”
“……뭐?”
강량이 패율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형님이요. 선배님을 잡고 싶기는 한데 잡으면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사정을 설명하자니 선배가 화낼 것 같고.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하긴, 그 양반 평소에는 엄청나게 솔직해도 꼭 한 번씩 이렇게 어설픈 대응을 하니까요.”
패율은 답답했다.
“무슨 말이냐니까?!”
“선배는 점창파 장로 아닙니까.”
“……어?”
“흑도 무림의 후계자와 함께하는 점창파 장로. 세상이 점창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패율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선배는 아무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죠. 심지어 점창파 장문인께서도 문제 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점창 문인 모두가 그럴까요?”
“……!”
“선배는 우리와 달라요. 저나 누님이나 그 외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형님과 함께했습니다. 하지만 선배는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선배는 정파의 기둥, 구대문파의 하나를 담당하는 명문의 장로입니다.”
“…….”
“형님은 선배를 신뢰합니다. 선배 역시 형님을 신뢰하죠. 그러나 개인 간의 신뢰로는 해결할 수 없는 벽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군.”
“그나마 연호정이라는 이름이 천하를 위진하고 있기에 크게 난리가 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선배는 달라요. 그것은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차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구파일방 대부분은 민중의 염원으로 모인 종교나 의인 단체로 시작되었다. 하여 그들이 가진 무게감은 속세의 무가들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반면 육대세가는 다르다. 같은 정파지만, 말 그대로 가문이기 때문에 실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세상이 그들을 보는 눈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간 연호정이 워낙 큰 공을 세웠고 명성이 드높아서도 있지만, 그가 구파일방 출신이었다면 지금쯤 천하가 완전히 뒤집혔을 것이다.
그것이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차이였다.
“선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형님께서 선배와 함께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분명합니다. 그건 선배의 문제가 아니라 백도의 문제이고, 또한 흑도의 문제입니다.”
“…….”
“아마 형님께서도 일부러 매몰차게 대했을 겁니다. 물론 그저 추측이지만요.”
패율의 눈이 깊어졌다.
자신의 잔을 비운 강량이 피식 웃었다.
“저도 선배의 그 말 기억납니다. 싸움 자체에 환장했던 게 아니었다는 말.”
“…….”
“선배가 원하는 세상, 선배가 나아가야 할 목표, 그것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다른 영역에서 활동한다 해도, 형님과 선배가 추구하는 목표가 크게 다를 것 같진 않습니다. 결국 이유 없는 싸움을 끝내고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나아가려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지.”
“언제까지나 함께할 순 없잖습니까?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량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형님과 어색해지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겁니다.”
“…….”
“그리고 형님과 저는 그걸 감수하기로 했지요.”
느닷없이 흑도의 후계자가 되어 버린 연호정.
그 한 사람의 선택으로 인해, 이렇게나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되었다.